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학교의 실제 여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학교에서 충실한 영어 교육이 이뤄지려면, 우선 해결되야 할 과제가 학급당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비판이다. 새로 들어설 정부가 급하고, 중요한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영어를 입시에서 빼자"고 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영어 점수가 학생의 수학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점, 불필요한 해외 체류와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점, 암기와 반복 훈련 위주의 입시 영어교육이 학생의 사고력과 감수성 발달을 가로막는다는 점 등이 이유다. 영어 점수를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다면, 영어교육을 둘러싸고 생겨난 다양한 낭비 요소를 줄일 수 있고 공교육 정상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종종 외면당했다. 다른 목소리가 너무 높아서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 교육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자리가 됐다. 이해 당사자마다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고 있어서, 정작 "나는 영어를 왜 배우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설 자리가 없었다. (☞ 관련 기사 : 영어 교육, '변방 엘리트'의 욕망부터 떨쳐내야)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영어교육은 길을 잃고 표류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영어만 잘 하면 된다", "영어를 익히는 목적은 모른다. 하지만 일단 배워두면 좋지 않겠는가", "누구나 영어를 미국인처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등의 근거 없는 믿음이 깊이 뿌리내렸다. 이런 믿음 속에서 다른 학문의 연마와 독서에 쓰일 수 있었던 많은 시간이 미국인의 발음을 따라하기 위한 반복 훈련을 위해 소모됐다. '왜'와 '어떻게'라는 질문이 빠진 '묻지마 영어 공부'가 횡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교육의 목표와 방향'을 점검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묻지마 영어 공부'의 현실에서 '왜'와 '어떻게'를 찾기 위한 자리다. 전국영어교사모임과 전국국어교사모임이 "새 정부 영어교육 정책의 진단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다. 21일, 서울 대학로 전국국어교사모임 건물 강당에서 열린다. 앞서 <프레시안>은 이 토론회 발제자 가운데 한 명인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의 글을 소개했다.
이어 소개하는 글은 경기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인 제이슨 토마스 씨의 발제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명박 당선인 측이 내놓은 '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 수업(Teaching English in English, TEE)의 의미와 한계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필자가 영어로 작성한 글을 황현수 교사가 요약 번역했다. 관계자들의 허락을 얻어 황 교사의 번역문을 전재한다. <편집자>
"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 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어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돼 온 영어 교수-학습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공교육 완성 실천방안" 발표로 "TEE"라는 구호가 한창 요란스럽게 한국 사회에서 이야기되고 있는데, 마치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영어 교육과 대한민국의 교육 문제가 모두 해결될 듯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못 따라가는 아이들을 다른 곳에 숨겨 놓고 진행한 영어 수업
먼저, 짧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004년 제가 인천의 어느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연구 시범수업이 아주 야심있고 유능한 영어교사에 의해서 진행되었습니다. 학부모, 교사, 인천시 교육청 관계자들이 그 연구 수업을 참관했습니다. 그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되어지는 수업이었고, 성공적인 수업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배제된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2명의 학생은 그 전체 수업시간을 제가 있는 사무실에서 숨어서 그 연구수업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그 연구 수업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그들이 연구 수업에 참여하는데 필요로 하는 영어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꺼낸 단어는 'disaster(재해)'
그러나 그들은 제게 그 상황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있는 영어 사전을 사용해서 그들이 원하는 단어를 찾아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재해(disaster)"라는 단어였습니다. 매우 적당한 표현이었습니다. 영어를 가장 필요로 하는 그들을 고의적으로 배제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 수업. 그것이야말로 저에게는 비참한(disastrous) 재난과 같은 상황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입니다.
최신 이론은 교육 현장의 실정을 강조하는 것…한물 간 이론에 집착하는 인수위
TEE(영어로만 진행하는 영어수업)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흐름을 살펴보면, 이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고, 연구 초창기에는 목표 언어(English)를 중심에 두고, 그 목표 언어(English)만을 수업시간에 사용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TEE 이론의 방향은 학교 교실 현장의 실정에 맞게 운영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나 이명박 정부가 영어를 한국 사회에서 공용어로 만들고자하는 의도라면, 미국에서 나온 영어 공용어와 관련된 최근의 여러 연구물들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분명 그들의 의도와는 다를 것입니다.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
저는 아직까지 모국어가 외국어 수업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져야한다고 믿는 언어 학습 전문가를 한 명도 본 적이 없습니다.
