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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없는 교육정책, '어륀지' 소동 반복된다"

[이명박 정부 100일 토론회] "'학교 다양화' 정책은 서열화만 낳을 뿐"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뜨겁다. 이런 현상을 단지 광우병 위험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인수위 시절, 무리하게 영어몰입교육을 밀어붙일 때부터 이미 예고됐던 일이다. 당선자 신분이었던 이 대통령은 기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실용영어' 시범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영문 해석조차 엉뚱하게 했던 현 정부 당국자들의 모습과 겹치면서 우스꽝스러운 기억으로 남게 됐다.

'경제 활동 인력 양성'만이 교육의 목적?

교육 전문가들은 인수위가 추진했던 영어 몰입교육에서 현 정부가 취할 교육정책의 실체를 봤다고 말한다. "국민이 영어를 잘하면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하더라"는 근거가 모호한 믿음 앞에서 "영어를 왜 배워야하는가"라는 성찰은 설 자리가 없었던 상황. 이런 상황의 얼개가 바뀌지 않는 한, '영어 몰입교육'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희극적인 장면은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만, 앞서의 얼개에서 '영어'의 자리에 다른 게 들어갈 뿐이라는 것.

이런 지적은 "현 정부는 교육에 대한 '철학'이 없다"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얼핏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래서 조금 더 구체적인 언어로 옮기면, 교육을 '경제활동을 위한 인력 공급'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실제 교육 활동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동의된 내용이 아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교사, 교육학자라 할지라도 "'경제 활동 인력 양성'만이 교육의 목적이다"라고 여기는 경우는 없다.

이런 괴리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은 영어 몰입교육을 추진하던 당시의 희극적인 모습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는 현 정부가 꾀하는 '국가경쟁력에 보탬이 되는 인재 양성'조차 불가능하다. 인수위 시절, '오렌지'를 미국인의 발음에 가깝도록 '어륀지'라고 적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미국과 중요한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는 영어 해석조차 제대로 못했던 현 정부의 사례는 이런 점에서도 시사적이다.

"누구를 위한 '자율'과 '선택'인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프레시안이 "이명박 정부 100일,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 참가한 이들의 생각이 그랬다. '교육정책'에 대한 토론이 이뤄진 29일 오후, 경실련 강당에 모인 이들의 성향은 다양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교육정책에 어떤 '철학'이 녹아 있는지 알기 힘들다"라는 생각은 비슷했다.

발제를 맡은 영남대 김재춘 교수는 △영어교육정책, △자율형사립고를 대거 신설한다는 내용이 담긴 '고교 다양화 300' 정책, △대학에 학생선발권을 단계적으로 넘기는 내용이 담긴 '대입자율화 3단계' 정책, △학교 자율화 및 정보 공시제 등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대표적인 교육정책들을 조목조목 분석했다. (☞발제문 전문 보기)

김 교수는 발제문에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실용성의 포장에도 불구하고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와 밀착된 특정 용어와 가치만을 지나치게 많이 반복적으로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그가 꼽은 것은 '자율', '선택', '경쟁', '책무' 등이다. 또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가치로 그가 꼽은 것은 '수월성', '경쟁력' 등이다.

그리고 이런 단어와 가치는 중립적인 게 아니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교육 엘리트층에게 유리한 정책을 포장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와 가치라는 것. 따라서 교육이 이런 이해 관계와 무관하게 추구해야 할 가치에 해당하는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지적이다.
▲ ⓒ프레시안

수단과 목표가 뒤바뀐 정책…"서로 협동하는 경험이 과연 낭비인가?"

이어진 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자율, 선택, 경쟁, 책무만을 강조할 뿐, 학교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패러다임에서는 무엇을 위한 자율이고 선택이며, 무엇을 위한 경쟁이고 책무인가가 불분명해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교육의 국가경쟁력을 기르기 위하여 자율, 선택, 경쟁, 책무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인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경제의 수단으로 전락하여도 문제가 없단 말인가? 학생들이 학교에서 다양한 학습/배움 활동을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낭비에 불과한 것인가?

이명박 정부는 학교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교육과정의 기본 질문에 대해 좀더 충실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자율, 선택, 경쟁, 책무는 학교 교육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교육이 추구해야 할 목표와 수단을 맞바꿨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목적과 이유를 모르는 채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

"'학교의 다양화' 아닌 '교육의 다양화'가 답이다"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쟁을 강요하는 정책은 주로 '자율'과 '선택'이라는 단어로 뒷받침된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는 이제까지의 학교 교육이 지나치게 획일적이었다는 지적을 통해 힘을 얻었다. 하지만 획일적인 교육에 대한 거부가 반드시 경쟁의 강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의 자율적 선택권을 확대하되,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 관련 기사 : "획일적인 교육통제 반대가 꼭 평준화 해체론은 아니다")

김 교수의 대답은 이렇다.

