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보편적 소득보장정책과 보편적 사회서비스 제공의 제도화 위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교육정책,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혁신적 산업정책을 결합하여 균형 잡히고 안정적인 복지의 확충과 더불어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동시에 달성해 왔던 바, 최근 20년 간의 경제성장률을 지표상으로 비교해 보더라도 기실 금융과 주택 거품에 의존하여 양극화 거품 성장을 해온 미국의 경제성장률에 결코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보편적 복지'는 국가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는 전제 아래 누진적 조세제도를 통해 확보한 국가재정으로 국가 구성원 모두에 대하여 육아, 의료, 교육, 고용, 노후보장, 주거 등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요구에 대해서는 평등하게 복지 공급을 보장하는 정책을 말한다. 보편적 복지는 상위계층으로부터의 조세 수입을 재원으로 선별된 하위의 일부 계층에 대해서만 최소한의 복지 급여를 보장하는 선별적(잔여적) 복지에 대응하는 개념이다.
종래, 이와 같은 보편적 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근로의욕을 저하시키고 국가의 과중한 재정부담으로 경제성장을 저해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지속될 수 없는 낭비적이고 낡은 정책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시장근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으로부터 주로 이와 같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는데,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비판 위에서 시장의 자유와 함께 국가 기능의 최소화를 추구해 온 것이다. 감세, 규제완화, 작은 정부, 큰 시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지난 30년 간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해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중반 본격 상륙하여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부터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의 양극화 성장체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국가가 사회보장제도로 확립된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노동시장에 개입하여 맞춤형 교육훈련 등을 통해 노동의 기능적 유연성을 높이고, 적극적인 직업소개와 알선, 산업구조의 재조정 등으로 완전고용을 추구하며(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자본과 상품시장에 있어서도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통해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체제의 유지를 보장하는 한편, 복지 지출에 의한 분배의 평등을 실현하여 사회 전반의 구매력을 제고하고, 고용을 촉진함으로써 보편적 복지의 실현과 함께 사회와 경제의 발전을 동시에 달성하고자 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론을 우리 사회의 발전 대안으로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영국의 산업혁명 후 아담스미스 등에 의하여 주창되었던 구자유주의(자유방임주의)의 20세기 판이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최소한의 선별적 복지를 제도적으로 허용한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선별적 복지마저도 낯설었던 구자유주의와 구별된다. 그 밖에, 구자유주의는 산업자본이 주도세력이었다면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이 주도세력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그 핵심사상은 시장근본주의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국제적인 금융 및 상품의 이동과 거래의 완전한 자유화, 노동시장의 완전한 자유화에 따른 수량적 유연성 확보), 국가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작은 정부, 균형예산, 규제완화, 국공영기업의 민영화, 중앙은행의 독립, 복지 축소)을 통해 최고의 효율과 경제 발전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과실은 적하효과(滴下效果, trickle-down effect)에 의해 저소득층에도 파급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제와 결과를 사회 구성원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시키고,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결과로 인해, 필연적으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로 나뉘는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러한 양극화는 일자리와 소득의 양극화로부터 시작되어 보육, 교육, 건강, 주거, 문화 등 모든 영역의 양극화로 확대되고 또 심화되어 간다. 또한, 이러한 양극화는 국민경제 내부에 있어서는 개별 경제주체들 간의 양극화를, 세계경제 체제에 있어서는 국가들 간의 양극화, 국가별 국민 상호 간의 양극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체제 아래서는 불가피하며, 필연적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집권과 동시에 신중한 이론적 검토나 성찰, 또는 어떤 대책도 없이 세계화를 외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함께 자본시장을 개방하였고, 그것이 1997년 외환 유동성 위기를 불러 온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를 기화로 금융 지원의 조건으로 온전히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한국에 강요하였고, 한국은 이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소위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금융, 자본, 노동)으로 우리나라의 자본시장은 외국 투기자본의 천국이 되었고, 국제적인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결합은 고용과 분배 없는 성장, 극단적인 경제사회적 양극화를 불러왔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사회안전망 역할을 수행하는 보편적 복지제도의 결핍 때문에 이러한 사회양극화를 저지하거나 완화할 장치가 크게 부족하다. 그 결과, 양극화의 진행 속도와 깊이는 이미 미국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양극화의 심화는, 첫째로 상위 20%의 부자와 하위 80%의 빈자로 구성된 소위 20:80의 사회, 더 나아가 10:90의 사회를 조성함으로써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성장잠재력을 잠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금융자본의 산업지배는 본질적으로 이전소득인 주식투자 등으로 인한 자본소득과 금융소득을 증가시키는 한편,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노동시장의 수량적 유연성 증가로 비정규직이 양산되면서 근로소득의 가파른 감소와 함께 구매력의 전반적 하락을 가져온다.
