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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절대 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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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형님, 절대 속지 마세요!"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지난 연말 귀국하시기 전까지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다가 귀국 후에는 언젠가 찾아뵈야지, 생각만 하고 있던 중에 총리 임명 수락 소식을 들었습니다. 첫 느낌은 당연히 어리둥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 뵌 지가 참 오래네요. 연전 대권 물망에 오르셨을 때 메일로 간간이 제 의견을 알려드렸는데, 이번에도 신상에 큰 변화가 있으시니 묻지 않으셔도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만 이번에는 공개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형님이 이미 결정을 내린 마당에, 형님 사람됨을 어느 만큼 아는 제 생각을 털어놓는 것이 저와 같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도움되는 면이 있지 않을까 하는 뜻입니다.

왜 어리둥절해 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죠. 총리로 임명하고 그 임명을 수락하는 것도 하나의 거래 행위죠. 그것도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연속적 거래 관계의 출발점을 만드는 일입니다. 당장의 수지만 따질 일이 아니라 이어질 거래 관계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 결정입니다. 그런데 MB가 과연 신뢰를 줄 만한 거래 상대인지?

MB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많은 사례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정말 기막힌 것은 오바마가 당선됐을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 온 오바마의 입장을 놓고 "선거 때 무슨 소리는 못하냐"던 한 마디였습니다. 누구나 상황에 몰려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보통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만큼씩 괴로워합니다. 불편한 마음이라도 느낍니다. 남의 나라 대통령 당선자 공약을 놓고 자신 있게 "그거 거짓말일 거야." 말할 수 있는 수준의 거짓말 불감증은 요즘 세상이 아무리 험해졌다 해도 흔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형님의 '야망' 운운 하는 얘기들이야 뭐 눈에 뭐만 보이는 격이겠지만, 그런 얘기들이 횡행하는 것은 형님의 이번 결정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겠죠. 형님의 케인스주의 경제관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어울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많이들 떠올리는데, 그 정도 문제에는 형님이 당당하게 임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서지 않는 것보다 나섬으로써 사회에 더 공헌할 수 있다는 양심의 기준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 정운찬 총리 후보자. ⓒ프레시안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은 형님이 뭘 믿고 MB와 거래 관계를 맺느냐는 겁니다. 거래 상대방은 "나는 상황에 따라 무슨 소리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권리와 책임이 함께 엮이는 것이 좋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일이라고 어떻게 판단하실 수 있었는지?

언론에선 '투항'이란 말도 나오더군요. 형님이 자신의 야망을 위해 소신을 버리고 MB 밑에 기어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형님 사람됨을 어느 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얘기죠.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을 '하기'만을 바라는 형님 체질로는 야망 때문에 소신을 버린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형님이 총장 하신 것도 말 그대로 떠밀려 한 것 아닙니까? 형님이 어떤어떤 일을 잘 할 거라고 열심히 밀어준 분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형님처럼 합리적이고 겸손한 사람이라면 어떤어떤 짓은 할 염려가 없다고 믿어준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잖아요?

국민의 정부 시절이던가? 한국은행 총재 하마평이 나돌 때, 형님은 언제고 금융통화위원을 맡아보는 게 교수직을 넘어서는 유일한 꿈이라고 하셨죠. 총장이 되었을 때, 나 같은 촌놈이 서울대 교수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총장까지 해보다니, 출세는 이제 더 생각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셨죠. 형님이 촌에서 막 올라왔을 때부터 봐온 제 귀에는 형님의 진심이 가감 없이 담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니 '투항'이란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게도 됩니다. 형님이 대표하는 합리적 보수 세력에게 MB 정부가 투항하는 건 아닐까 하고. 2년 가까이 제멋대로 놀아 보니 그런 식으론 끝내 좋은 꼴 못 보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원만한 수습 방법을 찾아달라고 합리주의자들에게 매달리는 건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렇게도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아요. 현 집권 세력의 문제는 도덕성의 결핍보다도 상황 판단 능력의 결함이 더 심각한 것 아닙니까? '삽질'이라고들 흔히 말하죠. 신자유주의와 공안 통치 노선의 모순과 한계를 지금 단계에서 자각할 것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뭡니까, 형님? 뭘 믿고 범의 굴에 뛰어드시는 겁니까? YS야 모든 것 버려서라도 대통령 꿈 이룬 걸로 만족했지만, 형님은 인격을 희생시켜서까지 이뤄야겠다는 꿈 같은 것 안 가진 분이잖아요?

거래 상대를 압박할 무슨 자신 있는 카드라도 쥐고 계신 거예요? 얼른 떠오르는 건 파탄에 대한 부담입니다. 형님 붙잡은 걸로 MB가 점수 많이 땄다고들 얘기하는데, 관계가 파탄날 경우 따놓았던 점수보다 몇 배를 까먹게 되겠죠. 다수 국민이 수긍할 만한 선에서 형님의 기준을 지켜 나간다면 꼭지가 아주 돌아버리지 않는 한 그 기준을 함부로 묵살하지 못할 이유가 그쪽에 있을 겁니다.

이번에 총리 물망에 오른 이들을 봐도 별 부담 없이 쓰다가 별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1회용' 총리감들이 있죠. 그런데 형님처럼 약점 없는 인물을 쓰면 본인이 일할 만큼 하고 만족해서 물러나기 전에 저쪽에서 불편하다고 멋대로 치워버리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그런 강점을 가진 이상 '실세' 총리니 뭐니 형식적 보장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죠. 원래 실세니까.

'4대강'이나 '행정복합도시'를 놓고 형님이 소신을 굽혔다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형님이 타협적인 표현을 쓴 것이야말로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웅크린 자세라고 저는 짐작합니다. 원론적으로 배척하기보다 기술적, 실제적 기준에 따라 시행을 통제하는 편이 더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죠. 뭐니뭐니 해도 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권한으로 선택한 정책인데, 정치 차원보다 행정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더 적절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형님의 사람됨과 이번 결정을 양립시킬 수 있는 관점으로 제딴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이 정도입니다. 아주 석연치는 못해요. 큰 긴장과 압박을 지속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길인데, 형님처럼 건강한 생활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 이런 길을 왜 택해야 하는지. 이 사회가 더 망가져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걱정이 드신 건가요?

절박한 걱정을 하면 사명감을 느끼게 되죠. 사명감을 느끼면 겸손한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사람을 아무리 잘 속이는 사람이라도 현명한 형님을 속이기 힘들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형님께 "절대 속지 마세요!" 말씀드리는 것은 형님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절박한 생각을 하고 험한 길로 나서시는 것인지.

마음 편하게 잡수세요. 너무 절박한 생각 하지 마세요. 생활의 행복을 아끼세요. 타협에는 긴장이 따르죠. 긴장의 수위를 너무 높이지 마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파탄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보일 때, 놓치지 마세요. 그런 기회는 한 번 놓칠 때마다 기회 자체에 둔감해지는 겁니다. 어느 정도 이상 둔감해지면 길은커녕 내 위치조차 잃어버릴 수 있고요. 형님,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마세요. 형님의 여러 미덕 중에 가장 소중한 미덕이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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