"현 정부의 공약대로 자율형사립고가 대거 신설될 경우, 고교 입시 경쟁이 지금보다 가열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정부는 이런 정책을 통해 학교 교육이 보다 다양해지고, 학생들의 선택권이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육의 '다양성'은 '수평적 다양화'일 때,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 정부가 주장하는 '다양성'은 학생들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수평적 다양화'라기보다, '수직적 서열화'에 가깝다. 이런 서열화가 학생들을 더 치열한 경쟁으로 내몬다는 것 역시 당연하다.

'서열화 없는 다양성'을 보장하려면, '학교의 다양화'가 아닌 '교육의 다양화'를 추구해야 한다. 출신 학교가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의 다양화'가 필연적으로 '학교의 서열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출신 학교에 따른 '교육적 카스트'로 작용한다.

학교를 다양화할 게 아니라, 학교 안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다양화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는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경쟁만 경험한 학생은 기업에서 일도 못한다"

'학교의 다양화'가 아닌 '교육의 다양화'를 추구한 모델로 흔히 꼽히는 게 핀란드의 교육제도다. 핀란드에서는 출신 학교로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가 거의 없다. 그래서 입시 경쟁 역시 매우 느슨하다. 평준화 체제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학생들은 자신의 적성에 따라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각기 다른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관련 기사: 국제학력평가 1위, 핀란드의 비결은?)

게다가 핀란드는 정보통신 등 지식산업에서 매우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꼽을 때도 늘 상위권이다. 경쟁을 강요하지 않는데, 경쟁력이 높다. 얼핏 모순처럼 보인다. 특히 현 정부 관계자들에게는 더 그렇게 비칠 게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개인과 개인의 무한경쟁만 경험한다면, 사회에 나와서 서로 협동하며 일하는 법을 배우기 어렵다. 그런데 기업과 공공조직이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협동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다.

학교에서 개인 간의 경쟁만 경험한 이들이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은 낮다. 경쟁만 강요하는 교육이 오히려 기업과 정부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과연 다른가? 얼마나 다른가?"

이날 토론회는 김재춘 교수의 발제에 이어 이명균 한국교총 정책개발연구실장, 한만중 전교조 정책실장, 송환웅 참교육학부모회 언론정보출판위원장, 이윤미 홍익대 교육학과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가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토론문을 제출했으나, 토론회 당일에는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김재춘 교수, 한만중 실장, 송환웅 위원장, 이윤미 교수가 대체로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육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현 상황에서 추진하는 학교 다양화 정책은 필연적으로 '학교 서열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홍후조 교수는 "현 상태에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평가하기에는 이르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또 이명박 정부 역시 교육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에 무관심한 게 아닌데, 오해가 많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홍 교수 역시 교육소외계층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명균 실장은 '학교의 다양화' 정책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학생 선발 방식의 다양화 등 세부적인 정책을 잘 마련하면, 김 교수 등이 우려하는 부작용도 피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실장 역시 "교육이 경제 성장을 위한 도구로 취급되서는 안 된다", "개인 간의 무한 경쟁을 장려하는 방향은 교육적으로 매우 위험하다"라는 입장은 견고했다.

한만중 실장, 송환웅 위원장, 이윤미 교수 등은 김 교수의 발제 내용에 대체로 공감했다. 다만 이들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이 새로운 게 아니라는 지적을 공통적으로 곁들였다. 노무현 정부에서 검토 중이었거나 이미 추진하고 있었던 정책을 현 정부가 이어받은 것에 가깝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가 발제문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취한 교육정책은 (현 정부와 달리) 중도 좌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라고 규정한 것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이 나온 이후, 한국 교육정책의 기조는 바뀐 적이 없다. 다만 완급의 조절만 있었을 뿐이다"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관련 기사: 이명박식 '교육자율화', 부메랑은 시간문제)

5.31 교육개혁안은 한국 교육에 '수요자 중심' 원리를 대폭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방안을 작성한 실무 책임자가 이주호 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이다. 교육계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실제로 입안하고 추진하는 것은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아니라 이주호 수석이다"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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