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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형님'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철학자의 서재] 조지 오웰의 <1984>

▲ <1984>(조지 오웰 지음, 1948년 펴냄, 국내에는 민음사, 문예출판사 등에서 한국어판이 나왔다). ⓒ프레시안
살인의 추억이 남긴 것은

2004년 7월 연쇄 살인범 유영철 검거. 2009년 1월 경기 서남부 연쇄 살인범 강모 검거.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름들이다. 연쇄 살인범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일단 강모가 검거된 계기로 다시금 사형제 존폐 여부가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1997년 12월 30일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중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 10년간 단 한 번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 30일부터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강모 사건을 계기로 지금껏 미뤄왔던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여권의 목소리와 가해자의 인권과 피해자의 인권 중 누구의 인권이 더 소중하느냐를 따지는 여론의 목소리가 사형제 존치에 힘을 보태고 있다.

강모 검거의 일등공신은 물론 범인 검거에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던 경찰이었겠지만 그들에게 수사할 수 있는 단서를 준 것은 감시 카메라 CCTV(closed circuit television)이다. 우리나라도 감시 카메라가 도입된 이후 꾸준히 설치가 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 감시 카메라의 설치에 전국이 들썩인 적이 없었다. 2008년 강남구청은 총 580대의 방범용 감시 카메라를 갖춰 전국에서 가장 조밀한 감시 카메라망을 갖고 있다. 아직 사건의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제주 여교사 피살 사건을 계기로 제주지방 경찰청은 감시 카메라 300여대를 추가설치 할 계획이다. 국내 시장 규모가 거의 1조 원에 달하는 감시 카메라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달리고 있다.

범인이 발 붙일 수 없는 행복한 세상

2007년 영국은 '말하는 감시 카메라'를 도입했다. 폐쇄 회로 모니터를 통해 적발되는 경범죄인들에게 스피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저씨! 담배꽁초 다시 주우세요' 깜짝 놀란 남자는 허공에서 울려퍼지는 꾸지람에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다. 사실 아무리 감시 카메라를 돌려도 사소한 위법 행위나 무질서는 단속하기 어렵다. 그만큼 감시 카메라에 사람들이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설마 이것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랴'하는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무질서 행위를 저지르는 순간, '당신이 하는 일을 우리는 보고 있다. 당신을 처벌하겠다'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듣게 되면 누구라도 하던 짓을 멈출 수밖에 없다.

'꾸짖는' 감시 카메라는 이미 영국만의 뉴스가 아니다. 2008년 인천시가 스피커 달린 감시 카메라를 자체 개발해 1300여 대를 설치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우리는 이미 접했다. 감시 카메라는 주정차 단속, 쓰레기 투기 감시, 재난 방지, 시설물 관리, 산불 감시 등 맡고 있는 책임이 중하다. 남몰래 검은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남의 집 담벼락에 버리던 그분은 360도 회전하는 감시 카메라에 반드시 얼굴이 찍힐 것이고, 술김에 남의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찼던 그분의 인상착의도 감시 카메라는 정확하게 기록할 것이다. 밤에도 그분은 감시 카메라의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최첨단 디지털 카메라는 아무리 어두운 밤에도 뛰어난 화질로 그분의 모습을 기록하여 줄 것이다.

1948년에 쓰인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1948년에 집필된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1984>는 감시 카메라의 등장과 더불어 새삼 다시 조명되는 작품이다. 미래 세계를 그리는 <1984>는 러시아의 소설가인 예브게니 자미아틴의 <우리>와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더불어 세계 3대 '반유토피아 소설'로 분류된다.

조지 오웰은 나치즘, 파시즘, 스탈리니즘의 등극과 전체주의의 폭력성 때문에 인간의 신념이 뿌리부터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란 '전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하며 국가의 이데올로기는 곧 모든 개인의 신념이 되도록 강요하는' 체제이다. 오웰은 소설을 통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인정하고 무감해질 수 있는 전체주의의 문제점들을 드러내었다. 그는 유토피아를 제시해서 사람들에게 의미 없는 희망을 주기 보다는 먼 미래의 반유토피아적 세계상을 보여줌으로써 현대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1984>였을까? 한 100년 쯤 먼 미래를 제목으로 하기엔 조지오웰의 상상력이 너무 빈약했던 것일까? 원래 조지 오웰은 소설의 제목을 <유럽의 마지막 남자>로 기획했다. 그러나 너무 평범한 제목인 것 같아 고심한 끝에 소설이 완성된 해인 48년을 뒤집어 84년으로 바꾸었다. 참 평범한 발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렇게 해서 탄생한 <1984>는 우리에게 제목 이상의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오웰은 1948년에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감시 체계를 소설에 등장시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이다. 당시의 유럽은 아직 저급한 정도의 통신기술 사회였다. 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텔레스크린'은 쌍방향 화상 음성 통신 체제이다. 감시자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화면으로 대상을 감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점을 그 즉시 지적할 수 있다.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에서는 독재체제를 찬양하는 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감시받는 자가 체제를 비판하는 잠꼬대라도 하면 그는 어느새 잡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체제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 무시무시한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언제 어느 때 감시자의 눈길이 나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체제에 거스르지 않는 얌전한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간다.

