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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대 시민사회 태도는 '무지한 옹고집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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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대 시민사회 태도는 '무지한 옹고집의 전형'"

[박동천의 집중탐구]<56>엄숙한 이분법

제5부 민족주의: 집단생존 프레임
제6장 한국 민족주의의 과잉
제3절 엄숙한 이분법


막스 베버는 민족이라는 상징이 중시되는 이유에는 위신이 있다고 하면서, 영광스럽거나 고통스러웠던 역사적 경험의 공유가 위신의 핵심 요소라고 꿰뚫어 보았다. 전쟁사 연구로 유명한 찰스 틸리는 민족국가, 즉 민족의 발생을 전쟁역량의 향상이라는 목적을 통해서 설명했다. 한국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자주권을 함축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20세기 초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였다는 사실은 베버와 틸리의 관찰과 부합한다. 원나라의 압박을 받았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라든지 동명왕 전설 등을 기록한 문서가 나타나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의 압박을 받던 시기에 실학자들 사이에 "우리" 역사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었던 사실도 동일한 조명 아래서 식별이 가능하다.

한국어에 많은 단어들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칭찬과 폄훼의 뉘앙스를 수반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주"와 "사대"만큼 선악의 의미가 자동적으로 섞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제에게 침략당한 경험이 끝난 지 60년이 훨씬 넘었지만, 민족적 위신을 향한 갈망이 교육과 문화를 통해 전승 내지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조영>, <왕건>, <세종> 등에 관한 TV 드라마들은 "사극"이라는 이름 아래 황당한 허구를 자유롭게 끼워 넣는데, 거의 예외 없이 우리 민족이 과거에는 천하를 호령했든지, 적어도 남의 눈치는 보지 않고 살았었다면서 기염을 토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다. 평양 천도를 기획한 묘청과 반대한 김부식 사이의 경합을 낭가(郎家)와 불가(佛家)가 연합한 독립당과 유가(儒家)의 사대당이 벌인 쟁투로 이해하면서, 그 싸움에서 독립당이 패배한 것을 "조선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었다고 한탄한 신채호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비판하려는 민족주의는 김구(1876-1949)나 신채호(1880-1936)의 민족주의가 아니다. 물론 김구나 신채호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 대목들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깊은 존경을 바쳐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들처럼 생각하고 그들처럼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누구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전쟁이 다가오던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전쟁의 와중에 사망했다. 그들이 싸워준 덕분에 우리는 전쟁이 끝난 뒤에 태어나 자랐고, 따라서 전쟁을 예방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매순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처절한 상황에서라면 적과 동지, 선의 편과 악의 편을 엄격하게 가르고, 숙연하게 그 구분을 지켜야 하겠지만, 평화의 시기에는 선악의 이분법 자체를 위험하게 여길 줄 아는 감수성이 필요하다. 사안에 따라서 필요하다면 편을 가르고 한쪽에 가담할 수 있겠지만, 그 일이 지나면 편을 떠났다가 다른 일에는 다른 편에도 들 수 있는 무상한 이합집산이 사회평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사회가 두 패로 갈라져서 어떤 문제든지 끝낼 줄을 모르고 마냥 서로를 향해 짖어대는 상황은 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제2장) 지적했듯이, 한국 민족주의처럼 침략해오는 외부세력의 자극에 의해서 촉발된 형태의 원형은 피히테에서 기원하는 독일 민족주의이다. 이것은 실제 독일에서 히틀러의 인종주의로 연결되었고, 우리 사회에서도 "단일민족"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 뒤에 "순혈주의"를 갈무리하고 있듯이, 배타적 인종주의를 함축하기가 쉽다. 그런데 독일의 경우에는 유태인이라고 하는 눈에 띄는 공격대상이 있어서 인종주의가 직선적인 과녁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으로 이주해 온 여성들에 대한 학대와 차별을 보면 인종주의의 과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들은 원인이라기 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다. 앞 제4장과 제5장에서 논했듯이, "순혈주의"라는 것은 순수혈통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그것을 아끼는 심성이라기보다는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굳이 "같다"고 견강부회해서 뭉개버리는 전횡을 함축한다. 김구가 아무리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세력들을 통합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런 김구를 추종했던 장준하의 눈에 전형적인 민족반역자로 비쳤던 박정희가 "민족중흥"을 기치로 내걸어 대중동원에 성공한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민족"이란 결코 그 자체로 사람들의 내면적인 가치를 유기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민족"이라는 것은 사실 정치적 구심점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형제애" 보다도 더욱 추상적이며 이현령비현령일 수밖에 없는 괴물이다. 게오르규의 『25시』는 인종주의라는 것이 왜 이현령비현령이며, 곧 사악한 정치의 제물밖에 아닌지를 형상화했다.

