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타운 지역에서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재개발 이득을 한 푼이라도 더 취하려는 조합원과 이주비를 더 받아야 하는 세입자 간의 싸움이다.
보상과 관련된 애매모호한 법 조항이 원인이다. 하지만 관련 부처에서는 지역 주민간 갈등은 무시하면서 개발 사업 밀어붙이기에 여념이 없다. 이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것은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세입자들이다.
주거이전비는 세입자의 권리인데…
지난 21일 성동구청 앞에서는 왕십리 뉴타운 지정지구 1, 3구역 세입자 수십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세입자들은 "토지보상법에 명시된 세입자 권리가 침해당하고 있는데도 구청이 수수방관하고 있다"며 구청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세입자들은 "조합은 멀쩡하게 명시된 법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그런데도 구청은 조합 편만 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합과 세입자의 갈등은 뉴타운 개발지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리처분인가가 나 곧 철거에 들어갈 북가좌 가재울 3, 4구역에서도 조합과 세입자의 갈등이 커지고 있다.
이곳에서 4년 째 살아왔다는 세입자 김일구(가명) 씨는 22일 "신고기간이 작년이었는데 일이 바빠 실수로 세입자 신고를 못 했다. 그런데 조합에서는 당시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거이전비를 주지 않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4개월분의 주거이전비는 '공익사업을위한토지등의취득및보상에관한법률(토지보상법)' 시행규칙 제54조 2항에 명시된 세입자의 권리며 청구권이다. 신청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보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악의적 행정조치다.
조합은 그런 일이 없다는 입장이다. 3구역 조합장 태화엽 씨는 "하자가 없는 세입자는 모두 구제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고 우기는 세입자는 대부분 기준일 3개월 요건을 채우지 않았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가재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뉴타운 개발지역 곳곳에서 이와 같은 마찰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의 이원호 조직국장은 "세입자들이 특히 많은 왕십리, 서대문, 용산 등에서는 세입자들이 뭉쳐 법 준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다. 조만간 이들이 공동으로 대응할 계획도 있다"고 말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이런 일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보상 대상 세입자를 정하는 기준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조합은 주거이전비를 받을 수 있는 세입자의 자격을 정비구역지정 공람 3개월 이전 거주자로 보는 반면, 세입자와 관련 시민단체는 사업시행인가 3개월 이전 거주자도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공람일이 지나 세입자 지위를 신청하는 이와 조합 간에 끊임 없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관리처분인가는 조합이 사업시행인가 승인을 받은 후 이주·철거 단계에서 조합원과 세입자에게 관련 보상이 이뤄지는 절차다. 이 단계가 끝나면 곧바로 재개발 구역은 철거에 들어간다. 반면 정비구역지정 공람은 민간개발 주체인 조합이 관계기관의 인가를 받고 개발 구역을 설정하는 등의 작업이 이뤄지는 기초 단계다.
세입자 자격 결정의 법적 근거는 재개발의 근간 법인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이다. 그런데 도정법은 민간 개발에 적용되는 법으로 손실보상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도정법은 제37조에서 "토지보상법을 준용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세입자에 대한 주요 보상 근거는 토지보상법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게 토지보상법 시행규칙 제54조 2항이다. 이에 따르면 "(중략) 공익사업의 시행으로 인해 이주하게 되는 주거용 건축물의 세입자로서 사업인정고시일 등 당시 또는 공익사업을 위한 관계법령에 의한 고시 등이 있은 당시 당해 공익사업시행지구 안에서 3월 이상 거주한 자에 대하여는 가구원수에 따라 4개월분의 주거이전비를 보상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사업인정고시는 도정법 상 사업시행인가로 해석된다. 또 관계법령에 의한 고시는 정비구역지정 공람일로 해석 가능하다. 이는 정부 관계자와 학계 모두 이견이 없는 사항이다.
따라서 토지보상법 제54조 2항은 세입자의 자격을 '사업시행인가일 또는 정비구역지정 공람일 당시 재개발 지역 안에서 3개월 이상 거주한 자'로 해석할 수 있다.
조합원과 국토해양부는 이 법이 세입자의 자격을 사실상 정비구역지정 공람일 이전에 살던 사람으로 규정했다고 주장한다. 정비구역지정 공람일이 지나고 사업시행인가 3개월 전에 이주한 사람에게는 거주이전비를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국토해양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관련 구역 재개발 공람이 나면서 이미 그곳이 철거될 지역임이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를 뻔히 보고 들어온 사람에게까지 거주이전비를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사업 시행이 불투명한 시점이던 공람공고일 3개월 이전 거주자로 한정하는 게 맞다. 이는 예전부터 유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법령 그대로 해석을 하자면 문제가 있다. 법에는 분명 '또는'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람공고일 이전 3개월 이상 거주자나 사업시행 인가일 이전 3개월 이상 거주자 모두 주거이전비를 받아야 한다.
백준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는 "이는 논란거리도 아니다. 둘 중 한 조건만 만족하면 세입자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관계 부처에서 자의적으로 '또는' 이란 구절을 '그리고'로 해석해버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며 "분명 법령을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법의 빈틈 이용해 불로소득 챙기려는 조합원
문제는 또 있다. 작년 4월 12일 토지보상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옛 법규를 따라야 하느냐 새 법규를 따라야 하느냐를 두고 세입자와 조합의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이전 시행규칙에 따르면 조합은 세입자에게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3개월분 주거이전비 둘 중 하나만 보상하면 됐다. 그러나 새 법에 따라 둘 모두를 지급할 의무를 지게 됐다. 주거이전비 보상 기간도 4개월분으로 늘어났다.
왕십리나 가재울의 사례처럼 조합원이 세입자를 속이는 일이 늘고 있는 이유도 조합의 부담이 과거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양자간 권력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조합원이 세세한 법 규정을 잘 모르는 세입자를 속이고 미리 쫓아내는 것이다.
백 교수는 "재개발 덕분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가옥주들이 지역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세입자 혜택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하고 있다"며 "개발사업에 따른 혜택이 탐욕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무부처는 명확한 의견을 내놓지 않아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국토해양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보상 계획에 대해서는 현재 어떤 법을 적용하는 것이 맞느냐를 두고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원호 조직국장은 "작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부칙에 신법이 적용된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조합이 일간지에 공고를 싣는 등 해야 할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채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법대로 하라"는 세입자, "법이 잘못됐다"는 정부
현재 세입자와 조합원의 갈등 양상에서 특이한 점은 세입자가 "법대로"를 외치는 것이다. 과거 무차별적 도시 개발 과정에서 정부가 "법대로"를 외치며 지역 거주민을 내쫓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관련 부처에서는 "법이 잘못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조직국장은 "작년에 바뀐 법안을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 법이 다시 개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고 했다.
백 교수는 "사회가 변화하면서 법안도 새 시대 흐름에 맞게 바뀌었다. 그런데 정작 행정기관이 오히려 시대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며 "여전히 행정기관의 사고방식은 80년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고 씁쓸해했다.
백 교수는 근본적으로는 누더기식 재개발 관련법을 손질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개발관련법이 수십 가지로 나뉘어져 뉴타운 사업과 같이 복잡한 성격을 가지는 사업에 대해서는 담당 공무원도 법을 잘 모른다. 공공개발에 적용되는 토지보상법의 경우 주택 관계자가 아닌 녹지과 등에서 다루는 게 현실"이라며 "새 시대 상황에 맞게 어느 정도는 관련 법의 통합 내지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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