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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자란 입양인이 왜 한국을 그리워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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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스웨덴에서 자란 입양인이 왜 한국을 그리워하죠?"

[기고] "다민족 사회 한국, 국제입양에 열린 태도 가져야"

한국인들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 못지않게 외부에서 한국인들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듯하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미녀들의 수다'도 한국에 체류 중인 소위 '미녀'들의 입을 통해 우리 안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의 투영으로 보인다.

"한국, 아이들을 스웨덴으로 보내는 나라"

필자가 스웨덴에서 머물렀을 때 만난 스웨덴 인들에게 비친 한국의 이미지는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첫 번째 느낀 것은 한국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였다. 남한과 북한을 구분하지 못한 채 뭉뚱그려 'Korea'로 생각하거나, 독재정권이 무자비하게 시민을 학정으로 몰아붙이며 인재(人災)가 끊이지 않는 위험한 나라로 여기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국'을 떠올릴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웨덴에 입양을 대거 보내는 나라'라는 점인듯 했다.

한국인들이 선진국들의 모임이라할 수 있는 OECD에 가입한 윤택한 국가로서 88서울올림픽과 한일월드컵을 개최한 부강한 이미지로 인지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 달리, 스웨덴 생활 중 맞닥뜨린 한국에 대한 현지 인식은 그 기대와 현저히 동떨어진 듯 보였다.

입양 아동 인권 보호 위한 헤이그 조약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대학에서 한국 출신의 입양인 토비아스 휘비네트(Tobias Hübinette)가 <고아를 만든 나라를 위안하기; 한국 대중문화에 비춰진 국제입양과 입양된 한국인에 대한 재현상(Comforting an Orphaned Nation; Representations of International Adoption and Adopted Koreans in Korean Popular Culture)>을 출간했다.

또한, 같은 해 '스웨덴 국제입양 당국'(MIA; The Swedish Intercountry Adoptions Authority)에서 국제입양에 관한 여러 보고서를 영문판으로 발행했다.

일단 후자의 보고서부터 살펴보면, 스웨덴은 전 세계에서 국제입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국가들 중 하나다. 매년 전 세계 각지에서 1000여명가량의 해외입양을 수용한 역사를 거듭해 와서,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최소 45000여명 이상의 국제입양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오늘날 장기밀매나 성적학대 등의 범죄적 이유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방식으로 해외입양을 하지 않는 결과 발생하는 아동들의 극심한 인권유린을 방지하기 위해 1993년 채택된 '헤이그 조약'에 스웨덴은 즉시 가입하였다.

스웨덴이 국내외 입양을 다룰 때 가장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점은, 입양되는 아동들의 이해관계이다. 헤이그 조약에서는 ①어느 누구도 경제적인 이윤을 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양을 다루어서는 안 되며, ②극히 제안적인 실비만을 집행해서 입양을 집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입양에 익숙한 문화, 탄탄한 복지 때문에 가능

또한, 해외입양을 받아들이는 국가들은 입양을 보내는 국가들의 아동복지를 강화하는 데 공조해야 한다는 책임도 동시에 부여하고 있다. 스웨덴 정부는 1997년에 스웨덴 법조항에 헤이그 조약의 내용을 삽입하였다. 이를 통해 국가가 책임감 있게 입양문제를 관리함으로써 아동들이 박해받지 않도록 꾀한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입양을 희망할 경우, ① 최소 25세 이상의 나이, ②입양될 아이의 생부모가 입양에 동의해야 하며, ③부부 모두 입양에 합의해야 하며, 동성부부나 독신가구도 기준에 합당할 경우 입양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스웨덴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의 입양 희망자들은 나이가 어린 건강한 아이를 입양하기를 바라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입양을 원하는 수요자들에 비해, 입양할 수 있는 아동들이 부족해서 몇 년 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한, 일단 입양이 완료되면 어떠한 경우에도 입양을 번복할 수 없게 돼 있어서, 또 다시 아동들이 버려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아동을 기르는 것이 든든한 복지로 뒷받침된다. 입양을 택한 양부모는 입양된 아기가 아플 때 병가를 낼 수 있으며, 아기를 보살피기 위해 합법적으로 유급 출산휴가를 낼 수도 있다.

또한, 아이가 국공립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모든 학비가 지원되며, 아이가 만16세가 될 때까지 양육보조금이 지원된다. 스웨덴은 아이를 기르는 것을 미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한 국가책무로 바라보기에, 입양아를 포함한 양육은 사회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일로 간주한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스웨덴 아동 가운데 1%가 해외입양아다. 스웨덴 사회에서 국제입양은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로 자리 잡았다.