그러므로 외부세력에 대한 경계심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제3부 제5장 제3절에서 논의했듯이 저항적 연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대적할 가시적인 상대가 있을 때, 그 적군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만 일치가 있을 뿐이고, 적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서조차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관해 공론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각자가 적극적인 의견을 가지기보다는 막연한 원수 또는 악마에 대한 공포와 증오에 밀려다니는 셈이라서, 상대의 의견을 이해한 위에 자기 의견과 융합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역량도 별로 없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의존하는 사유에서는 순서척도가 깃들지 못하고, 오직 편협하게 설정된 어떤 원수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심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심리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미개한 수준의 우리/저들 이분법에 불과하다. 우리는 곧 선이고 저들은 곧 악이라는 것인데, 더 큰 문제는 이때 경계가 지극히 자의적인 변덕에 따라서 그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놓고는 그처럼 미개한 경계가 "민족"의 이름 아래 신성한 것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이는 문자 그대로 완고하고 무지한 옹고집의 전형에 해당한다. 민족주의가 우리 사회의 완고함, 무지함, 고집불통에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일정한 책임은 분명히 민족주의에 있으며, 더욱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점은 우리 사회의 주류 정치의식이 민족주의 프레임을 상대화할 수 있다면 완고하고 무지한 옹고집 증상 역시 스스로 자각할 수 있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북한과 시민사회에 대해서 보이는 완강한 벽창호의 증상은 이런 옹고집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북한에 대해 아무 정책도 없이 다만 미국이 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책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업적을 부인한다고 하는 목적이 분명하게 의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식적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곧 정책이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뭔가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프레시안

우리/저들의 단순 이분법에 따라 증오할 상대를 자의적으로 설정한 다음, 증오를 기반으로 삼아 "우리"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심성은 전형적으로 보수파의 특성에 속한다. 그런 심성을 이용해서 대중심리를 조작함으로써 정권을 탈취하는 수법은 전형적으로 파시스트의 전공이다. 만약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는 마르크스 계열이든 비-마르크스 계열이든 사회주의를 탄압했고, 소련, 중국, 북한, 쿠바 등은 바로 히틀러와는 반대편의 "사회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파시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파시즘이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든 박정희 체제든 모두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은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과 향수를 아직 못 버리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역사적으로 민족주의가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점에서 원초적인 우리/저들 이분법에 의존하는 옹고집 증상에 빠져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제3부와 제4부에서 예시한 제노포비아의 여러 사례들이 바로 그와 같은 이분법적 옹고집의 현현들이다.

Wikipedia를 보면, 대한민국은 인구로 세계 223개국 중 26위, 연간 GDP에서 세계 180개국 중 13위, 일인당 GDP로는 세계 180개국 중 32위이며, 인간개발지수(HDI)에서는 179개국 중 25위이다(☞ 바로가기). 면적으로는 233개국 중 108위로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남북한을 합해서 생각하면 22만㎢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를 합한 영국의 24만㎢에 버금가고, 인구는 2008년 추계로 7200여만 명이 되어 17위가 된다. 대한민국을 약소국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은 주로 두 가지 이유, 과거에 일본에게 맥없이 점령당했고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빈곤을 겪었다는 사실과 주변에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야말로 과거일 뿐이고, 중국, 일본, 러시아와 비교해서 작아 보인다고 약소국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마치 프로농구 선수만큼 키가 크지 않다고 열등감을 가지는 셈과 같다. 이는 공연히 민족적 긍지를 고취하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고, 사실과 이치가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이 약소국 콤플렉스는 쓸데없는 피해의식을 낳고, 그 때문에 부질없는 위신을 쫓아다니느라 걸핏하면 세계 최대, 최초, 최고 따위 애처로운 서열 매기기에 매달리는 증상이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소리가 이런 애처로운 자랑거리 만들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문자란 모국어를 효과적으로 표기하면 그만인 것이지 과학적이니 마니를 따질 여지가 애당초 전혀 없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단기간에 자모를 개발했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지만, 그렇다고 한글 문자가 과학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구멍과 혀 모양을 따다가 ㄱ, ㄴ, ㄷ 등을 형상화한 것이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입술모양을 그대로 그린 로마자 O야말로 한글 ㅗ에 비해 과학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랑할 것이 전혀 없을 때라면 그런 것이라도 자랑을 해서 존재의 의의를 억지로나마 과시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 10위권을 넘보는 무역대국이 자기 조상에 관한 자랑을 그처럼 억지로 과장한다는 것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어떤 노력을 통해 문자를 개발했는지를 있는 대로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조상 자랑으로는 충분하고 남는다. 거기에 쓸데없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장식을 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은 "장동건은 미남이다"보다 "장동건은 세계 최고의 미남이다"가 더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미숙한 치기에 불과하다. 보들레르와 세익스피어와 두보와 정철 중에 서열을 매기거나 바흐와 밥 딜런과 안숙선과 조용필 중에 기어이 서열을 정하겠다는 발상은 서열이라는 것이 뭔지를 이제 처음 배우고 나서 감격한 상태에 젖어있는 사춘기 초반의 아이들에게나 알맞은 정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토록 유치하고 미개한 선악 이분법과 서열주의를 민족주의라고 하는 불투명하고 광범위한 그림자 밑에서 엄숙하게 추종하는 버릇을 대물림하고 있다.

