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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를 사는 뉴라이트 그리고 이명박"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보수주의자의 한국 근·현대사 ⑤

냉전시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뉴라이트의 시각

대한민국 시대의 역사인 현대사를 <대안 교과서>에서는 시기 순으로 4, 5, 6부에서 다루고 북한 역사를 보론으로 붙였다. 내 책 <밖에서 본 한국사>에는 7장의 5개 절 중 4개 절에서 현대사의 여러 측면을 각각 다루고 마지막 절에서 현재의 변화와 미래의 전망을 설명했다. 장절을 나눈 기준이 서로 달라 범위를 맞춰 대조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내 책의 절 하나씩을 놓고 그와 관련된 <대안 교과서> 여러 곳의 내용을 묶어 살펴본다.

밑에 붙이는 '냉전과 열전 사이'는 해방 후 반세기간 한국의 존재 상황의 일차적 조건으로 작용했던 냉전 체제가 한국 현대사에 어떤 굴곡을 일으켰는지 개관한 글이다. <대안 교과서>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4, 5부와 보론의 여러 곳에 나와 있다.

여러 사안에 대한 두 책의 관점 차이가 미국과 소련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1945년에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개항기 이래 한국인에 불리하던 세계 정세는 모습만 바꿔 계속되고 있었다. 새로운 역경은 민족의 분단과 새로운 예속의 위협을 제기했고, 현실 속에 이 위협을 체현한 주체가 양대 진영의 맹주 미국과 소련이었다. 한국에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거의 아무런 제3자 개입 없이 직접 마주쳤기 때문에 그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은 결과 분단 건국이 이뤄지고 전쟁이 일어났다. 한민족의 비극에 대한 두 나라의 책임은 구조적으로 대등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이 악마의 나라들이어서가 아니라, 냉전 구조 속에서 그들의 역할이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십 년 전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 민족들에게 악역을 맡았던 것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다.

그런데 '대안교과서'는 모든 책임을 소련에 떠넘기고 미국에게는 면책권을 주려고 발버둥을 친다. 특히 분단 건국과 전쟁 과정에서 조그만 증거라도 소련과 북한의 책임을 뒷받침하는 것이 있으면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독자에게 냉전 상황의 구조를 이해시키기보다 미국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데 바쁘다. 미국을 좋은 나라로 미리 정해 놓고 매사를 그에 맞춰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미국이 좋은 나라인 까닭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길로 이끌어주었다고 하는 데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서론부(1부 1장)에서부터 한국 근·현대사를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 성장의 역사로 규정해 놓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앞장서서 실천하는 나라이니, 그런 나라에게 예속된 것이 대한민국의 복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종주국 노릇을 하다가 그 후에는 맹주 내지 후견인 노릇으로 물러섰고, 1990년경 냉전 해소 후로는 특수 관계를 정리했다. 종주국이나 맹주 노릇을 할 때 미국은 한국의 민주주의나 경제 발전보다는 냉전 구조 속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같은 시기에 중남미 등 여러 지역 친미 국가들의 독재 정권을 비호한 것과 별 차이가 없던 것이 한국에 대한 미국 정책의 기조였다.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은 한국인의 힘과 뜻으로 이룬 것이며, 미국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결정적인 방해를 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앞으로 한국의 여러 방면 발전을 위해서도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참고 사항이기는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할 일이 아님을 현대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냉전 구조의 영향과 미국의 역할은 엄정한 판단의 대상이 된 과거사다. 그런데 <대안 교과서>는 미국과의 특수 관계를 떠나서는 한국의 장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냉전 시대의 시각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0년이 다 돼가는 공산권 붕괴를 증거로 자본주의 원리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믿는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신종 유사종교일 뿐이다. 공산권 붕괴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단기적 전략으로서는 효과가 있었을지언정, 세계의 앞날을 열어 갈 이념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진행 중인 금융 공황이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목전의 현실 앞에서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드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지금이 주식을 사놓을 때라니! 주식을 사놓아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떠나, 장사 안 되고 일자리 없어 서민들이 비명을 지르는 판에, 주식 사고파는 것밖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들을 대표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투기꾼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굳혀주는 일이다.

핏대 그만 올리고 책으로 돌아오자.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냉전 구조의 영향이다. 그런데 <대안 교과서>는 냉전 구조의 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데 힘을 쏟은 책이다. 자본주의 원리를 절대시하고 미국에의 예속을 당연시하는 것이 결정적인 걸림돌들이다.


