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잠시 생각해보니 장관은 "지휘"를 안 했는데 검찰총장은 "지휘"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가 충분히 있을 것 같다. 물론 설마 아무개를 "먼지털이"나 "토끼몰이" 식으로 수사하라는 지휘까지야 없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신영철 대법관이 판결을 채근한 것을 있을 수 있는 법원행정권 행사로 보는 사람이 법무부 고위직에 설령 있다고 해도, 설마 전직 대통령이 관련된 수사에 개입하는 것을 법무행정권으로 혼동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게 뻔뻔한 개입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검찰총장이 알아서 압박을 받았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은 것 같다. 가령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자유롭게" 윗도리 벗고 얘기하자고 할 때, 도량 넓으신 대통령께서야 당연히 "자유"를 진정으로 의도했더라도, 아랫것들이 "명령"으로 듣는 일이 한국에서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 같아서다.
이렇게 보면 지금 보도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이 이해가 된다. 국세청은 한상률 전임 청장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한 직원에게 "품위유지의무"를 위배했다는 이유로 중징계할 작정이라고 한다 (☞ 국세청, 한상률 비판 직원 중징계키로). 한국예술종합학교 황지우 전 총장이 "밤늦게까지 일하고서 인근의 보직교수들과 3년간 멕시칸바베큐치킨에서 30여 차례에 걸쳐 맥주 한두 잔 마신 것을 두고, 유인촌 장관은 황지우 총장이 룸싸롱에서 280만 원을 유용했다는 식으로 언론에 흘렸다"고 한다 (☞ 유인촌 장관, 자멸의 길로 가는가). 진중권 교수의 과목은 학교가 없앤 것인데, "강의를 안 했으니 연봉의 절반을 돌려받으라"고 문화관광부는 학교를 압박중이라고 한다 (☞ 문화부는 '인터넷 낭인'들의 꼭두각시인가). KBS 심의실은 "뮤직비디오 마지막 장면에서 멤버들이 도로의 노란 선을 밟고 걷는 장면이 교통법규 위반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윤도현의 뮤직비디오를 방송불가로 판정했다고 한다 (☞ 윤도현 뮤비 KBS서 방송불가, 왜?). "불온서적" 지정에 관해 헌법소원을 낸 법무관을 파면한 국방부, 용역의 폭력에 밀린 세입자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하자마자 "도시게릴라"로 간주해 신속하게 경관 한 명의 희생까지 무릅쓰고 진압한 서울경찰청도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전윤철 감사원장 사퇴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당파 싸움 중에서도 최악의 말폐 증상에 해당하는 짓거리들이 오늘날 재현되고 있다.
설마 이토록 소소한 일들 모두에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고 본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청와대 언저리에서 권력을 팔아먹는 브로커들이 혹시 있는지 몰라도 저토록 치졸하게 굴지는 않을 것으로 쳐주고 싶다. 무엇보다 어느 선에서 지령이 있었을지 물증을 잡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므로, 어떤 선으로든 구체적인 하명 또는 암시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면도 있다. 저런 일을 처리하는 일선에서 요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 중에는 어쩌면 구체적인 지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은 알아서 기는 부류들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사실은 그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알아서 기는" 사이에 저토록 저열하고 치사하며 야만적인 행위들이 공공권위의 옷을 입고 자행되는 데에는 무엇보다 대통령의 언행 스타일이 크게 작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저런 짓들이 자행될 때, 관계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적 권력을 위임받은 조직원 가운데 극히 일부 경박한 자들이 설치는 와중에 대다수가 묵종하는 비겁 때문에 저런 짓들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만 보면 대통령이 시킨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결과는 시켜서 한 것보다 더욱 무도하고 저질이 된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시킨 일만 한다면 거기가 극악함의 한계로 작용하겠지만,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충성경쟁이 휘몰아치는 뒤안길에서 악행에 한계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저런 작태들은 앞장서는 소수 행동대원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변명을 둘러대면서도 들러리 노릇을 거부하지 못하는 비겁자들이 없다면 저토록 졸렬한 앙갚음과 복수의 퍼레이드는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그들이 비겁하게 행동할까? 경험에 의해 저것이 권력의 의도임을 눈치 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런 경우들에 대해 대통령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곧 의중이 거기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작용한다. "찍히면 작살난다"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정부권력에게 조금이라도 아쉬운 대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튀어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대통령의 모르쇠로부터 전파되는 것이다. 가끔씩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잡아야"라든지, "국민안전, 국가안보에 타협 없어" 따위 헤드라인이 뜨면 효과는 만점이다. 이 사이에 권력은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점점 더 나쁜 짓을 하는 데 익숙해진다.