한국인 중에 사악한 인간이 있다는 말을 한국인 전체에 대한 매도로 듣는다든지, 북한의 김정일에게도 선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김정일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으로 곡해한다든지,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 중에 교조적 결벽증이 있다는 말을 진보진영 전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로 과잉번역해서 읽는 경향은 한국사회 도처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민족주의 중에서 과잉인 부분에서 유치한 이분법과 엄숙주의가 결합한다는 내 말을 바로 그런 유치한 이분법과 엄숙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민족주의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민족주의를 송두리째 비난한다고 오해할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 좀더 필요할 듯하다.

민족의 문제는 정치적 의제 중에서 특별한 영역이 아니라 정치라는 영역 전반에 관련된다. 왜냐하면 민족이 무엇을 원하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는 질문은 곧 정치공동체가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느냐는 문제와 정확하게 똑같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미국이나 일본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 나라 안에서 발생하는 온갖 갈등 요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북한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등의 문제는 정치가 담당해야 할 핵심 주제로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결부시키든지 않든지 회피할 수는 절대 없는 목전의 당면 과제들이다. 다시 말해 "민족경제"나 "자주국가 위상확립" 따위만이 민족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분배의 문제, 환경이냐 개발이냐, 사형제 폐지 여부, 교육제도 개혁, 사법제도 개혁, 지역균형발전, 공룡재벌 삼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기타 등등, 이런 모든 문제들이 다 민족의 문제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지금까지 해명해 왔듯이, 민족이란 기본적으로 현존하거나 최근까지 있었던 정치공동체의 구획을 근거로 삼으면서 마치 정치공동체 이상의 모종의 자연적 연대가 있었던 것처럼 상정하는 상징적 실체다. 그러므로 정치공동체로서 연대가 두터워지는 만큼 상징적 연대도 당연히 강화된다. 따라서 민족이라는 상징을 더욱 뚜렷하게 구체화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해야 할 선결조건은 목전의 정치적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목전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에는 "민족", "국가", "역사" 따위 추상어들이 도움이 되는 경우보다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누차 밝혔듯이 선악의 이분법에 매몰된 도덕이나 종교가 결부될 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갈등이 발생하기만 하면 무한 투쟁으로 확산되어버리는 경향과 같다.

민족의 역사를 생각하면 사육신이나 정조는 고사하고,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걱정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민의 90%가 2차방정식을 풀지 못해도 세상에 별 탈이 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만큼, 국민 90%의 국사 지식이 띄엄띄엄 조각난 상태고, 무슨 거창한 "역사의식" 따위에는 콧방귀만을 치더라도 나라가 굴러가는 데 별로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엄숙한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강조하는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과연 무슨 내용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만약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반드시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력과 무엇이 이익인지에 관한 판단력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개인이든 공동체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데에는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력과 무엇이 이익인지에 관한 판단력만 있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발행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6명의 대법관들이라고 국사시험점수가 특별히 낮았을 것 같지는 않다.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강조하고 싶어 하는 역사의식이란 대개 과거의 원한을 복수하려는 동기를 가리킨다. 전형적으로 일본에 대해 우리사회는 시원하게 복수를 못해서 계속해서 울분이 첩첩으로 쌓이는 상태고, 중국이나 미국에 대해서도 그냥 우리 맘대로 한번 휘저어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못해서 안달을 부리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이나 미국도 자기 맘대로 다른 나라를 좌우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란 그야말로 "삼군의 지휘권은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남을 내 맘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마음은 전제자의 심보로서, 중국이나 미국처럼 강대국에게만 안 통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나라에게도 통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과거의 원한을 현재의 과제에 결부시킨다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장을 바꿔서 이 논점을 좀더 파고 들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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