냉전과 열전 사이

▲ 미국은 대한민국을 낳아주고 키워준 나라다. 1990년까지 45년간 두 나라의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이상의 것이었다. 그 동안 미국은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어쩌나? 미국이 한국과의 특수관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됐는데? 미국이 밉지 않더라도, 이제 기대지 않고 살 길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프레시안
일본에게서 해방된 한국을 점령한 두 나라가 바로 그 후 반세기간 냉전의 주역이 될 나라들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은 둘로 쪼개져 세계 냉전 구조의 최전선에 자리를 잡고 근대국가로서의 역할을 종속적인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

"전투와 교전 행위가 있어야만 전쟁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무력 행사 의지를 상당한 기간에 걸쳐 서로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도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17세기에 토머스 홉스가 한 말이다. 냉전은 이런 범주의 전쟁에 들어가는 것이다.

냉전이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라도 전면적 전쟁이 터질 수 있다고 걱정하며 지냈다. 그리고 그 전쟁에는 핵무기가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면적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것은 당사자 사이의 신뢰 덕분이 아니라 전쟁이 터질 경우 쌍방 모두가 멸망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한국은 독일, 베트남과 함께 두 진영으로 쪼개진 분단국 셋 중 하나였다. 이들 세 나라가 냉전의 속박을 가장 뼛속깊이 겪은 나라들인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경험이 제일 철저했다. 베트남에서는 친미 정권이 국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미국의 총력 지원에도 불구하고 냉전 중반에 무너졌다. 독일인들은 냉전의 제약을 넘어서는 경제와 사회의 발전을 이뤘기 때문에 냉전체제 극복의 중요한 돌파구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한국은 세계적 냉전 구조가 해소된 후에도 십년 넘게 냉전체제를 유지했다.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으로 돌파구를 찾았으나 국내에서는 수구 세력의 견제가 계속되었고,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북한 봉쇄 정책이 길을 가로막았다. 7년만에야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면서 해빙을 위한 지속적 작업을 바라보게 되었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변화의 전망을 미국 정부보다도 남한 내 수구 세력이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고 있다. 이것은 냉전체제가 오랫동안 외부의 질곡으로 남한을 지배한 끝에 남한 사회에 내면화되어 버린 결과다. 감옥에 오래 갇혀 있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해 일찍부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남한에서 냉전의 표현은 '반공'이었다. 반공 풍조가 집단적 피해망상 수준에 이르는 데는 1950~53년간의 전쟁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쟁과 함께 냉전이 이례적으로 '열전'의 양상으로 나타난 사례인 한국전쟁은 남한의 반공주의를 비롯해 한국의 냉전체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바라볼 시점에서 미국이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것은 전쟁 후의 경제적 위기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불황과 혼란이 되풀이될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미국 외의 주요 산업국들이 모두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상황 때문에 이번 위기는 1차 대전 뒤보다도 더욱 극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종전 후 미국 정책에서는 경제 위기 회피가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막기는커녕 경기 부양을 위해 오히려 불러오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이젠하워가 거론한 '군산 복합체'를 그런 경향의 주체로 보기도 한다. 지속적 군비 확장을 필요로 하는 냉전체제가 미국 경제 구조에 유리한 것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소련에 대해 일찍부터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혁명 초기의 소련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비협조 정책을 취한 것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국, 독일 등 대부분 나라들은 1925년 이전에 소련의 존재를 승인했다. 유독 미국만이 1933년까지 버티다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들어서야 소련과 국교를 열었다.

초기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적대감은 경쟁의식에 상당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나라는 유럽의 변방에서 산업화를 늦게 시작했으나 방대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이 세워질 때는 1차 대전으로 유럽 선진국들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두 나라의 잠재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시점이었다. 2차 대전으로 유럽이 초토화된 상황은 두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나설 기회였다. 강력한 경쟁국 소련이 스탈린의 호전적 팽창주의를 앞세우고 나오는 데 미국인들은 위구심을 느꼈다.