지금은 귀를 막고 밀어붙이기만 하면 중심이 잡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국민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국가의 안보도 점점 벼랑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화물연대 지부장이 목숨을 끊고, 전직 대통령도 목숨을 끊고, 이제 89세 고령의 명예목사까지도 "제2의 6월항쟁으로 살인마 리명박을 내치자"고 하면서 목숨을 끊고 있는 상황이다. 자살이라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지에 관해 한가한 논란을 벌일 때가 아니다. "살인마 리명박"이라는 발상에 과격한 감정이 섞여있음을 시비할 계제가 아니다. 지금 분개하고 절망해서 폭발 직전에 이른 국민의 안전을 생각해야 할 때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대학가와 종교계의 시국선언, 시민단체의 항의성명과 집회, 지식인들의 합리적 정책조언들을 마냥 무시만 한다. 이건 불통의 수준을 넘어 벽창호 정치다. 대통령은 촛불이 무서워 청와대에 망루를 짓고 올라가 농성하는 꼴이고, 국무총리는 그런 대통령의 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시너에 불을 언제 붙일지를 묻는 격이다. 항의하는 국민들에게 "끝까지 가보자"고 치킨 게임을 충동하는 모습은 한반도의 평화를 인질로 삼아 미국과 막장 대결을 벌이는 김정일과 영낙없이 닮았다. 나이가 사람들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명박(41년생), 김정일(42년생), 한승수(36년생) 등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제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남과 북에서 독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깡패정치 따위 참상만을 보고 배운 탓에 선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상상력 결핍증에 영혼을 내맡겨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현재 한반도의 위기를 해소할 길은 무엇보다 먼저 저 사람들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저런 벽창호들더러 버릇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우이독경, 마이동풍이라는 소리가 괜히 생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개심하라는 촉구는 물론 계속할 필요가 있지만, 거기에 더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책이란 당연히 최악의 경우를 방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란 김정일의 경우는 남한에 대한 무력도발이고 이명박의 경우는 민중봉기다.
김정일의 생존본능과 오기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정세현의 정세토크]를 비롯한 수없는 전문가들의 제안이 있으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주장은 이제 이명박도 김정일 다룰 때와 같은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것 같다는 점이다. 조언과 충고에 곁들여, 듣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자세히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15개월 동안 그의 촛불 공포증과 벽창호 증세는 점점 악화되는 추세고 국민의 인내심은 점점 임계점에 가까워지는 추세이니, 이 두 방향의 흐름이 막장으로 치달으면 서해보다 먼저 서울에서 유혈사태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 상황에서 평화롭게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한나라당의 이른바 "쇄신파" 의원들에게 일단 달려있다. 단, "쇄신"이든 "정풍"이든 당원으로서 당지도부나 청와대에게 간청을 할 일이 아니라, 국회의원으로서 대통령에게 요구를 해야 한다. 그것이 국회의원의 헌법적인 권한이자 의무다. 현재 국회는 재적 296석에 한나라당이 170석이다. 국회의장을 빼면 과반수는 148이므로, 한나라당에서 23명만 대정부 결의안에 찬성한다면 대통령이 무리한 강공을 펼칠 수는 없게 된다. 이명박 씨는 무엇보다 국회가 거수기만은 아니라는 점을 전혀 배운 적이 없어 보이므로, 한번의 좌절만으로도 큰 깨우침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국회의 명시적인 권고마저 듣지 않는다면 민중봉기가 오히려 "법과 질서"라는 명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운명이 준비한 나락을 몸소 시험할 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것이다.