국제 입양인들이 겪는 어려움…외모와 언어의 차이

스웨덴에서는 해외입양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보고서가 끊임없이 발표되고 있다. 스웨덴에서 행해진 국제입양에 관한 연구 작업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과거에는 해외에서 입양된 아동들의 건강이나 발육에 관련된 연구논문이 활발하게 발표돼 왔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비가시적인 면들인 적응문제나 행복지수 등에 관한 논문이 자주 발표되고 있다.

스웨덴의 입양문제 전문가인 마리안네 세데르블라드 교수(Marianne Cederblad)는 입양인들 중 대다수는 심각한 문제를 겪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도, 각종 질병과 소아정신과 진료에서 입양되지 않은 아동들에 비해 2~3배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세데르블라드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구조적인 원인들로, 입양되기 전 출생국가에서 겪은 각종 학대와 영양실조, 방치, 감정폭력 등이 입양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미카엘 보만(Mikael Bohman) 등은 북유럽을 중심으로 입양된 사람들의 삶을 조사한 결과, 이들이 입양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열악한 계급이 된다는 점을 보고했다. 북유럽에 입양된 사람들 역시 공통적으로 적응문제를 호소했는데, 학교에서 독서와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많았다.

한국과 인도 출신의 입양인들의 건강상태와 학업성적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 원인으로는 이들 대부분이 1살 이내에 입양되며 한국처럼 입양 전 고아원이 아닌 위탁보육을 거치다 입양된 점이 꼽혔다.

노르웨이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입양아들은 현지에서 태어난 아동들과 다른 외모로 인해 차별을 당한 경향이 많다고 보고했다. 특히 이러한 괴롭힘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어려움은 입양인들이 좋은 학교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정체성을 찾는 문제에서, 특히 다른 인종 간에 구성된 가구 출신이 입양인들은 정체성을 향한 동경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러한 바람에 대해서 양부모들이 열린 자세로 임하는 것이 입양아들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국제 입양에 열린 태도가 세계적 추세

입양은 지구촌에서 아주 오래도록 행해져왔다. 하지만 입양은 전통적으로 늘 보이지 않는 측면이 강해서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행해졌지만, 오늘날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좀 더 열린 자세에서 입양을 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20세기 이후 이루어진 대규모 국제입양은 한국전쟁 이후 15,000여명의 한국인 고아들이 미군들에게 입양돼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 대표적이다. 스웨덴에서 1980년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스웨덴에서 이루어진 국제입양은 주로 스웨덴과 한국, 콜롬비아, 인도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과 1991년 사이에는 러시아로부터 입양이 늘었으며, 1995년 이후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베트남, 한국, 콜롬비아 출신의 입양이 증가했다.

한편, 입양을 널리 받아들이는 대표적인 국가들로는, 미국을 선두로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캐나다 등이 대표적이며, 1998년 이후 인구수와 비례했을 때 노르웨이와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가 대표적인 나라들로 손꼽히고 있다.

왜 '입양인'이 아니라 '입양아' 인가?

그런데 이제까지 소개한 논의와 사뭇 다른 시각으로 쓰여진 논문도 있다. 토비아스 휘비네트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휘비네트는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문화연구적인 방법론으로 입양문제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입양아'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사용되지만, 이미 저자처럼 성인이 된 입양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을 도외시할 때가 있다.

저자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해외입양이라는 문제는 트라우마를 자극하며, 이는 한국인 특유의 민족주의와 결부돼 있다고 보고 있다.

오랜 기간 단일민족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믿는 한국인 특유의 '상상의 공동체'에서, 후진적인 사회복지로 인해 전 세계 곳곳에 입양된 한국인 후예들의 삶은 한국인에게 멍에와 같다는 것이다.

'해외입양인'은 끊임없이 주변국들로부터 수탈당하며 식민지 상태를 지속해온 한국으로서, 전 세계 각지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떠올리게끔 만든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동포를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감은 끈질기게 한국인들의 의식을 사로잡아서 해외입양에 관한 여러 담론을 숱하게 쏟아낸다고 본 것이다. 또한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거쳐 나름대로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고 자평하며 만들어가는 자부심 속에서, 세계 방방곡곡의 입양인들은 끈질기게 따라붙는 스티그마(낙인)와 같다는 것이다.

"왜 한국 출신 입양인의 삶을 나쁘게만 묘사하나?"