"소련이 걸어온 길이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델이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 소련은 승리감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 승리감은 오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얻은 것이었기에 더욱 빛나는 것이었다. 혁명 전의 러시아가 2류 국가였다면, 혁명 후 4년간의 내전을 겪은 뒤의 소련은 3류에도 못 낄 만신창이 국가가 되어 있었다. 최소한의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몇 해 동안 유화적인 신경제 정책을 쓰다가 결국 철권에 의거한 통제 경제가 돌파구로 떠올랐다. 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집권한 것이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그가 죽은 후 소련 지도부에게까지 비판받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지만, 경제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중공업에 치중한 산업 발전은 2차 대전에서 가치를 발휘했다. 전쟁은 스탈린체제의 어두운 면을 덮어주고 장점을 드러내줬다.

2000만 가까이로 추산되는 소련의 2차 대전 인명 피해는 다른 모든 나라 피해의 합계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런 피해를 딛고 소련은 나치 격파의 주역이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 침략에 이어 러시아가 두 번째로 유럽의 주축 세력을 이겨낸 영광의 승리였다.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썼다. 2차 대전 후 코민포름에서는 러시아어가 공용어가 된다. 러시아 같은 후진국에서 첫 공산국가가 나타난 것을 하나의 우연으로 여기고 공산주의 중심지로 인정하지 않던 상황이 이제 바뀐 것이었다. 소련이 걸어온 길이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강력한 모델이 되었다.

스탈린이 승전의 여세를 몰아 공산권 확대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 보아 모험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코민포름 이탈을 강경한 행동으로 막지 못하고 대신 다른 동구권 국가들이 동조하지 못하도록 숙청을 가하는 데 그쳤다. 산토끼 잡는 데보다 집토끼 지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처리를 둘러싼 서방과의 대결에서도 그의 행동은 시위 수준의 베를린 봉쇄에 그쳤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스탈린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산정권 수립을 불과 반년 앞둔 1949년 4월 남경에서 광동으로 후퇴하는 국민당 정권에 동행한 유일한 외국 외교관이 소련 대사였다. 자생력 있는 또 하나 거대한 공산국가의 등장은 소련과 스탈린에게 꼭 반가운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 무렵까지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란에서, 그리스와 터키에서, 독일에서, 소련의 양보가 이어졌다. 한국에서의 도발은 당시 상황에서 이례적인 것이었다. 1949년 원자탄 개발로 얻은 자신감 덕분에 외곽 지역에서 시험적 도발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진영이면서도 애매한 관계에 있던 중국을 앞세우는 전략이 또한 이 도발을 가능하게 했다.

"이승만 정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1948년 한국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은 전쟁을 바랄 만한 동기를 피차 얼마만큼씩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종주국 내지 후원국인 미국과 소련의 집중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속셈이 있었다. 그리고 정권에 대한 경쟁 세력을 숙청하여 체제 확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전쟁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체제 확립은 소련과 스탈린의 모델을 따랐다.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 좌익의 큰 줄기들을 꺾고 김일성 한 사람에게 권력과 권위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당의 통제력을 중심으로 긴장된 사회체제를 구축했다.

남한에서는 건국 전후부터 도태되기 시작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전쟁 동안 거의 박멸 상태에 이르렀다. 전쟁 후에도 미진한 박멸 작업이 '반공'이란 간판 밑에 계속되었다. 이승만 체제에 대한 일체의 도전자들이 '빨갱이'로 몰렸다. 1958년 조봉암의 처형으로 정치계의 박멸 작업이 완료되었고, 이승만의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이념성 없는 정당만이 야당으로 존속이 허용되었다.

1960년 학생의거로 이승만이 축출되었다. 남한에서는 이 사건을 '혁명'으로 받드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축출 자체를 혁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승만의 퇴임 결정 자리에 함께 있던 것은 외무부장관(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자)에 막 임명된 허정과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그리고 미국 대사 매카나기였다. 이승만이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군부와 미국의 대표들이 그의 퇴임을 방관하거나 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이용 대상일 뿐이었다. 한국 통제라는 미국의 목적에 능률적으로 공헌하는 데 그의 가치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수준 낮은 독재정치는 미국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념 없는 정치는 능률로 평가받을 뿐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 같은 자생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축출은 혁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정변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 3개월간의 허정 정부만이 아니라 1년에 못 미친 민주당 정권도 과도정부의 성격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4·19 학생의거는 허울만의 해방 이후 억압과 공포에만 짓눌려 있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려준 계기로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 과도기에 냉전체제 거부 움직임이 남한 사회에 나타났으나 현실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한국군 수뇌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년가량의 과도기를 거쳐 이승만 정권의 뒤를 이은 것은 군사 독재였다. 군사 독재는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이 원하는 남한의 역할을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20여 년간 이끌었다.

