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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냉전시대 온 듯…꿈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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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냉전시대 온 듯…꿈만 같습니다"

[퇴임 후의 DJ] 한반도 평화 '버팀목' 잃어

영욕의 정치인생을 대통령 퇴임과 함께 마감한 '자연인 김대중'의 시선은 '한반도 평화'에 고정돼 있었다.

퇴임사를 통해 "우리는 북한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협력하다가 서로 안심할 수 있을 때에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길로 가야할 것이며, 이것만이 민족의 비극을 종식시키고 통일조국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고 밝혔던 김 전 대통령은 후임인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내내 남북관계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남북관계가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답보를 거듭할 때마다 대북특사 '0순위'로 김 전 대통령이 거론되곤 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실제 두 차례 추진했던 방북이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지방선거 등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각종 강연이나 연설, 국내외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평화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무게 중심을 잡아 왔다.

2006년 10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남북관계와 '햇볕정책'이 최대 위기에 봉착했던 순간에도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햇볕정책 실패론'이 제기되고, 일각에선 군사적 충돌 우려까지 거론되는 등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김 전 대통령이 정치권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론에 선을 그으면서 들끓던 국내여론을 진정시켰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잘못하면 무력 분쟁이 일어나고, 무력 분쟁은 전쟁을 부른다. 정부는 PSI참여에 신중한 대응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남북이 2차 정상회담 개최에 가까스로 합의하자 누구보다 기뻐했던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비록 늙고 힘없는 몸이지만"…평화를 향한 끝없는 열정

▲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중도실용'을 내 세우며 당선된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간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았던 진전된 남북관계를 '대북 퍼주기 프레임'으로 덧칠했다.

"햇볕정책이 본격 시작된 1998년부터 지난 10년 동안 북한에 지원됐던 금액을 어림잡아 추산하면 40억 달러 정도, 비공식적인 지원까지 합치면 50억 달러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북한이 핵이나 미사일 개발에 쓴 돈이 26억 달러 정도, 이번에 로켓발사에 든 비용은 3억 달러 전후라고 한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발사를 강행한 지난 4월 청와대의 한 핵심관계자의 발언이다. 햇볕정책 이후 한국 정부의 대북지원 사업이 결국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군사적 도발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남북 간의 공식·비공식 대화채널은 모두 닫혀 버렸다. 이명박 정부는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선(先)핵포기, 후(後)대화' 노선을 천명했다. 주변국들의 소극적인 자세로 사실상 무산되긴 했지만, 최근에는 북한을 배제한 '5자회담 개최론'의 진앙지도 한국 정부였다. "자칫하면 전쟁을 부른다"며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지만, 정부는 PSI에도 끝내 참여 확대를 선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필생의 과업'이었던 햇볕정책이 전면 무산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과도한 비판은 자제하면서도 현 정부를 '어르고 달래는' 모양새를 연출하면서 어떻게든 남북관계가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만은 막아보고자 했다. 다음의 발언들은 이명박 정부 이후 경색 일변도를 치닫는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김 전 대통령의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이명박 정부가 의도적으로 남북관계를 파탄내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2008년 11월,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

"비록 늙고 힘없는 몸이지만 오늘의 위기만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원한다면 함께 무릎을 맞대고 남북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2008년 12월, 노벨평화상 8주년 기념 강연)

"오바마 정권이 출범한 이후 북미관계가 급진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지금과 같이 남북대립의 상태 속에 있다면 우리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소외만 당할 것입니다." (2009년 1월, 서울외신기자클럽 오찬 간담회)

'용산참사'의 충격, 그리고 '3대 위기론'

이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정제된 언어로 현 정부에 대한 조언을 계속해 왔다. 지난해 '촛불국면'에서도 "우리 국민은 위대하다"는 원론적 입장표명 외에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다.

끝까지 묵직한 원로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이었지만, 철거민 5명을 포함해 6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 이후부터는 인식의 변화를 내보였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안에 위험물질이 있는 것을 알면서, 높은 데서 뛰어내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도 설치 안하고 그렇게 성급히 쳐들어갈 수 있느냐"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당하니 참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현 정국을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론'으로 개념화했다.

자신의 삶이 통째로 부정돼 가는 현실에 대한 서글픔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이 뚜렷해진 '퇴행'의 징후 앞에서 다시 '민주투사 김대중'의 고단했던 삶을 떠올리고 망연자실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문제 등 3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얻었어도 그걸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만 유지가 가능합니다. 내가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갔을 때 독재자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보면서 안타깝고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盧 전 대통령의 서거…"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심정"

이같은 상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서거는 김 전 대통령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북특검과 '3김 청산론' 등 갈등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북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노 전 대통령은 철저한 '햇볕정책'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앞에서 김 전 대통령이 느꼈을 상실의 깊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다"면서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것 같은 심정"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추도사마저 무산시켰다. 현 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난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유족들의 손을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습은 국민들의 뇌리 속에 뚜렷하게 각인됐다.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다. 그 뜻을 받들어 우리가 반드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세워 나가고 고통 받는 서민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남북 간 화해 협력을 되살려 국민들이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건강문제가 갑자기 악화된 데에도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결정적이었다는 게 동교동 측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여러 가지로 심적 피로를 느껴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심적으로 상당히 안 좋았다"고 했다.

"피맺힌 심정으로 당부드린다…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현 정권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조언' 수준에 머물렀던 각종 현안에 대한 언급에도 날이 서기 시작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해 지난 6월11일 가진 특별강연에서 김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독재자'에 빗댔다.

"마음 속의 피맺힌 심정으로 당부 드린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는 호소까지 나왔다. '행동하는 양심'은 지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고인이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했다.

청와대는 당장 역공을 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례적으로 실명을 걸고 "국민화합에 앞장서 국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셔야 할 전직 국가원수가 적절치 못한 발언으로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당으로부터는 "김 전 대통령은 아프리가 후진국의 반군 지도자냐(장광근 사무총장)"는 비아냥도 나왔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김대중 씨는 침묵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을 도와주는 길"이라고 했었다.

"지금은 제2의 냉전시대…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나, 꿈만 같다"

결국 원로 정치인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충정어린 조언과 준엄한 일갈에도 현 정부의 정책기조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7월10일 영국 BBC와 가진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같은 현실의 벽 앞에서 느꼈을 절망의 단면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내가 2000년 평양을 간 후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화해 협력적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남북 관계가 불행한 방향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해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사태가 급변하여 지금은 제2의 냉전시대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슬픕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로부터 불과 사흘 뒤 감기와 미열 증세로 병원을 찾은 김 전 대통령에게는 폐렴 진단이 내려졌고, 그는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한 채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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