둘째로 이것은 결국 절대적, 상대적 빈곤층을 양산하고 민생의 불안을 야기한다. 대다수의 국민은 육아, 교육, 건강, 고용, 노후보장, 주거 등 기초적 생활수요 부문 전반에 걸쳐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으로 내몰리게 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를 민생의 5대 불안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민생 불안의 지속은 중산층의 하강 분해 추세와 결합하여 '개인적 차원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불안은 지속'된다는 패배감 또는 무기력과 함께, 정치적 무관심과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절망의 사회를 불러오는 토양을 만든다.
셋째로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에서는 수출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내수는 감소하여 수출경제와 내수경제가 분리됨으로써 '고용 없는 성장', 만성적 고용불안, 나아가 장기적인 불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위 적하효과도 극히 미미하게 만든다.
구자유주의가 세계 공황으로 막을 내렸듯이 신자유주의 역시 지속될 수 없다.
첫째, 양극화의 극단적인 빈부격차로 사회불안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둘째, 대기업, 자본가, 자산소득자 등 강자의 번영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 노동자의 몰락은 구매력 감소와 성장잠재력의 잠식을 가져오며, 이는 만성적 경기침체와 투자 감소, 생산 위축의 악순환을 낳기 때문이다.
셋째, 신자유주의의 치명적 시장실패 때문이다. 이미 미국 발 금융위기에서 금융체계의 심각한 시장실패는 충분히 입증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로 지켜온 시장 불개입 원칙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 나선 것이다. 이는 결국 신자유주의는 그 자체로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공원 풍경. 적정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달성한 북유럽 모델은 흔히 한국에서 적용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면, 대체로 설득력이 약하다. 한국에서도 역동적 복지국가를 이룰 가능성은 충분하다. ⓒ프레시안 |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체제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을 주목하는 것이며,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그 동안 역사적으로 축적해 온 보편적 복지국가의 경험과 정책들을 모델로 하여 한국적 특성을 가미한, 우리나라의 실정에 잘 맞는 역동적 복지국가를 우리나라가 당장 취해야 할 대안적 국가발전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역동적 복지국가의 중요한 이념 또는 정책적 지표는 다음과 같다.
1) 보육, 교육, 의료, 고용, 노후보장, 주거 등 개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 수요는 국가가 평등하게 보장한다.
2) 이와 같은 기본적 수요의 평등한 보장을 통해 인간의 존엄, 사회적 연대, 사회정의의 실현 등의 민주주의 정부가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를 실현한다.
3) 또한, 이와 같은 기본적 수요의 평등한 보장을 통해 기회 및 조건의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한다.
4) 기회와 조건의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건전하고 합리적인 경쟁을 유도하고 촉진하여 개인의 발전과 함께 국가와 사회의 번영을 동시에 추구한다.
신자유주의를 넘어 역동적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하는 현 시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의 교조적 정책들인 부자감세와 규제완화를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세계적 추세와는 정반대다.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부동산과 토건으로 경제의 거품을 일으키고, 중도실용으로 서민정책을 흉내 내는 것으로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양극화 문제를 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모순과 민생 고통의 폭발을 시간적으로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을 노동자, 농민, 서민 대중에게 고발하고 역동적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국민이 충분히 알고 선택하게 해야 한다. 이는 우리 시민사회와 범 진보개혁 정치세력이 담당해야 할 정치사회적 역할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를 숭배하는 이 땅의 보수세력 뿐만 아니라, 일부 진보개혁 성향의 인사들조차 북유럽 식의 보편적 복지국가를 우리나라에서 실현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다는 점과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고 진보정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다는 점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논리다.
한 나라의 경제사회제도나 운영원리를 선택하는 데 인구수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미국을 우리 경제사회의 발전 모델로 삼는 우리나라 주류의 논리도 엉터리인 셈이 된다. 이러한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
또,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노조 조직율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결과이지 전제조건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힘이 부족한 부분은 우리나라에 비교적 잘 뿌리내린 시민사회의 조직적 힘과 진보 개혁적 지식인들의 협력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단지, 선험적으로 할 수 없다거나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북유럽 국가들이 달성하였던 복지국가의 꿈을 우리가 미리 접어버렸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이러한 패배주의와 소극적 태도가 버리지 않는 한, 우리나라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에 공통의 뿌리를 둔 보수주의 정치세력과 보수적 자유주의 정치세력 간의 대립구도를 한 동안 지속시키게 될 것이다. 범 진보개혁 진영의 모든 구성원들이 먼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실현 가능성을 믿고, 이를 정치세력화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양극화 사회에서 만성적 불안에 시달리는 80%의 국민들이 역동적 복지국가 정치세력의 궁극적인 지지자가 될 것이다. 노동자, 서민 등 모든 국민에게 민생의 희망을 주는 일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 시기에 역동적 복지국가를 위한 정치연합 또는 복지동맹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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