여기에서 벤담의 원형감옥 판옵티콘을 연상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어둡고 높은 감시탑 안에서 언제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모르는 죄수들은 징계받을 만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1984>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감시자를 대표하는 당의 수장은 '빅브라더'이다. 잠깐 삼천포이지만 빅브라더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큰형님' 정도일텐데 60, 70년대 우리나라에 소설이 소개될 때는 빅브라더의 번역어가 '대형(大兄)'이었다니 좀 우습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의미 변화가 일어나는지 새삼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얼굴이 크게 그려진 빅브라더의 포스터는 당원들이 사는 맨션의 층마다 붙어있다.

"(…) 그 얼굴은 교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눈동자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아래 '빅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 캄캄할 때 외에는 동작 하나하나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그런 삶이 본능처럼 습관화되어 버렸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독백이다. 스미스의 독백이 마치 2009년 대한민국 국민의 독백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는 '난 어린이를 납치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항변이라도 하듯 천장의 감시 카메라를 둘러볼 수밖에 없고, 회사에서는 생체 인식 시스템으로 출근부 도장을 찍으며 '난 확실히 나일뿐이고'를 외쳐야 하는 사회.

게다가 최근에는 업무용 개인 컴퓨터, 휴대전화 등에 대한 무단 열람과 도청, 감청이 증가하면서 노동자 감시도 늘고 있는 현실이니 몸 한번 움찔하기조차 겁이 난다. 특정사건의 인터넷 기사를 쓸데없이 많이 클릭하는 것도 범죄자로 몰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현실에 숨이 턱턱 막힌다.

우리는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빅브라더에게 늘 감시당하고 살아간다. 혹시 이런 숨막히는 현실에서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이, 바로 감시에 무뎌진 순간이 될까 두려워진다. 범인이 발 붙일 수 없는 행복한 세상은 이제 '스스로 체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스스로 묻는 사람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스탈린의 폭력도 전투경찰의 폭력도 필요없는 사회, 모두가 순한 양이 되는 사회가 바로 조지 오웰이 경고하는 디스토피아의 사회이다.

디스토피아의 우울함을 담고 있는 1984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최첨단 통신 체계 말고도 몇 가지 현대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소설 속의 독재체제는 세 가지 슬로건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믿겠는가 싶겠지만 교육을 통해 독재자는 무엇이든 믿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 '경제가 최고의 가치이다'. 그렇게 국민들은 믿었고 그리고 대통령을 뽑았다. 기업은 살았지만 노동자는 죽고 있으며 경제 말고도 우리 사회에 중요한 가치들은 너무나도 많다.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광우병 걸린 사람 없고, 경인운하는 물류 이동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권력자가 지속적으로 국민에게 홍보하고, 국민들이 무기력해진다면 역사는 결국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소설 속의 노동자들은 맥주를 마시며 복권 이야기를 한다. '엄청난 당첨금이 걸려 있는 복권은 노동자들의 즐거움인 동시에 그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었고, 진통제이면서 자극제였다'. 전체주의의 정치술은 사람들을 끝없이 궁지로 몰아넣으며 착취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정부가 부풀려 놓은 복권에 당첨되기를 희망하며 일주일을 살아간다. 벼락맞아 죽을 확률도 안 되는 로또 당첨이 내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애써 기억하는 것은 무척이나 우울하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한 아이의 엄마로서 우리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여자라서 밤늦은 거리의 낭만을 맘껏 즐길 수 없는 게 슬프다. 세상에 흉악한 뉴스들은 모두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평화가 과연 수만 대의 감시 카메라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돈 때문에 부모가 이혼하고 아이들이 상처 입는 일이 결코 없는 세상, 언제 해고될지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의 열정을 맘껏 발산할 수 있는 작업장, 세상과 담 쌓고 혼자 분노의 칼을 갈지 않고 아픔을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과연 수만 대의 감시 카메라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오늘 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으며 살인의 추억이 남긴 메시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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