국회의 기능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국회의원들 가운데 면피나 하겠다는 비겁한 심보에서 벗어나, 현 국면에서 추구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찾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한다. 한나라당 쇄신파라는 사람들이 당내 정풍을 시도해 놓고서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국회의 표결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못한다면 비겁한 태도다. 민주당 의원들은 또 그들대로 소수일지라도 국회를 통해 자신들의 당당한 대의를 밝히는 한편, 막전/막후의 연고나 설득과정을 통해 다수당으로부터 일부 의원들의 동조를 엮어낼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그런 일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내가 보기에는 비겁한 태도다. 인민의 의사를 정책으로 반영해야 할 대의의 책무를 짊어진 자들이, 걸핏하면 "단식"이나 "의원직 사퇴" 따위 자해성 선동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결국 장차 민중의 피에 기생하겠다는 배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은 선동하지 않아도 더 참지 못하면 어차피 폭발한다. 조선시대나 박정희 시대처럼 언로가 막힌 세상도 아니고, 이미 OO일보 따위 쓰레기 낙서장들의 영향력도 현저하게 쇠퇴했기 때문에,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따위 선동은 이미 필요 없다. 대한민국의 민중이 당장 폭발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이 정부가 사악하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고, 평화적이고 개명된 방식으로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의해 뽑힌 대통령을 다시 한 번 쫓아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당은 국회를 열어서 현 시국의 수습책을 논의하자고 오히려 한다라당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동시에 막후 협상과 조정을 통해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과 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간절하게 찾아내야 한다.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무소속, 그리고 민주당의 모든 의원이 합세하리라고 보면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23명만 동조하면 된다. 몇 명의 이탈까지 대비하더라도, 현재 여론의 추이를 보면 30명 정도까지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시나리오가 성사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밖에 있는 내가 말하기보다 안에 있는 국회의원들이 실행하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어렵다는 점도 틀림없다. 그러나 지난 주까지만 해도 나는 내년 지방선거를 통해 이명박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다고 믿었었는데, 지금은 그 대목도 불안해졌다. 벽창호 증세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증이고, 국민들의 분노 수준도 훨씬 높은 것으로 보여서다. 그러므로 민중이 봉기해서 경찰력과 직접 부딪치는 최악의 사태를 막으려면, 국회가 주권을 대변해서 대통령의 공황성 벽창호증상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만약 한나라당의 쇄신파들이 결국 말로만 떠드는 "쇄신"을 원한 것이라서, 막상 국회의원으로서 본인이 만고에 책임져야 할 표결에서는 다시 이명박 눈치를 보게 된다면, 한국의 정치판은 모든 개명의 가식을 벗고 자연상태로 돌아가 무력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민주당 쪽에서 근시안적으로 보면 도리어 한나라당 일부의원의 역할을 경계할 수도 있다. 원희룡이 될지 남경필이 될지 박근혜가 될지, 또는 저런 허명 뒤에 가려진 어떤 쓸만한 영혼이 광채를 발하게 될지는 몰라도, 한나라당에서 민심을 읽고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할 사람이 진짜로 나온다면, 당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심 때문에 현재의 위기를 방치하고 민중봉기를 부추기는 짓은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민중봉기란 헌정사를 위해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설사 성공하더라도 민주당이 공짜로 어부지리를 챙기는 날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명박이 싫어서 봉기한 민중의 힘이 대의의 임무를 비겁하게 방치한 민주당을 온전하게 지지할 리는 만무하다. 이는 4월 혁명과 6월
▲ 한나라당 쇄신특위. ⓒ연합뉴스 |
항쟁의 후과가 증명해준다. 민주당을 비롯해 이 나라에서 정권을 도모하는 정치세력이라면 누구나, 현국면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당인이기에 앞서 개별적인 시민으로서 상식을 회복하고 이명박을 통제하는 것이 최악의 사태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정당의 경계를 넘어 296명 중 148명을 시급한 주권의 대표자로 엮어낼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저절로 노무현/이명박 이후 시대의 표상이 될 것이다.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아주 작은 용기도 쉽게 표가 난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지난주 [박동천 칼럼]에서 조기숙 교수의 발언 "생계형 범죄"를 언급했습니다. 그에 대해 조기숙 교수가 항의를 해왔습니다 - 그 문구는 노 대통령을 가리킨 말이 아닌데 언론사들이 발언의 맥락을 무시하고 자극적인 표현만을 뽑아서 편집한 결과이며, 조기숙 교수는 그 때문에 언론사들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고 제게 알려왔습니다. 확인하지 않고 쓸 경우 유보조건을 붙인 기사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예를 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제가 항간의 언론보도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기숙 교수에게 아픔을 가중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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