이러한 시각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해외입양을 둘러싸고, 바라보고 싶은 것들만 바라보게 되는 동어반복으로 이어지면서, 입양인들은 이내 스피박이 말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하위주체'가 된다고 본 것이다. 입양인들의 다채로운 삶을 보려는 노력보다, 바라보고 싶은 욕망으로 재현된 '입양아'들은 한국의 다양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연속극, 대중가요 등으로 활발하게 재현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인 특성으로 재현되는데, 천편일률적으로 해외에 입양된 뒤 현지에서 인종차별과 놀림, 심술궂은 양부모에 의한 차별과 학대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사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 입양인들을 그리는 우리의 관점은 저토록 일방적일 만큼 부정적일까.

서양에서 국제입양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197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혁명을 거친 유럽에서는 인종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혁파, 제3세계와의 연대 등이 화두를 이루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수준이 눈에 띄게 향상되고 출산율이 급감하면서 해외입양은 활기를 띠게 된다. 특히 적잖은 이들은 흰 피부를 가진 비장애인만을 입양하려는 것보다, 장애를 가진 유색인종 아이들을 입양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다민족 사회에서 국제 입양은 자연스럽다"

오늘날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 입양인들의 삶의 편차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이 살게 되는 일상의 행복도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 역사가 한국만큼 두드러지지 않은 데다, 이미 다민족사회에 접어든 스웨덴에서 입양은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각인되고 있다.

스웨덴 인의 관점으로 보면, 대부분의 생애를 스웨덴에서 경험한 입양인들이 입양 전 잠깐 살았던 유아기의 기억으로 출생국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면이다.

또한, 이미 다민족사회에 살고 있으며 전 인구의 상당수가 이민자들로 채워진 스웨덴에서 유색인종이라는 존재는 한국 사회만큼 치명적인 차이로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러한 현상에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여성의 눈으로 보자"

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입양인 중의 하나인 스웨덴 인 수잔 브링크(Susanne Brink)의 삶을 재현한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분석하면서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 영화의 오프닝신은 자신을 버린 친부모의 불행을 강렬하게 바라며 살의에 가득 찬 복수심에 가득 찬 내레이션을 던지는 한 입양인의 진술로 시작된다. 이러한 도입부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한국 출신 입양인들의 삶이 한국 밖에서 고질적인 인종차별과 이기적이고 사악한 양부모들에 의해 불행으로 점철될 것을 확인하며 영화에 몰입한다. 수잔 브링크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은 이러한 기대심리에서 별반 이탈하지 않는다.

수잔 브링크의 친모는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아이를 입양 보내지만, 입양당국은 공항에서 아이의 입양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요구를 완력으로 제지하며 결국 수잔을 스웨덴으로 보낸다. 수잔은 이윽고 사춘기가 된 이후 양어머니가 양부와의 사이를 의심하는 질투와 동생과의 차별대우로 수난을 겪다 끝내 자살시도를 하게 된다. 수잔 브링크의 불행한 삶은 그녀를 더욱 퇴폐적인 성생활로 이끄는 요인들로 그려지는데, 이러한 수잔의 '방종한 삶'은 그녀가 조숙한 나이에 미혼모가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고독에 널브러진 수잔은 한국이라는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기울이며 한 한국인 선원으로부터 '아리랑'을 배우며 한국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것이 수잔 브링크의 불행한 삶에 관심을 가진 한 한국인 남성 언론인에 의해 수잔 브링크는 비로소 말할 기회를 얻으며 그녀의 뿌리를 회복하게 되는 설정으로 그려진다.

"국제 입양인을 보는 시각, '가부장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저자의 관점으로, 이 영화는 한국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인습적인 서양에 대한 옥시덴탈리즘(서양의 고정관념에 맞춰 동양을 해석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구를 이루는 표현. 동양의 고정관념에 맞춰 서구 문화를 해석하는 태도를 뜻한다)이 투영된 작품이다.

서구는 섹슈얼리티가 도처에 널려 있는 환락과 퇴폐의 장소로서 궁극적으로 동양인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적대적인 타자로 설정된 것이다. 즉,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수잔이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파괴되지 않았을 성싶은 그녀의 처녀성이 서구의 퇴폐주의와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훼손되면서 착취당하고, 이렇게 피폐한 삶을 살게 된 수잔의 영혼은 남성의 개입으로 해결되며, 다시금 가부장적인 질서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한국인들이 종국에 확인하고 싶은 가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실상 '수잔 브링크'의 삶은 고유명사 되지 않은 채 전형성이라는 미명 하에 보통명사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영화가 한국에서 화제가 되는 것도, 한국적인 민족주의와 국적이나 생물학적 혈연 관계로 구성된 가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집요한 관념과 관련된다고 본 것이다. 휘비네트는 국내외 입양을 다룬 대부분의 한국의 대중문화가 천편일률적으로 입양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재현양상은 한국인들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다.

