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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일·술 세대'는 늘 '공장 탈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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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잠·일·술 세대'는 늘 '공장 탈출'을 꿈꾼다"

[화제의 책]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

"혁신? 개나 줘 버려!"

올해 초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뒤 민주노총의 혁신을 위한 자체 토론회 내용을 듣고 한 조합원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의 희망"이 되고자 했던 민주노총에 대한 이런 불신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적 집단"이라는 보수 세력의 공격도 있지만,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스스로도 민주노총이 '내 편'이라고 잘 믿지 않는다. 체감 경제는 나아질 줄 모르고,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이 850만이라는데도 민주노총이 내는 목소리의 사회적 울림이 희미해진 지 오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문제일까? 2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뛰어다닌 조건준 민주노총 금속노조 정책국장이 쓴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매일노동뉴스 펴냄)는 그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자 분석이다.

"실천가라고 하기엔 멋쩍은 노조의 상급조직에 앉아 있는 몸이고 이론가로 불릴 만큼 체계적인 공부는 하지 못했다"는 필자는 민주노총이라는 '거대한 조직'보다는, 그 안의 사람들의 삶의 변화와 우리가 처한 사회 구조를 통해 오늘 노동운동의 위기를 설명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단순한 '민주노총 간부가 쓴 민주노총 비판서'가 아니다. "88만 원 세대"인 자식을 두고 "공장에 묶여 죽도록 일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으로 보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자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잠일술 인생'을 보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공장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희망서다.

"'현금인출기'인 나? 가족 중 가장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아빠다"

▲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조건준 지음, 매일노동뉴스 펴냄)ⓒ프레시안
"나중에 좋은 날이 오면 즐겁게 살겠지 그랬는데 그날이 오지 않네요. 항상 부족하고 힘들고 살아가는 게 너무 재미없어요. 매일 특근에 잔업, 야간근무 이렇게 살다 보니 언제 봄이 오는지 언제 여름이 가는지 몰라요." (현대자동차 소재공장 단조부 노동자)


조건준은 이런 인생을 '현금인출기 인생'이라고 했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대기업의 노동자가 "24시간 중 10시간 이상을 일한다." 쉬는 시간과 출퇴근을 합치면 12시간이고, 나머지 12시간 가운데 6~8시간을 잔다면 남는 시간은 기껏 4~6시간이다. 당연히 "가족과 유대감을 높일 여유가 없다."

"인생의 반려자는커녕 단순한 '현금인출기'에 불과하다고 토로한다. 가장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남편이고, 가장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이 아빠인 세상이다. 노동자들이 인간관계마저 착취당한다고 하면 과도한 것일까?"

지난 외환위기 이후에는 더 심해졌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는 '한가족'이라면서 온갖 난리를 치다가 어려워지니까 '짐'이라며 버려지는" 모습을 봤다. "절망 못지않은 배신감과 분노"는 언제든 나도 하루아침에 잘릴 수 있다는 일상적인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새로운 창"으로 남았다.

"IMF가 남긴 5가지 새로운 프레임…왜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미워할까?"

조건준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 마음에 남은 새로운 창, 즉 새로운 프레임을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 째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고용 불안증'. 노조로 뭉치게 하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늘 "대안 없이 위기를 강조"한 노동조합이 오히려 "고용만 보장되면 뭐든 한다"는 조합원의 인생관에 한 몫하기도 했다.

절대 잘려선 안 된다는 이 불안감은 오히려 공장을 "삶의 벼랑에서 구해 주는 '천국'"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고용불안에 대한 유일한 보험"인 공장에 매달리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는 스스로 "노동해방" 대신 "노동속박"을 선택했다. 이 현상을 필자를 '공장감옥'이라는 두 번째 프레임으로 설명했다.

또 다른 프레임은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와 '일부만 일어서기'다. 한 명이라도 일어서면 모두가 따라 일어서 경기를 구경하게 되는 속성을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쏠리는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문제는 모두 일어서는데도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바로 양극화와 빈부격차다.

이 네 가지의 종합판이 마지막 프레임,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이다. 비정규직이 사용자보다 정규직을 더 미워하는 이유다.

