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 버린 사람들>(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김영사 펴냄). ⓒ프레시안 |
누군가 나에게 자신의 상처나 치부를 고백한다면 나도 그에 대한 예의나 보답으로 내 과거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일종의 답례라고나 할까. 이런 버릇은 아직 버리지 못해서 술자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도 선뜻 과거사가 튀어나오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책 속에 펼쳐진 나렌드라 자다브의 가족사를 읽으며 나는 차라리 그가 옆에 있었더라면 나의 가족사를 말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족사는, 혹은 나의 가족사는 어느 편이 더 고통스러웠는가를 겨루는 우스꽝스러운 포틀라치가 아니라 우리의 대부분이 어린 시절을 관통하면서 간직하고 있는 가난한 날들의 애틋한 추억들로 채워질 것이다.
나는 나렌드라 자다브의 책을 그렇게 읽었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다소 자극적으로 '신도 버린 사람들'로 나와 있지만 영문판은 '언터쳐블(untouchables)'이었다. 나는 차라리 이 영문판의 제목도 '신도 못 건드리는 사람들'이라고 뒤집어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마라띠어(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의 공식어)판의 제목은 '우리 아버지와 아이들'이다. 책에는 인도의 불가촉천민 자다브 가족의 비참했던 고난들이 묻어있지만 본래의 제목처럼 한 가정이 보여주는 사랑과 가난의 일상들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 책을 통해 이제는 세계적인 유명인이 되어버린 나렌드라를 읽을 때 우리는 억압과 차별을 극복한 한 명의 위대한 불가촉천민을 본다. 그리고 힌두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희유한 개인의 성공기에 감동한다. 또한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계층들'(서발턴)의 목소리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드러났는가를 보여준다는 식의 현학적인 평가도 뒤따를지 모른다.
아마도 이러한 평가가 자다브 가족에게 계속된다면 책 속의 인물 다무(나렌드라의 아버지)가 무덤에서 일어나 우리에게 냉소적인 코웃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평가 뒤에는 개보다도 못한 인간이 인생의 역전 드라마를 어떻게 일구어냈는가를 읽고 싶은 흥미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인도 사회의 현실이나 위대한 인간 승리의 드라마 등등의 부제를 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은 나의 솔직한 감정이다. 나렌드라 부모의 기억들로 채워진 이 책은 무엇보다 마치 김주영이나 이문구의 소설에 그려지는 어린 날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즐겁다.
새 옷이나 신을 얻게 되었을 때의 흥분, 더럽지만 한없이 달콤했던 불량과자, 처음 보는 라디오, 고무줄을 만들어 보려고 장독대에 말렸던 거머리, 훔쳐 먹었던 계란, 철로 위에 연탄 부스러기를 얹어놓고 자석을 만들어보려 했던 어리석음, 언젠가 외증조 할머니가 전기불이 처음 들어오던 날 전구에 대고 담뱃불을 붙이려했던 기억들. 이런 기억들을 1900년대 전반 쯤으로 탈색시키고 지형을 인도로 둔갑시키면 나의 추억 일부는 나렌드라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풍요로워졌지만, 다시는 그 때의 흥분과 황홀한 맛과 감사함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난하지만 소중한 기억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으므로 역설적으로 우리는 스스로를 '언터쳐블'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먼 나라의 당신
이런 감상을 늘어놓는다면 사회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목에 힘을 주면서 하층민들의 고난을 은폐하거나 희화화한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엄숙주의는 대부분 인도 하층민의 생활을 묘사하고 분석하며 그들이 처한 사회적 부조리를 비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사힙(선생님)'들이 만들어낸 관찰의 결과물들이 하층민의 삶을 규정해버린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우리는 인도의 최하층민을 도비가트(빨래터)나 채석장, 철로보수 광경 속의 사진 속에서나 보게 되었다. 남편에게 얻어맞거나 혹은 불태워지는 여편네, 마약에 쪄들은 얼굴들, 사창가로 떠밀려온 어린 소녀들, 화장실의 대소변을 쓸어내는 장면이 이들을 대변해왔다.
인도 최하층민의 가난과 더러움에 대한 측은지심은 충분할 정도로 익혀왔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작고 소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는 거의 들어본 바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책에 묘사된 자다브 가족사는 인도 최하층민의 생활을 내밀하게 읽어낼 수 있는 교과서가 될 수 있다. 인류학적인 관찰 보고서보다 이 기록은 더 정직한 것이다.
차별은 곧 세계 그 자체다
물론 이 자다브 가족 이야기는 소박한 행복의 기록이 아니다. 한국민의 3배에 해당하는 1억6000만 명의 인도 불가촉천민들 이야기다. 자다브 가족의 이야기는 인도 불가촉천민들의 잔혹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달리트(Dalit·억압받는 자)라 불리는 불가촉천민은 힌두교의 전통적인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인도 역사와 함께 존속해왔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의 상층 계급에 의해 비인간적 대우를 받아왔다. 교육이나 임금의 평등은 고사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도 제한되어 왔다.
달리트의 침은 땅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오지그릇을 목에 걸고 다니며, 자신들의 발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빗자루를 허리춤에 달고 다녀야했다. 이런 정도니 달리트들이 마시는 물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그릇들, 그들이 지나다니는 공간도 구분되어야 한다. 이들의 그림자와 상층 카스트의 그림자가 섞여서도 안 된다.
