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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들이 '무식하다' 쫓아낸 日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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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들이 '무식하다' 쫓아낸 日 의대 교수"

[의학사 산책] 관립의학교와 광제원

의학교 설치의 건의

1894년 9월말 제중원에서 손을 뗀 조선 정부는 1896년 내부 소관으로 의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몇 차례 의학교 설치에 관한 건의가 있었으나 역시 예산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던 중 1898년 11월 7일 지석영이 제출한 청원서를 계기로 의학교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의학교를 서울에 개설하고 일본 의사를 강사로 초빙해 학생을 교육시킨 후, 졸업생을 각 도에 파견해 그곳에 의학교를 설립, 의학 교육을 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이 그 학교의 책임을 맡겠다'고 밝혔다.

▲ 지석영과 의학교 설립 청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학부 직할의 의학교

이 청원은 받아 들여져 1899년 의학교 설립 예산이 책정되었다. 의학교는 학부 직할로 함으로써 외부 소속의 제중원의학교와 달랐다. 의학교는 경성 중부 관인방 훈동에 있었던 김홍집의 옛 저택을 사용하였다.

또 공립의원 규칙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의학교 관제를 1899년 3월 24일 반포했다. 이 관제를 보면, 학교장과 3인 이하의 교관을 두도록 했고 필요에 따라 외국인 교관을 고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관제에 따라 3월 28일 의사는 아니지만 의학에 밝고 의술에 정통한 지석영이 교장 주임관 2등에 임명되었고, 3월 29일 군주사 출신으로 법률에 밝은 경태협, 남순희가 교관으로, 유홍이 서기로 임명되었다.

지석영을 포함한 이들 모두는 서양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우두법을 보급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지석영은 자신의 말처럼 의학에 특별한 취미가 있어 동양과 서양의 의학을 모두 조금씩 공부했다. 그러나 서양 의학을 가르칠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같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외국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 1899년 의학교 관제.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인이 나선 의학 교육

결국 일본 공사의 추천에 따라 여러 해 동안 일본 공사관의 의사로 근무했고 종두의양성소를 운영한 후루시로(古城梅溪)가 다소의 논란 끝에 교사로 임명되었다.

후루시로는 조선 정부와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고용된 외국인 의사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조선 정부의 실질적인 통제권이 없었던 제중원 의사들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후루시로와 <황성신문> 찬화병원 광고. ⓒ동은의학박물관

3년 과정의 의학교

1899년 7월 5일 발표된 <의학교 규칙>을 보면, 학생들의 수업 연한은 3년으로 해 속성으로 의사를 길러내도록 했다. 또 국가는 의학생들에게 지필묵과 교과서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교수 과목은 동물, 식물, 화학, 물리 등의 기초 학문과, 해부, 생리, 약물, 위생 등의 기초 의학, 그리고 진단, 내과, 외과, 안과, 부영(婦嬰), 법의 등이 있었다. 이외에 종두와 체조가 있었으며, 필요에 따라 한두 과목을 변경시키기로 하였다. 수업 시간은 체조 시간을 제외하고 매일 5시간이었다.

일본인 교사의 교체

7월 14일자 관보에 의학생 모집 광고가 실렸고, 1899년 8월 16일 국문, 한문, 작문, 산술로 입학시험을 치러서 9월 4일 약 50명이 입학하였다.

그러나 교사 후루시로는 골학 강의 도중 뼈의 요철, 좌우, 안팎을 구별하지 못하여 학생들의 비난을 받았고 결국 1900년 고다케(小竹武次)로 교체되었다. 의학교는 교사가 일본인이었던 관계로 주로 일본어 교과서를 사용하였으며, 한국어로 번역한 교과서도 있었다.

이후 의학교는 한국인 교관의 잦은 교체, 교재의 부족, 재정난, 학생들의 이탈 등 여러 면에서 운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의학 교육을 받은 김익남이 1900년 8월 합류한 것은 큰 힘이 되었다.

▲ <황성신문>에 실린 후루시로 사건. ⓒ동은의학박물관

면허를 받지 못한 의학교 졸업생

1902년에 3년 과정의 의학교는 첫 졸업생의 배출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의학교에서 이루어진 교육의 문제점은 의학을 실습에 의하지 않고 책을 통해서만 배웠다는 데 있었다. 부속병원이 없어 실제 임상 실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02년 5월 14일 졸업시험을 치렀지만, 실습할 부속병원이 완성될 때까지 졸업할 수가 없었다. 의학교의 부속병원은 1902년 8월 11일 개원하여 고다케가 책임을 맡았고 학생들은 약 4개월 동안 약간의 임상실습을 마친 후 1903년 1월 9일 19명이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들은 의학교를 졸업했으나 의술개업인허장은 받지 못했다. 이후 두 번의 졸업생을 더 배출하여 총 36명이 졸업한 이후 의학교는 폐교되었다.

