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에 근거한 세밀한 분별에 따라서만 정의가 실현될 수 있고, 그렇게 정의가 실현되는 곳에서만 정치 세력 간에 힘의 균형이 팽팽하더라도 무력투쟁이 아닌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고 나는 바로 앞 글에서 말했다. 아마도 잘못 말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믿는 정의와 우리 검찰이 믿는 정의가 표기만 비슷할 뿐 내용은 속속들이 다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정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도 역시 국민들이 직접 선택해야 할 것이다.
정의란 죄를 졌다면 진만큼 벌을 주고, 공을 세웠다면 세운 만큼 상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동서고금의 차이가 거의 없다. 다만 무엇을 죄로 보고 무엇을 공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서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차이가 많다.
농부가 뙤약볕 아래 땀 흘려가며 땅을 갈고 씨 뿌리고 가꿔서 수확한 곡식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만든 물건은 누구의 몫인가? 농토가 자기 땅이 아니라면 지대를 감하고 남은 만큼만 농부의 몫이다. 노동자가 곧 공장의 소유주가 아니라면 생산물의 소유권은 공장소유주가 가지고 노동자는 다만 품삯만을 받는다. 그럼 지대와 임금은 누가 결정하는가?
동양이든 서양이든 신분사회에서 지대는 지주가 정했는데, 사실 그조차도 의미가 없었다. 지주는 곧 귀족 즉, 지배계급이었고, 지배의 한계나 방식에 관한 규제가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지대를 얼마나 거두느냐는 문제는 철저하게 지주의 변덕에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된 지대 이상을 거둬간다고 항의했다가는 어떤 보복이 뒤따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체제에서는 생산을 위해 대다수 민중이 흘린 땀의 결실을 소수 특권층이 빼앗아다 향락을 위해 소비했다. 땀 흘려 노동하고도 배불리 먹지 못한 사람들은 눈물조차 맘대로 흘리지 못했다. 너무 크게 울었다가는 피까지 흘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초기 노동조합이 불법이던 시절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주고 싶은 만큼을 받으면서도 감지덕지해야만 했다. 혹시라도 밉보여 해고되면 가족을 먹일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크게 울면 안 되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목숨을 걸고 크게 울부짖은 사람들이 있어서 세월이 지난 후에는 노동조합이 형식적으로나마 합법화되었다. 대한민국은 1970년에 전태일이 너무나 크게 절규한 이래 노동의 권리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아직도 공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사적 공간 곳곳에서 협박과 전횡이 없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각자 땀 흘려 일한 만큼 생산의 결실을 나눠 가진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지주나 자본가도 땅과 자본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흘린 땀과 정성만큼 당연히 지분을 차지할 권리를 가진다. 다만 만일 땀 흘려 일하고도 지주가 너무 많이 가져가서 배가 고파야 한다면 눈물이 날 것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시끄럽다고 때리면 화가 날 것이다. 화가 나서 한번 눈을 부릅떴더니 다시는 그런 놈이 생기지 않게 시범 케이스로 죽이면 오히려 나머지 노동자들이 원한을 품을 것이다.
▲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로 가고 있는가?" 지난 21일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순천향대병원 분향소에서 통곡하는 유족. ⓒ프레시안 |
내가 땀 흘린 만큼 내가 차지하는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남이 눈물을 흘린 만큼 내가 차지하는 것을 정의라고 불러야 하는가? 각자가 노동해서 자기 생계를 챙기는 사회가 건강한가, 아니면 가능하면 권력에 빌붙어서 남이 생산할 결실을 뺏어먹으려 드는 사회가 건강한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로 가고 있는가?
정부 기획에 의한 재개발 사업은 권력이 벌이는 국책 부동산 투기다. 따라서 오직 그 이익 중에 합당한 부분이 환수되어 공익을 위해 사용될 때에만 정당화 여부를 입에 담기 시작이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나름대로 땀 흘려 생계를 꾸리려는 자영업자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단지 세입자라는 이유로 내쫓으면서 무슨 공익을 말할 수 있는가? 정상적인 권리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조건에 그냥 쫓겨나기가 너무나 서러워서 우는 사람들에게 눈물 닦을 시간도 안 주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어떤 등급의 악령이란 말인가? 오산에서처럼 울다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진압만 했어도, 아니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다만 사고만은 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만 했더라도 정부의 "살인"이라는 흉흉한 소리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왜 나오겠는가?