"11등을 하는 사람에게는 1등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앞에 있는 10등이다. 비정규직을 만든 자본은 비정규직에게는 먼 1등의 위치에 있다. 비교 대상은 매일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정규직이다."

정규직도 비정규직을 고용 불안의 "방패"로 활용한다. "'고용 게임의 링' 위에서 노동자는 서로 경쟁자가 되"는 것이다. 조건준은 이런 현상에 대해 "가장 치졸하고도 악랄한 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서로 뺨 때리기'를 닮았다"고 말했다.

"현금인출기 인생 조합원을 따라 노조도 '자판기 노조'가 되었다"

▲조합원이 '돈을 버는 역할'에 머물고 있는 '현금인출기 인생'이니, "노조 또한 '자판기 노조'가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조합원이 '돈을 버는 역할'에 머물고 있는 '현금인출기 인생'이니, "노조 또한 '자판기 노조'가 될 수밖에 없다." "나에게 공장은 노동조합"인 필자가 보기에도 최근의 노조의 역할이란 "해마다 반복되는 임금협상에서 노조 집행부가 알아서 임금도 올리고 성과금도 따내는 자판기"가 되고 있다.

더 얻어내는 일이 최우선 목표가 되니, 당연히 나누는 일에 인색하다. 다른 공장의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 뿐 아니라 같은 공장 내의 비정규직과 나누는 것도 힘겨워한다.

그리고 때로 이런 행동은 "엉뚱한 주장"으로 뒷받침되기도 한다. 노동조합 내의 이른바 "강경한 노선"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펴는 이 주장은 '자본가에게 뺏어서 비정규직을 줘야지, 정규직의 것을 비정규직에게 주는 것은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옳지만 또 틀렸다는 입장이다.

"자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만, 그것이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심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최대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도 비정규직을 잘라내는 데 동의한다.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최근 경제위기를 지나면서 금속노조가 '일자리 나누기' 선언을 하려다 거센 반발에 포기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양보 교섭은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수많은 현장에서 그 원칙은 무너지고 깨지고 있다"며 "명분과 실리 중에서 아무 것도 챙긴 것이 없다"고 펴가했다.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투쟁을 하자고 해도 대공장 정규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비정규직 기금을 모으자고 제안하면, 이번에는 시혜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비정규직과 연대투쟁도 못하고 물질적 지원도 못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간부가 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민주노총 이야기

필자는 "지금 민주노총은 교섭도 투쟁도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금지된 무능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민주노총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구심이 아니며, 정부나 자본이 두려워하는 적대자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뻥 파업'으로 조롱받아 왔으며 급기야 '말 펀치'도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 아무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결사투쟁을 외치고 있으니 의도가 선량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거짓이고 위선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상투적인 주장을 내세우니까 노동운동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

파업만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노사정 교섭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는 평가" 아래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도 쉽게 나서지 못한다. 하지만 필자는 "매번 교섭 없이 투쟁만 하는 것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설득과 명분을 확보하는 정치적 과정이 없다면 투쟁은 알몸뚱이로 버티기에 불과하다. 장렬한 투쟁은커녕 비참한 투쟁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 무의미한 총파업의 반복이 법안을 좌지우지할 수준이 아님을 인정하고 저항의 진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다."

"'고용 안정'만이 아니라 '안정성과 유연성의 결합을'"

"'배부른 대공장 노조'와 같은 낡아 버린 상징을 대신할 새로운 상징"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불행히도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다만 책 곳곳에서 필자는 다양한 대안을 얘기하고 있다.

단지 노조가 '고용 안정'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자르지 않는' 안정성을 높이면서 '나누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했다. 일명 '유연안정성(flexicurity)'를 전략적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동시에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공장감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별임금의 인상', '기업복지의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힘'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한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가야 한다."

사실 "배가 난파될 것이니 잠시 섬에 내려놓자"며 해고의 불가피함을 역설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는 해고되면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섬에 내려놓는 것"이기에 노동자의 저항은 격렬하다. '잠일술 세대'의 '공장 탈출'은 "현금인출기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시도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를 어떤 섬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의 시작이다.

이들의 탈출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까?

▲ '잠일술 세대'의 '공장 탈출'은 "현금인출기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시도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를 어떤 섬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의 시작이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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