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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젊음이 안타깝다면, 이 책을 읽자"

[화제의 책] <어린왕자의 귀환-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부시 당나귀'를 기억하시나요?"

<십자군 이야기>를 읽은 이들이라면, 이런 질문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게 된다. 이들에게 즐거운 소식이 있다. <십자군 이야기>에서 이라크 전쟁을 벌인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풍자했던 만화가 김태권이 새 책을 냈다. <어린왕자의 귀환-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겨냥한 내용이다.

대학을 붕괴시킨 신자유주의…"젊은 날이 끝났다"

▲ ⓒ프레시안
'진보 성향의 작가가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것은 당연한 일. 식상한 내용 아닐까.' 그렇지 않다. 1994년에 대학에 입학한 작가에게,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까마귀 떼처럼 엄습한 신자유주의가 낳은 변화는 너무 아팠다. 이 책에 담긴 만화 가운데 상당수는 외환위기 직후에 그려졌다. 당시 20대였던 작가가 겪은 번민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갔다. 우리 세대의 젊은 시절은 IMF와 함께 끝이 났다. '평생 고용'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무너지면서 직장인도 예비 직장인도 가혹한 경쟁에 내몰렸다. '88만 원 세대'의 대학 생활에서는 취직 준비 이외에는 모든 것이 사치가 돼 버렸다. 플라톤과 <자본론>을 한 팔에 안고 다니던 낭만적인 청년 시절은 사라졌다. 생활과 학습의 공동체로서의 대학 사회는 붕괴했다.

친구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친구는 비싼 연봉을 받고 어떤 친구는 헐값의 품삯을 받고 사회로 나갔는데, 한두 해만 지나면 모두 삶에 지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론의 영역에서는 하루에도 열 번씩 해소되던 저 자본주의가, 실제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막강했던 것이다. 몰랐냐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학창시절에는." (작가의 머리말)


20대 시절 그렸던 만화를 굳이 들추어낸 이유

신자유주의에 대한 작가의 첫 경험은 상처였다. 그래서 작가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작가는 30대가 됐고 결혼도 했다. 그런데 기억의 저편에 봉인돼 있던 장면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순간이 닥쳤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나의 20대는 기억의 저편에 봉인돼 있었다. 편집자님의 제안을 받고서야 나는 그때 그 만화들을 꺼내들 엄두가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만화를 펼쳐들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지금 상황과 꼭 들어맞을까?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더욱 잦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문제 그 자체는 더욱 심각해졌던 것이다.

오늘날 빈부 차는 더 커지고 일자리는 더 위태위태하며 FTA는 몰려오고 민영화는 몰아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숫자에 가려져 있다. GDP 몇%, 교역량 및 몇 위라는 알쏭달쏭한 암호의 그늘에 감춰진 이야기, 즉 철수는 재개발로 부자가 되지만 영희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리라는 이야기를 굳이 들추어내는 건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 지금 시점에 이 만화를 모아 책을 묶자던 편집자님의 말씀은 옳았다." (머리말)
▲ ⓒ프레시안
▲ ⓒ프레시안

자유경쟁과 민영화, 군사정권 시절 '반공' 표어와 같은 위세 누린다

▲ ⓒ프레시안
'좋았던 젊은 시절'을 끝장냈던, 그토록 아팠던 신자유주의가 이제 공기처럼 익숙해졌다. 일상이 됐으니, 아픔도 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늘 겪는 일이라서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잦아들었을 뿐이다.

사회 곳곳에서 상처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비명은 막혀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아는 이들이 있다.

그들 중 한명이 대통령이 됐다. 입에 발린 말로라도,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챙길 줄 모르는 이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신자유주의는 군사정권 시절 반공주의와 같은 위세를 누리게 됐다.

"공공 부문 민영화는 절대선이며, 자유무역은 모든 이들에게 이롭다"는 주장에 의심을 품으면 어느새 '반(反)기업', '반(反)시장'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런 꼬리표가 달리면, 변호사는 '돈 되는 사건'을 수임할 수 없고, 언론은 '광고'를 유치할 수 없으며, 학자는 대학에 남을 수 없다. 한마디로 밥줄이 끊긴다는 뜻. 신자유주의를 종교처럼 떠받드는 곳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러니 다들 두려워할 밖에.

변호사 개업 이후를 걱정하는 판·검사, 늘 경영불안에 시달리는 언론사 기자, 교수가 못 되면 평생 극빈층으로 지내야하는 연구자…. 내면 깊숙한 곳에 공포가 자리 잡은 이들은, 재벌과 신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장막을 치장하는 것으로 불안을 달랜다.
▲ ⓒ프레시안

"자유무역은 모두에게 이익?"…"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멀리서 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막이, 사실은 쉽게 찢어지는 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게 '지식의 힘'이다. 그리고 <어린왕자의 귀환>은 이런 지식을 담고 있다. 바로 정치경제학이다.