박정희 집단의 쿠데타 음모는 4·19 무렵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군은 6·25전쟁을 계기로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50년대를 통해 군부는 남한 최대의 재력과 인력을 갖춘 조직이 되었으나 이승만 체제 아래서는 독자적 세력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미국의 신임을 잃자 이승만의 권력을 대신할 여건이 된 것이다.

한국군 수뇌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군부를 한국 통제의 가장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면서 미국식 지휘부를 양성하려 노력했지만 장군들 중에는 일본식 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군부가 정치 전면에 나서는 행태부터가 1930년대 일본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에 의존하면서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1961~1987년간의 남한 정권을 모두 '군사정권'이라 칭한다. 대부분 형식상으로는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구성된 기간이다. 그러나 선거가 선거다운 선거가 못되었고, 군 통제력이 선거보다 중요한 정권의 근거였다고 보기 때문에 군사정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군사정권은 실력을 갖춘 조직인 군부를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보다 안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이승만 정권에 비해 냉전체제 속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경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발전도 보다 능동적인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나름대로 주체성이 있는 정권이기도 했다. 정권 안보를 위해 국권을 훼손시킨 일도 더러 있었고 국가를 봉사의 대상보다 이용의 대상으로 여긴 경향도 있었지만, 자기 나라로 생각하고 그 발전을 도모한 것이 정권의 기조였다. 억압체제를 대미 종속 관계가 아닌 국내 문제로 보는 시민계층의 인식은 이 시기 민주화운동 성장의 배경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이라는 전체주의 노선으로 대응했다"

남한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미국의 영향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남한에 작용했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들어와 시민계층의 정신적 성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전 등 반공 투쟁에 대한 남한의 현실적 공헌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독재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는 남한 정권이 <타임>, <뉴스위크> 등 미국의 주류 정기 간행물 배포를 통제하는 기현상이 펼쳐지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남한 정권의 절대적 종속 상태가 계속된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 정권은 소련과 중국, 두 후원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주체사상을 키워냈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불안하게 되었다가 1950년대 후반 극한 대립에 이르렀다. 북한은 소련에 주로 의지하던 상태에서 중국 쪽으로 서서히 무게를 옮기다가 1966년 주체사상을 선포했다. 주체사상의 출발점은 어느 한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독자 노선에 있었다.

북한의 독자 노선은 남한에 대한 전면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당시의 북한은 정권의 정통성과 이념성, 그리고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모두 남한보다 우월한 상태였다. 청와대 습격 시도,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 지역 무장대 투입 등 1960년대 말의 대공세는 이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한 인민의 이목을 가리고 있는 독재체제의 통제를 깨뜨리기만 하면 남한 인민도 북한 체제를 선택하리라는 믿음이었다.

독재에 대한 시민계층의 점증하는 반발과 북한의 공세 사이에 끼인 박정희 정권은 유신이라는 전체주의 노선으로 대응했다. 종래의 독재와도 차원이 다른 극약처방이었다. 반공전선에서 남한의 이탈을 꺼려 부득이 지원을 계속해 온 미국과의 관계에도 긴장이 늘어났다. 극약의 약효는 6년 만에 터져 유신체제가 내부붕괴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의 뼈대는 무너졌지만 그 약발은 8년간 더 계속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안팎의 조건이 합쳐져 이뤄진 것이었다. 안으로는 유신체제 붕괴 이후 민주화운동이 상당한 성숙단계에 이르렀고, 밖으로는 고르바초프 등장으로 미소 대결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었다.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이 남한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냉전체제 탈피 과정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 후 공산권 붕괴를 이어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각자 종래의 적성국들과도 수교를 맺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를 남한에서는 순조롭게 받아들인 데 반해 북한이 얼른 소화하지 못해서 해빙이 안 된 채로 21세기를 맞게 된다. 미국의 적대정책도 이 사태의 한 이유였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의 경직된 1인 독재체제였다. 결정적 전환점이 될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1994년 7월 김일성의 죽음으로 체제 정비가 바쁘게 된 북한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한 차례 기회를 잃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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