국제입양, 긍정적인 면도 많다

이미 국제입양은 전 세계적인 문화가 되고 있다. 국제입양에 관한 일방적인 비판이나 찬성 모두 가당치 않은 의견이다. 실제로 스웨덴 국제입양 당국의 또 다른 보고서인 "특별한 아동들을 위한 특별한 부모(Special Parents for Special Children(2007) Socialstyrelsen; The National Board of Health and Welfare, Special parents for special children, Stockholm ; Swedish Intercountry Adoption Authority, 2007.)"에 따르면, 어느 아동들에 비해 국제입양이 필요할 것 같은 빈민국가의 거리의 아이들은, 이들의 입양을 도와줄 기관이 부재하거나, 생부모가 입양을 허용하지 않아서 비참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고 알렸다. 또한, 빈민국가에서 에이즈를 비롯한 치명적인 질병을 앓거나, 성적학대를 겪은 아동들에게 국제입양은 희망이 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인들이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던 간에 한국은 여전히 스웨덴을 비롯한 전 세계에 입양을 대거 보내는 국가들 중의 으뜸이다. 오늘날 해외입양을 다룬 논문에서 '한국'은 결코 누락되지 않은 국가로 굳혀졌다. 스웨덴 국제입양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2001년부터 2006년 사이, 모두 653명이 스웨덴에 입양됨으로써 매년 약 109명이 입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수치는 해외입양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의 2,182명에 뒤이어 2위에 육박하는 통계이다.
▲해외 입양 관련 포스터 및 사진 모음.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스웨덴에서도 국내 입양이 행해졌다. 미혼모가 낳은 아기나 자녀수가 지나치게 많은 가정이나 극단적으로 가난하거나 부모가 사망한 아동들은 입양되었다. 하지만 스웨덴은 누구나 아이를 쉽사리 기를 만큼 아동복지를 강화하고,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을 적잖게 떨어뜨렸으며, 아이양육을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짊어져야 할 공동의 일이라는 인식을 확산하면서 버려지는 아동들의 수가 급감했다. 이제 입양되는 대다수의 아동들은 스웨덴 인이 낳지 않은 스웨덴 밖의 아이들이다.

"'다인종 사회'에 접어든 한국, 선진국 되려면 '해외입양에 대한 인식 전환'부터"

이러한 아이들이 입양된 이후 겪게 되는 현실이 과연 입양되지 않은 현실에 비해서 낫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경제발전상황과 견주지 못할 만큼 열악한 사회복지제도와 미혼모와 입양아에 대한 편견이 깊숙한 한국의 현실에서 내부의 역량을 키우지 않은 채, 외면만 선진국을 닮아가려는 행태는 문제로 보인다.

또한, 다민족사회로 흐르고 있는 오늘날, 국제입양에 대한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같은 인종의 혈연으로 연결된 가정으로만 구성되던 가구가 이제는 눈에 띄게 다채로워지고 있다. 이제는 바야흐로 여러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양을 관용적으로 수용할 때이다. 이제 우리는 달라진 시대에 걸맞은 해외입양 담론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막연한 부채감으로 해외입양인을 바라보며 그들의 불행을 쉽사리 단정 짓거나, 뻔질나게 선진국 흉내를 내면서도 여전히 해외입양을 숱하게 보낸다는 비판 못지않게, 이제는 해외입양에 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해외입양인에게 '한국인' 규정, 강요 말자"

해외입양인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의 치명적인 복지제도의 누수나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 온존하고 있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결부돼 있다.

누구나 아이를 기를 권리를 향유하며, 그 권리를 지원할 제도가 뒷받침돼 있고, 다양한 형태의 가구(household)를 인정하며, 이른바 사회지도층부터 입양을 널리 실시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실현되고, 마지막으로 입양에 관해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매스미디어가 늘 때 차츰 해외입양의 문제는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나아가, 한국인은 이제 열린 마음으로 해외입양인과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소통을 준비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대화에서 선험적으로 해외입양인을 '한국인'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소통에 하등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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