이 나라에 함께 사는 일부는 남의 눈물도 모자라 남의 피까지 마셔야 배가 부른지 모르지만, 대다수는 그저 자기가 흘린 땀만으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이웃이 억울하다고 울부짖어도 자기 밥벌이가 바쁜데다가, 가짜 울음도 워낙 많은 세상이라서 본체만체 지나가던 사람들도, 불에 타서 사람이 죽으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투입된 경찰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희생된 젊은 경관만이 아니라, 단지 명령에 복종했을 뿐인 모든 대원들도 피해자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의무"를 지금 한국의 특공대원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순교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경찰 수뇌부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아직은 분명치 않다. 세입자들의 목숨만이 아니라 수뇌부의 직책도 "청소하다 깬 접시"처럼 언제든 부담 없이 보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검찰의 편파성도 단정하면 안 된다. 의문과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와 증거를 가지고 해명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시민들이 증거를 찾아서 제시하는 만큼만 뒤따라 수사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직은 축소하지 않나 눈을 부릅뜨고 경계만 해야지 은폐를 했다고 단죄하면 안 된다. 검찰은 추정만 가지고 농성자에게 발화 혐의를 씌우는 듯 마는 듯 언론 플레이의 의혹이 있더라도, 건강한 양식을 가진 시민들은 더욱 확실한 증거들이 충분히 축적되기 전까지는 아직 그것을 조작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아직은 대통령도 표적으로 삼으면 안 된다. 건설회사의 사장과 철거반원이 다른 만큼, 전직 사장과 현직 사장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 참극을 보고 기독교도답게 회개해서 무단통치를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대통령을 공격하면 안 된다. 증거가 없는 한, 아직은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그저 사람이 죽더라도 투기 이익만 챙기면 된다는 탐욕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악령의 우두머리는 사람이 죽은 사고를 가지고 "경종"으로 이용해 먹으려는 못된 심보다. "서울서만 앞으로 450개 구역 재개발, 65개 재건축, 26개 뉴타운, 467개 도시환경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거나 계획"되어 있다는 이유를 가지고, 이번 일이 경찰의 과잉 진압이 아니라는 논거로 삼는 <조선일보>식 비뚤어진 논리학을 비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스러져야 할 이유가 없는 생명이 희생되었는데도, 차후의 사업 진행을 위한 시범 케이스로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식의 악랄한 착취를 집중적으로 폭로하고 성토해야 한다.
아직은 투기꾼을 위한 정부라고 부르지는 말아야 한다. 성급한 공격에 토라져서 약간이라도 남아있던 양심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는 사람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은 저들의 공화국이라고도 부르면 안 된다. 죄도 없이 꺾여버린 여섯 목숨을 빌미로 공연히 반정부 투쟁을 선동한다는 반론이 적반하장임을 분간하지 못하고 혼동을 일으킬 착한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만 눈을 크게 뜨고 주시할 때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선택해야 할 기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확인하고 마음 깊이 새겨둘 때다. 화염병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강경 진압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어떤 선택을 뜻하는지를 알려줄 때다. 이런 세상에 축소수사나 은폐가 가당하냐고 반문하는 순진한 백성들에게, 합당한 의심은 민주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임을 설명해 줄 때다.
지금은 당국의 진상 규명을 지켜볼 때다. 촛불을 켜고 보든, 노래를 부르면서 보든, 생업에 종사하면서 보든, 진상 규명이 얼마나 이치에 합당하게 이루어지는지를 공론의 주제로 삼아야 할 때다. 당국이 우연히 빠뜨리는 증거가 혹시 있다면, 당국이 부주의로 놓치는 논리가 혹시 있다면 줍고 챙겨서 당국의 수사에 협조할 때다. 이렇게 지켜보는 시선과 진상 규명을 위한 협조마저도 성가셔서 평화 시민의 눈을 강제로 가리려 드는지 않는지를 감시할 때다.
[다시 '공권력'을 생각한다 ①] "'공권력'이 지켜야 할 '공익'은 무엇인가" [다시 '공권력'을 생각한다 ②] "약자를 청소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공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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