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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된 추모, 그 우울한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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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된 추모, 그 우울한 반복

[노무현을 기억하며] '노무현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 한국은 추모의 열기로 뜨겁다. 죽은 자는 산 자로부터, 산 자는 죽은 자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고인은 세상을 훌훌 털고 떠나고자 했지만, 지금의 과잉된 열기는 결코 고인을 그렇게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갑자기 전례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슬퍼하는 조문객들도 서로 당황하고 있다. 촛불들도 다시금 부활하고 있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 역시 함께 되돌아왔다.

물론 이 원인을 현 정권이 스스로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은 자신을 버리라던 고인의 바람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현재의 비정상적인 분위기는 왠지 고인을 더욱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이 '현상'은 전 국민적 추모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아련한 분위기 속에 잠겨서 꾸는 몽상은 아닐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털어내고 이제는 다른 얘기를 할 때이고, 냉철히 현상을 짚어볼 때이다. 갑자기 이 행렬들은 추모 속에서 왜 자신들이 한때 증오했던 '노무현'을 다시금 불러들이고 있는가? 왜 이들은 스스럼없이 노무현을 그가 생전에 그토록 기피했던 황제로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는가? 이 과정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성을 상실한 채 일상 속 넘쳐흐르는 냉소와 분노를 승화시키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무현이라는 유령은 이승을 떠나지 못한 채 그렇게 배회하고 있다. 작년 촛불시위에서 대중들을 시민이자 국민으로 호명했던 것이 다름 아닌 미국산 쇠고기였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렇게 본다면, 미국산 쇠고기 대신에 '노무현'이라는 상징으로 촛불이 되돌아오는 현상 역시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 행렬들 속에는 슬픔과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락이 있고, 즐거움이 숨어있다. 이것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치던 작년 촛불시위의 우울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각종 정보들이 돌아다녔고 감정을 넘쳐흘렀지만 정작 중요한 이슈와 문제제기들은 아래로 잠기고 말았다.

지금도 인터넷은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으로 넘쳐나고 추모를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 차 있다. 이로써 언론과 시민들은 고인의 죽음과 인간미 속으로 관음증적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것 역시 촛불의 '배후'를 운운하던 반동적 보수언론을 질타하던 이들이 그 뒤뜰에서 좀 더 고상하게 촛불의 '구성'―운동권과 대책위를 포함하느니 마느니 따위―을 문제 삼곤 했던 것의 반복일지 모른다. 이것은 용산참사의 진압과정 혹은 거기에 놓여있던 시위도구들을 의심쩍게 바라보던 폭력적 시선의 반복이기도 하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작년 이랜드 노조의 투쟁과 같은 노동문제는 결코 길거리 촛불시위의 의제에 포함되지 못했고, 용산참사는 그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환기시켜낼 수 없었다. 전기가 끊겨버린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있을 때 우리는 '시민'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며 길거리를 행진하고 있었고, 현재 추모의 촛불이 한창인 와중에도 곳곳에 죽음의 망루는 지어지고 있다.

▲ 2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노제. ⓒ프레시안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 추모는 더 이상 추모가 아닌 축제가 되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기에 '정치'나 '민주주의'는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개인의 일상을 옥죄어오던 은밀한 배제의 원리가 사회적 약자에게 거꾸로 작동하고, 여기서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깃발을 세운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은 잠시 해소될 때도 있었지만, 어찌 보면 이는 언제나 존재하는 상수였다. 니체의 말마따나 괴물과 싸우면서 자신도 닮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른바 2002년 이후 반짝했던 '노무현 열풍'과 그로부터 7년 후 지금의 추모와 숭앙의 열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한 것은 탄핵 정국 전후의 촛불이 보여주었던 과도한 열기는 먼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과잉된 열기는 앞서 지적했듯 '정치'에 대한 냉소에 다름 아니며(당시에도 추악한 정치권으로부터 노무현을 지킨다고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어떤 대용물에 대한 과도한 감정이입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며칠 전 일군의 정치인들이 '봉하마을'로부터 추방당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것은 이른바 '국익'을 대표하던 황우석에 반대했던 <PD수첩>에 대한 증오로 표출되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심형래의 대작을 비판했던 평론가들에 대한 분노와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노무현의 소멸에 어떤 숭고함을 부여함으로써 환상 비슷한 것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이것 또한 반복되어온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추모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비록 정권의 성격은 바뀌었지만, 경제와 사회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노무현 시대 때도 엄연히 작동해왔던, '사회적 죽음'을 양산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결여된 채 지금은 분노와 슬픔만이 넘실대고 있다. 이는 '정치'에 대한 대안 없는 냉소로 귀결될 뿐이고 사람들을 잠깐 동안 길거리로 나오게 할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실망과 냉소에 의해 이들을 길거리로부터 철수시킬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열정과 실망의 사이클 속에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소박한 수준에서 애도되면서 다른 죽음들과 함께 보듬어졌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노무현 정권은 추진하려던 정책들을 재고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경제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던 것이고, '사회적 죽음'의 진짜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MB탄핵"을 외치면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최근 쌍용자동차의 해고문제로 빚어진 한 노동자의 죽음과 화물연대 박종태 씨의 죽음이 마냥 현 정권의 실책 탓만은 아닌데도 말이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마지막 기도는 과도한 추모와 숭앙이 아니라, 그 '사회적 죽음'의 원인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민하고 반성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도 추모가 끝나는 순간부터는 결코 고인으로써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 테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아닌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를테면 노무현보다 더 무기력하고 유약하게 쓰러져갈 약자들-을 고민해야 하고, 빼어난 정치인이자 인간성을 간직했던 이의 '죽음' 자체가 아닌 그 죽음 이후의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그 말은 곧 노무현이 지나왔던 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냉철히 반성하는 일일 테고, 정말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금은 돌아가신 '인간 노무현'에게 다해야 할 예의도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마치 노무현의 반대가 MB라도 되는 것-앞서 경제 정책을 지적했듯 결과적으로 둘은 정책적으로 친화적이었던 부분이 많았다-처럼 'MB탄핵'을 외침으로써 '노무현'이라는 환상을 지탱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무현이 탄핵되던 그 초라한 시점으로 돌아가 이후의 정책을 고민해가며 새로운 정치의 지도를 차분히 그려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 반동적 세력들이 '바보 노무현'의 자살을 비아냥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우직하고 '바보'스런 추모판에 조금씩 어깃장을 놓기 시작해야 한다. 진정 미래에는 이러한 불행한 죽음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 이 추모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슬픔과 냉소 속에 머문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지금의 '노무현 효과'를 톡톡히 누릴 이는 어쩌면 MB와 한나라당일지 모른다.

끝으로 소박한 개인적 느낌 하나를 밝혀두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최대한 냉철하려 마음먹으면서도 고인 앞에 손끝이 떨려왔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에 적힌 "운명이다"라는 말과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주는 어떤 울림 때문이었으리라. 왜 우리는 서로 믿고 배신당하면서도 또 믿고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것일까. 아마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까.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어쨌든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보다 한층 쓸쓸한 미래의 나를 참는 대신 쓸쓸한 지금의 나를 참으려 합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에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 대가로 모두 이 쓸쓸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츠메 소세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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