이 책 46페이지를 펼치면, 두 쌍의 따옴표에 묶인 글귀가 있다. "자유무역은 누구에게나 이득이 되는 거야",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자유무역의 허와 실'을 다룬 내용의 도입부다. 불과 13페이지 분량의 만화에, "자유무역은 모든 이들에게 이롭다"는 주장의 맹점이 잘 묘사돼 있다. 조금 부족하다 싶은 독자를 위해서는, 경제학자 우석훈의 글이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자유무역,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비교우위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은 한국이 왜 경쟁력 없는 농업을 계속 유지해야하느냐고 묻는다. 한국은 휴대폰을 잘 만드니까, 휴대폰을 팔아서 번 돈으로 더 싼 식량을 사서 먹는 게 이익이라는 주장이다. FTA 홍보물에서 흔히 접하는 내용이다. 얼핏 들으면 솔깃한 이런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 경제 자체가 비교우위론에 역행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전형적인 자유무역 논리에 따르면, 한국은 농업과 경공업에 주력했어야 했다. 그게 더 경쟁력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1950~60년대에는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신생국가 정부 각료들 사이에서 "선진국이 공산품을 만들고, 개발도상국이 농업에 주력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주장이 상식으로 통했다. 그러나 이런 상식에 맞춰 정책을 추진한 개발도상국 가운데 경제 성장에 성공한 곳은 하나도 없다. 산업화에 성공한 쪽은 한국처럼 상식에 어긋나는 노선을 택한 나라들이었다.
▲ ⓒ프레시안

▲ ⓒ프레시안

반쪽짜리 상식, 나머지 반쪽을 채우다

▲ ⓒ프레시안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비교우위가 없는 산업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다.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을 읽어내는 힘을 스스로 키워갈 기회가 드물었던 까닭에 교과서 속 이론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곤 했던 문화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제학 교과서에 실린 비교우위론이 거스르기 힘든 '상식'이라면, 이런 이론의 맹점을 지적하는 논리 역시 널리 통하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후자의 상식은 오랫동안 상식 취급을 받지 못했다. 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주장,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리쯤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상식은 그저 상식일 뿐이다. 상식이지만, 상식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상식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요령 있게 정리했다는 점이 <어린왕자의 귀환>가 가진 미덕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을 설명하면서 프랑스의 포도주인 보르도를 예로 들었다. 영국에서 만들기 힘든 보르도산 포도주를 영국이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면화를 더 만들어서 프랑스와 무역을 하는 것이 양쪽에 모두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만 믿고 포도주 생산을 포기하는 나라는 없다. 프랑스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해 포도 경작에 불리한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독일은 아이스바인(Eiswein, 아이스와인)이라는 고가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며 미국, 호주, 칠레, 심지어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포도주를 생산하면서 프랑스의 포도주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절대적 의미의 비교우위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줄어들고 세계화와 함께 국가라는 지역적·사회적 경계는 점점 완화되고 있다.

게다가 식량안보와 같이 비교우위 이론에 의해서 간단하게 포기하기 어려운 경제적 영역이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저가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서 사 먹으면 간단할 것 같지만 미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일본, 심지어는 스위스까지 주식 생산을 포기한 선진국은 없다. 국가가 장기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는 식량과 같은 필수 품목의 생산능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의 근간이 되는 비교우위 이론은 현대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는 가설인 셈이다." (2장 '여행을 떠나다'에 따린 우석훈의 글 가운데 일부)

어린왕자가 MB를 만난다면?

▲ ⓒ프레시안
신자유주의 앞에서 영혼이 녹슬어 가는 어린왕자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 어린왕자가 이명박 시대 한국에서 살아간다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게 이 책의 내용이다.

어린왕자가 살던 작은 별은, FTA를 계기로 골프장으로 바뀐다. 살던 별에서 쫓겨난 어린왕자는 '근로자의 별'과 'CEO의 별'을 찾아가지만 편안히 머물 곳을 얻지 못한다.

결국 어린왕자가 찾아간 곳은 '부유층의 별'. "이 신자유주의 우주에서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러니까 투자자란 말이지?"라고 중얼거리는 어린왕자 앞에서 부유한 투자자는 이렇게 말한다.

"FTA? 해고? 허허, 그런 건 처음 들어봐! 다만 난 수익성 높다는 곳에 묻지 않고 투자를 할 뿐이라고. 그런데 내가 당신까지 책임질 필요가 있을까?"

작은 별에서 장미를 키우고 싶었던 어린왕자를 받아줄 곳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젊은 시절이 끝장나버린, 한국의 어린왕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취업 경쟁으로 망가진 젊음이 안타까운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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