▲ 1899년의 의학교 입학시험 공고(관보). ⓒ동은의학박물관

한방병원인 내부병원(광제원)

한편, 의학교 관제가 발표된 직후인 1899년 4월 4일 내부대신은 활인서를 부활시킨다는 의미로 한의술을 시료하는 병원관제에 관한 청의서를 제출했고, 4월 24일 내부 소관의 병원 관제가 반포되었다.

외국 의사의 힘을 빌려 운영한 제중원은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결국 실패한 결과가 되었으므로 새로 설치할 병원은 외국 의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운영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학교는 설치했지만 그런 서양 의술을 시술하는 의학교 부속병원보다 한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건립이 더 절실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이 병원의 명칭은 단순히 병원이었으나 내부 소속이었으므로 흔히 '내부병원'이라 부른다.

병원의 설립 목적은 일반 환자 진료 이외에, 감옥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구료와 전염병 환자의 피병원 역할, 심지어 가축의 질병 검사까지 광범위했다. 병원장은 위생국장이 겸임하도록 하였고, 따라서 4월 26일 초대 병원장 겸 기사로 위생국장 최훈주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4월 27일자로 의사, 약제사 및 서기들이 임명되었다.

이중 의사는 모두 한의사로 대부분 전의를 겸직하였다. 내부병원의 구상 단계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한 외국인 의사 1명을 두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적인 활용도 어렵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았다. 한의사의 구성을 보면 15명 중 종두의가 10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내부병원의 역할 중 종두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6월 30일 정부는 칙령 제24호로 <병원관제 개정>을 반포하면서 '병(病)'자를 '보시(普施)'로 개정했는데, 개부표하여 다시 '광제(廣濟)'로 하였다. 따라서 개명된 이름은 광제원(廣濟院)이었다. 이 개정에 따라 병원 명칭 변경과 함께 종두에 관한 업무가 새로 설치된 한성부 종두사로 이관되었기에 10명의 종두의가 없어지고 대방의와 외과의를 각각 1명 씩 증원하여 전체적으로는 대방의 3명, 외과의 3명, 소아의 1명 및 침의 1명 등 7명이었으며, 1명의 약제사가 있었다.

경무국 고문관 마루야마의 등장

러일전쟁 후 고문 정치의 일환으로 내부 경무국 고문관으로 내한한 마루야마가 1905년 1월 20일 서울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광제원을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경무국 소속으로 옮긴 일이었다. 이어서 마루야마는 1906년 2월 중순 내부대신에게 광제원 위생과 사무를 쇄신 확장하기 위해 일본 의사를 고빙할 것을 권고하였고, 결국 일본 의사 사사키(佐佐木四方志)가 광제원 의사로 고빙되었다.

통감부, 광제원을 양방병원으로 바꾸다

1906년 4월 9일 통감부에서 열린 '제3차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이토의 새 병원 건설 구상에 따라 광제원을 적십자병원에 합병시키고, 곧 광제원을 폐지하기로 하였다.

폐지키로 결정된 광제원은 5월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전의 한약소, 양약소, 종두소의 3소(所) 체제를 없애는 대신 내과,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및 부인과를 설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일본 의사들이 광제원에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1906년 2월 사사키, 5월 우치다 등을 시작으로 일본인 의사가 몇 개월 내에 자리를 잡게 되고, 한의사는 여러 명목으로 축출되었는데, 이후 1907년 3월 15일 대한의원에 통합될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감부에 의한 이러한 개편 작업은 "한국 의술의 발달"이라는 논리에 입각해서 진행되어 전반적으로 병원이 확대되었고 일본인 의사에 의해 진료가 분과되었으나, 결국에는 일본인 환자의 증가 및 식민 통치자를 치료할 수 있는 통감부의 공식 기관 확보로 귀결되었다.

▲ 마루야마에 의해 광제원에서 근무하게 된 사사키와 타다켄고로. ⓒ동은의학박물관

[자료]

칙령 제7호 의학교 관제

제1조 의학교는 국민에게 내외 각종 의술을 전문으로 교수하는 곳으로 정한다.
제2조 의학교의 수업 연한은 3년으로 정한다.
제3조 의학교는 학부의 직할이며 경비는 국고로 지원한다.
제4조 의학교의 학과와 정도(程度)와 기타 규칙은 학부대신이 정한다.
제5조 의학교에는 다음과 같은 직원을 둔다. (학교장 1인 주임, 교관 3인 이하 주임 혹은 판임, 서기 1인 판임)
제6조 학교장은 의학에 숙련된 자를 임명하여 일체 교무를 맡아 관리하게 하고 소속 직원과 학도를 감독한다.
제7조 교관은 학도의 교수를 담당하고 학도를 감독한다.
제8조 서기는 상관의 명(命)을 받아 서무 회계에 종사한다.
제9조 경우에 따라 학교장을 학부 주임관이 겸임도 하고 교관을 학교장이 겸임할 수도 있다.
제10조 교관은 혹 외국인을 고용하여 충원하는 것도 가능하나 그 수는 학부대신이 필요에 따라 정한다.
제11조 교관을 외국인으로 충원할 때에는 교수만 한다.
제12조 지방의 사정에 따라 의학교를 지방에도 설치할 수 있다.
제13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광무 3년 3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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