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하반기 서울시교육청은 영어 몰입 교육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 후, 강유선 고려대 영어교육학과 교수팀에게 정책 연구를 의뢰했습니다. 지난 2월 결과가 나왔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효과 없음'입니다. 7월로 접어든 지금에 와서야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그동안 연구 결과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구팀은 영어 몰입 교육의 일종인 '내용 언어 통합 학습(CLIL·크릴)'을 실시한 서울 광남초등학교, 용화여고 학생을 대상으로 효과를 검증했습니다. 미국의 한 주립대 사범대학에서 교사 교육을 받은 원어민이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한 뒤 그 결과를 따져 본 것입니다.
몰입 교육 받아도 영어 실력 늘지 않았다
영어몰입 교육에 대해 보통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예컨대, 영어로 사회 수업을 들으면 사회 성적은 떨어질지 모르나, 영어 실력 하나만큼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광남초등학교 4학년 322명은 원어민으로부터 한 학기 동안 영어 몰입 교육을 받았습니다. 연구팀이 살펴본 바로는 우리나라 교사보다 우수한 원어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영어 실력 하나만큼은 좋아졌을까요?
▲ 서울시교육청의 CLIL 연구 용역 보고서. ⓒ프레시안 |
하지만 성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집이 부자라서 성적이 좋을 수 있고, 머리가 똑똑해도 그럴 수 있고, 학교 교사가 잘 가르치거나, 열심히 노력하거나, 누군가 못살게 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점수가 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어떻게 해서 그런지가 더 중요합니다.
연구팀은 2점 오른 영어듣기 성적의 원인을 규명합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살펴봅니다. 밝혀진 건 영어 몰입 교육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원래부터 영어를 잘 구사하거나 이해한 학생일 경우 듣기 성적도 높지만, 몰입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성적이 좋아졌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연구팀은 "초등학생들의 경우 CLIL 교육 이후 영어 성취도가 그 이전보다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 영어 능력 향상이 CLIL의 영향이라고 결론 지을 수 없다"(연구보고서 74쪽)라고 언급합니다. 성적은 올랐지만, 영어 몰입 교육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용화여고 1~2학년 430명의 경우에는 아예 달라진 게 없습니다. 몰입 교육 받기 전과 후의 영어 어휘력 시험 점수를 비교해봤는데, 오르지도 않았고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몰입 교육을 받지 않은 다른 학생과의 차이도 없습니다. 영어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고등학생들의 경우에는 CLIL 수업 전후의 영어 성취도의 차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CLIL에 참여하지 않은 비교 집단 학생들에 비해서도 향상된 영어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 CLIL 참여 자체만으로 단시간 내에 영어 실력을 증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보여주었다."(74쪽)라고 결론내립니다.
영어로 사회 수업을 들으면 사회 성적은 어떻게 될까
영어 몰입 교육을 했는데, 영어 성적은 덕본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어로 사회 수업을 했을 경우, 사회 성적은 어떻게 될까요.
연구팀은 광남초 학생들의 퀴즈 점수를 살핍니다. 원어민 교사가 수학, 영어, 사회, 과학 등 4과목 수업 시간에 낸 퀴즈 점수를 봤는데, 여기에서 높게 나왔답니다. 하지만 몰입 교육 이전의 퀴즈 점수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몰입 교육을 받지 않은 다른 초등학생의 점수와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원어민 교사가 출제하고 채점한 것만 봅니다. 이건 연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광고하는 자동차 회사가 자기 회사의 예전 차량이나 다른 회사 자동차와 비교하지 않은 채 떠들어대는 것과 같습니다.
고등학생은 제대로 봅니다. 전국 모의고사 사회영역 점수를 살펴보니, 고2 177명은 전체적으로 변화가 없습니다. 고1 253명은 평균 2.04점 올랐습니다. 하지만 고1의 점수는 영어 몰입 교육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성적이 좋아졌다는 겁니다.
고2 학생들의 경우에는 재밌는 부분도 발견됩니다. CLIL에 대한 만족감 및 태도가 사회 성적과 반비례하는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영어로 사회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 과목과 영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고 느낄수록,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수록, 사회 성적이 올랐다고 보고합니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 학생들의 CLIL에 대한 태도가 교과목 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CLIL을 선호한 학생일수록 교과목 성취도는 낮아졌다"(75쪽)라고 언급합니다. 뒤이어 "CLIL의 한계를 넘기 위해 학생들이 다른 노력을 했다던가 하는 다른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제언을 해준다"고 덧붙입니다. 영어로 하는 사회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하면 사회 성적이 떨어지는데, 집에서 따로 공부하거나 하여 보충을 했다는 것이지요.