영어 몰입 교육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더 극단적인 입장을 이명박 정부가 취하고 있어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제안된 영어 교육 방안은 학교 현장의 교실 수업에서도 적절하지 않은 교수 방법이며, 좀 더 크게 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연히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가 완전히 배제되어야한다는 생각, 영어 수업시간에 오직 영어로만 진행되어야한다는 생각에 분명하게 반대합니다.
"영어 수업에서 한국어의 역할은 중요하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학급 교실에서 영어 수업시간에 한국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생들의 영어에 대한 중압감을 들어줄 수 있고, 영어를 배우는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는 마땅히 있어야하며, 한국어의 개입은 교사, 학생이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동질감도 느끼게 해줍니다.
영어 학습에 있어서의 모국어는 많은 도움을 줍니다. 외국어 수업시간이라고 한국어의 사용 금지를 강요하는 것은 학생들의 진정한 배움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TEE는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TEE는 외국어 학습자의 모국어가 제2언어 습득에 방해가 된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학습자의 모국어가 외국어 학습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미국, 영국식 영어만 표준 영어인가?"…"천만에!"
그리고 TEE는 원어민(Native Speaker)가 최고의 영어 교사라는 잘못된 가정에도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영어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TEE는 미국 영어(US English)가 표준 영어라는 이상한 논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의 영어들이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Singlish(Singapore English), Jangnlish(Japanese English), Canadian English, Irish English, Indian English, Austrailian English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Singapore English는 영어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콩글리시'다.
간혹 한국 사람들은 Konglish(콩글리시)라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영어라고 말합니다. Korea라는 말 자체가 바로 Konglish(Korean English)입니다.
애초 영어 단어 중에 Korea라는 영어 단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Korea는 영어 단어가 되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을 비롯한, 모든 영어 사전에 Korea가 나옵니다.
언어란 무엇일까요? 언어의 중요한 기능은 자신들의 문화를 전달하는 매개체입니다. 그 나라의 지식, 경험, 역사, 세계관, 관습, 노래, 음식, 철학. 이 모든 것들은 언어를 통해서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재생산됩니다.
영어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의 도움을 받아왔고, 지금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돼 가고 있는 것이 영어입니다.
'콩글리시'는 영어를 위해서도 소중하다
영어의 주인은 없습니다. 모든 나라들이 영어의 어휘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Oxford 영어 사전에 나오는 pansori(판소리), chaebol(재벌), ondol(온돌), kimchi(김치), hanbok(한복)과 같은 콩글리시(Konglish) 표현들이 바로 Korean English입니다. 한국어가 영어의 어휘를 더 풍성하게 한 것이며, 이는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들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만약 TEE가 교실 수업에서 유일하게 강조된다면, 한국이 가진 여러 가지 문화적 재산들은 영원히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만들어가고 있은 영어의 세계에 번역되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TEE 수업 시간에는 한국식 영어, 즉 한국말이 배제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pansori를 영어식 설명으로 대체할 것입니다.
"한국인이 모두 영어를 구사한다면, 한국 문화는 사라질 것"
저는 Konglish가 "대한민국"의 미래는 아니라하더라도, "Korea"의 미래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어가 사라진 영어 교육의 현장에서 한국의 문화는 제시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한국인들 모두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고유한 한국어가 영어라는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세계화의 맹점입니다. 그들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한국 자체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든, 그렇지 않든 관심이 없습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이 만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면 좋은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란, 외국어 수업시간에 중간 언어로서의 한국어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어인 쓰시(sushi), 가라오케(karaoke)와 같은 일본어는 이미 영어 어휘가 된지 오래입니다. 영어화된 그 단어 하나, 하나가 바로 일본 문화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배제의 원리'에 기반한 TEE, 한국의 미래 위해서도 부적절
저는 TEE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TEE는 소위 말하는 미국의 엘리트(Elite) 교육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TEE가 전면적으로 강조되어진다면, 인천의 모 중학교에서 TEE 수업 시간에 배제되었던 2명의 학생들처럼, 아니, 2명의 학생들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배제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영어는 덜 풍요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문화가 영어의 세계에 배제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TEE만의 강조는 영어 교수-학습법에 있어서도 적절하지 않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 세계화되는 그 방향이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세계화(Globalizati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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