차별의 당위는 소위 '순수'와 '오염'이라는 힌두교 내의 뿌리깊은 의례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의 뿌리는 초기 힌두교 형태인 브라만교(Brahmanism)에서 잘 나타나며 이 종교 형태와 근원적인 친족관계가 있는 고대 이란 종교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순수와 오염의 기준은 힌두 사회의 구분화가 유지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한마디로 우주의 분화적 질서가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힌두교에 놀라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종교 사회 속에 내재된 '차별화(Classification)'의 테크닉을 보았을 때이다. 고대 힌두교 속의 전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심지어 개별적인 동물과 식물까지도 계층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염소는 가장 고귀한 브라만의 속성을 갖는 동물이며, 말은 크샤트리야의 속성을, 소는 바이샤, 양은 수드라의 속성을 갖는 동물로 구분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빠샬라는 브라만의 나무, 니야그로다는 크샤트리아의 나무, 아슈와타는 바이샤의 나무 등으로 구분한다. 여기에 방위와 신체부위, 시간, 경전의 주문 따위도 계급화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1955년 인도는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다만 헌법을 기록한 잉크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카스트라는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은 거의 변화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투와 이름에서 인도인들은 각자의 카스트를 눈치 채며, 특정한 행동거지에 따라 자신들을 서로 알아본다. 그것들은 이제 기호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달리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자신들이 결코 인정받을 수 없었던 고향을 떠나 뭄바이와 같은 대처로 향한다. 하지만 설사 대처에서 성공하여 귀향하다고 해도 시골에서는 여전히 그가 누구의 자식이며 어떤 계급인지를 숨길 수 없다.
책에 묘사된 자다브 가족사는 이러한 힌두 사회가 갖는 질곡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나렌드라의 부모는 고향에서의 굴욕적인 사건을 계기로 뭄바이로 이사한다. 현대 달리트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암베드카르를 만난 곳이 그곳이었다. 그의 영향 아래 저자의 아버지 다무는 가난한 살림을 영위하며 자식들의 교육에 열정을 쏟는다. 그리고 불교로 개종한다.
저자 나렌드라 자다브는 그러한 고단한 삶의 주인공인 아버지의 마지막 열매다. 나렌드라는 현재 인도 뿌네 대학의 총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학은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 연구로 매우 유명한 대학이다. 빌미야 무엇이건, 달리트들은 그 언어를 통해 빚어진 힌두교의 경전들로 인해 수천 년 동안 인간적인 자존을 상실해왔던 것이다.
계급의 나날들
자다브 가족사를 읽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 자체보다는 그들을 억압했던 인도의 계급 제도에 먼저 의문을 품는다. 인도의 계급 제도를 바라보는 이방인들은 매우 완고하고 집요한 카스트 제도의 존속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왜 이 제도는 21세기인 현재도 사라지지 않는가. 왜 인도인들은 혁명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래적인 운명을 감내해야하는 전생의 업이 있다고 믿으며 이것을 현실에서 충실하게 이행했을 때 내생에서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빗나간 대답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해보면 카스트 제도의 완고함에 대해 다른 시각이 생길지 모르겠다. '한 왕조를 전복시키는 것이 쉬울까 아니면 한 집안의 식탁 예절을 바꾸는 것이 더 쉬울까?'
인도의 계급 사회를 체험할 수 없는, 따라서 인도를 상상할 수도 없는 한국의 성인 남자들은 한 때 젊은 날을 탕진했던 군대의 내무반 생활을 떠올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병은 일어선 채로 군화끈을 맸으며 플라스틱 식기와 군용스푼을 사용해야한다. 그리고 내무복 차림에 양반다리로 허리를 펴고 앉아 TV를 '봐야만' 한다. 병장은 스테인리스 식기와 일반스푼을 이용해 밥을 먹는다. 그리고 런닝셔츠 차림으로 침상에 누워 TV를 '봐주어야' 한다. 이런 사소한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완고한 계급 사회의 본질은, 이들의 계급이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이 차별화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해야만 그 내무반 사회서 그들 자신의 계급이 추인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계급적으로 기호화된 일련의 행동이 그 행동의 주체에게 계급을 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기호화된 행위들은 아주 미세한 것들이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암묵적으로 승인된 기호화된 행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말할 필요 없이 힌두교 내에도 계급을 지시하는 작고 수많은 행위의 단위들이 있다. 이 의미관계는 잘 들어나지도 않을뿐더러, 설사 발견한다고 해도 그 관계를 해체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상층 카스트의 밥그릇 위로 불가촉천민의 그림자가 지나갔을 때 고함을 지르고 밥상을 뒤집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상층 카스트의 될 수 없다. 그 순간부터 고귀한 상층 카스트는 그 계급 사회의 이물질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 자신 또한 병적인 존재로 인식될 것이라는 망상에 끊임없이 시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의 밥그릇을 엎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한국의 불가촉천민들
나렌드라의 아버지가 다리 난간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한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비참한 인생들도 송전탑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한다. 계급은 이제 소비다. 자본은 수많은 상품을 생산하고 우리는 소비한다. 미디어의 광고는 특정 브랜드의 소비를 삶의 질과 연계시킨다. 경쟁에서 밀려난 열등한 소비자는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자신은 어느새 부끄러움을 느끼는 달리트가 되어 있다. 어쩌다 분에 넘치는 소비를 했을 때는 후회보다 고귀한 신분 옆에 서있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만한 상층 카스트들은 고상한 경전을 읽는 대신 유명 브랜드의 상품을 걸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고결한 신분을 입증하게 되었다.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품의 소비로 자신들을 달리트로부터 구별 짓는데 성공했다.
한국의 불가촉천민들은 이것이 이미지로 만들어진 가상의 계급 사회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어도 거기 어딘가에 자신의 자존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달리트들은 새로운 상층 카스트들의 박시시(체제의 선심성 떡밥)에 의존해 살아야할지 모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