▲ "연구팀은 "초등학생들의 경우 CLIL 교육 이후 영어 성취도가 그 이전보다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 영어 능력 향상이 CLIL의 영향이라고 결론 지을 수 없다"(연구보고서 74쪽)라고 언급합니다. 성적은 올랐지만, 영어 몰입 교육 때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원어민교사에게 영어수업을 받고 있는 초등학생. ⓒ뉴시스(자료 사진) |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던 서울시교육청의 연구용역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보고서의 제목은 <내용 언어 통합 학습에 기반한 영어 교육의 적합성 및 효과성에 관한 연구>입니다. '내용 언어 통합 학습'이란, CLIL(크릴)과 같은 말로 일종의 영어 몰입 교육입니다.
한국인 교사보다 우수하다는 원어민이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초등학생은 영어듣기 성적이 조금 올랐지만, 영어 몰입 교육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의 영어 어휘력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영어로 사회 과목을 수업할 때, 일부 고등학생의 사회 성적은 올랐지만 역시 영어 몰입 교육과 상관없었습니다. 더구나 수업에 적극적으로 임할수록 사회 점수는 떨어집니다.
결국 영어 몰입 교육의 효과는 없었습니다. 초보 딱지를 떼기 위해 며칠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핸들만 잡았지만, 운전 실력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길눈이라도 트면 좋으련만, 오히려 서울 시내 지리는 더 모릅니다. 그렇다면 며칠동안 하루 종일 시트에 앉아 운전 연습만 한 게 과연 좋은 방식이었을까요?
서울시교육청의 연구 결과는 지난 2월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공개되거나 발표된 적 없습니다. 만약 영어 몰입 교육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왔으면, 서울시교육청이나 정부가 어떻게 했을까요?
굿은 이명박이 하고, 떡은 영어학원만 먹고…
2008년 한해 동안 사교육비는 꽤 증가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학생 1인당 월평균 23만3000원으로 2007년에 비해 5% 늘었습니다. 사교육받는 학생만 놓고 보면, 31만 원으로 7.6% 늘었습니다.
가장 많이 증가한 과목은 영어입니다. 다른 일반 교과가 5.6% 늘어날 동안, 영어는 11.8%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했습니다. 학교급 중에서는 초등학생의 증가세가 돋보입니다. 합하면 초등학생 영어 사교육이 사교육의 신흥 시장이었던 겁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분은 또 있습니다. 이 분이 영어 몰입 교육을 말씀하셨습니다. 시장은 바로 영어학원의 수강료 인상으로, 엄마는 학원 접수하기로 반응합니다. 덕분에 매출액도 증가합니다. 2008년 아발론은 139.3%, 정상 JLS는 76.2%, 청담러닝은 32.1% 늘었습니다. 경기 침체로 여기저기에서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사교육비 부담으로 아빠와 엄마의 주름살이 늘어나는 그 순간 벌어진 일입니다. '영어 몰입'이 사교육 '영어몰이'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분이 대통령 후보 시절 영어 몰입 교육이 포함된 교육 공약을 발표한 게 2007년 10월 9일입니다. 그 날은 한글날이었습니다.
영어나 외국어는 국제화 시대이니 만큼 필요합니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영어 몰입 교육과 곧바로 등치되는 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영어는 국제적인 소통의 용도가 아닙니다. 국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국내용이고 시험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를 강조하면 할수록 아이와 부모는 더 힘겨워지는 반면 학원의 수입만 늘어날 수 있습니다.
외국어 교육을 고민할 때에는 중국 등 브릭스의 부상 같은 외부 환경의 변화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한국어만 써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없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대한 부담이 외국어 습득에 도움되는지 장애가 되는지도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평범한 학생은 운전면허시험처럼 일정 기준만 도달하면 통과시키고, 외국어를 전공할 학생들은 고등학교나 대학 단계에서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게 필요할지 모릅니다.
"쓰리 베어즈 인 더 하우스, 대디 베어 마미 베어 베이비 베어, 대디 베어 빅빅빅, 마미 베어 슬림슬림슬림, 베이비 베어 베리베리 큣, …". 여섯 살짜리 큰 딸아이가 집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린이집에서 배웠답니다. 영어 가르치지 않았으면 했는데, 노래 하나 알려주었답니다. 그래도 아이는 즐겁게 부릅니다. 거실이든 욕실이든 자동차 안이든 가리지 않고 신나서 부릅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재미있어 하니까요.
하지만 재미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의문입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 올라가면서 '영포(영어 포기 아동)'가 확 늘어납니다. 공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흥미와 자신감인데, 우리의 외국어 교육이 과연 그런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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