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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신정아 사건에서 뭘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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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신정아 사건에서 뭘 배웠나

[기자의 눈] '수험 기술자' 양성할 이명박 교육 공약 유감

이명박은 경제전문가인가?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대중은 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경제전문가로 인정할까? 이 후보의 대학 전공이 경영학이어서? 물론 아니다. 정치권 안팎에는 경제학이나 경영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연구 활동을 해 온 이들이 차고 넘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후보가 경제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실물 경제의 현장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가치를 우리 사회가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검증할 수 없는 지식도 중요하다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현장 경험으로 얻은 지식의 수준은 수치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격시험으로 검증할 수도 없다.

이처럼 시험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지식, 경험 속에 녹아 있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암묵지(tacit knowledge)'다.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동생이며,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마이클 폴라니가 처음 사용한 이 개념은 인문학에서 주로 쓰였지만, 최근 '지식경영'이라는 개념이 유행하면서 경영학자들도 종종 쓰는 표현이 됐다.

그리고 암묵지에 대비되는 표현은 형식지(명시지, Explicit Knowledge)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은 대체로 형식지에 속한다.

한국 사회는 형식지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랜 현장 경험을 가진 장인보다 시험을 통해 얻은 학벌이나 자격증을 우대하는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에서 형식지가 아닌 암묵지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이명박 후보의 사례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다. 경제학 박사가 아니어도, 경제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형식지에만 경도된 사회가 암묵지도 인정하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신정아 사건, 경험보다 간판 우선하는 사회의 그늘
▲ 11일 구속 수감된 신정아 씨. ⓒ<연합뉴스>

하지만 이는 작은 징후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형식지, 그리고 형식지에 대한 검증장치인 학벌과 학위, 자격증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런 관행은 종종 심한 부작용을 낳는다. 11일 구속된 신정아 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신 씨가 예일대 박사를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큐레이터로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더라도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쓸 기회를 얻지 못 했을 게다. 아예 큐레이터 실무를 접할 기회 자체가 봉쇄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거꾸로 신 씨가 예일대 박사를 자처했기 때문에 신 씨의 실무 능력은 제대로 된 검증에 노출되지 않았다. 예일대 박사라는 '간판'이 실무 능력에 대한 검증을 대신한 경우다.

사실 이런 사례는 너무 흔해서 굳이 신 씨를 예로 들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이처럼 암묵지가 무시당하는 사회에서는 학위나 자격증에 의지하지 않고 전문성을 인정받는 유럽의 장인들과 같은 인재들이 자랄 수 없다. 또 박사 학위가 없어도 유명 대학 교수가 될 수 있는 외국의 사례는 계속 남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신정아 씨 사건은 암묵지에 대한 사회적 검증과 인정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유명 대학 학위보다 실무 경험에 대한 인정 장치가 우위에 놓인 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 씨 사건은 형식지를 드러내는 지표만 통용될 뿐, 암묵지에 대한 검증과 인정은 이뤄지지 않는 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명박 교육공약, 현장 전문가 대신 수험 기술자 키운다
▲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지난 9일 교육정책 공약을 발표하며, '자율'과 '경쟁'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자율'인지,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프레시안

그런데 경제학 박사 학위가 아닌 기업 실무를 통해, 즉 형식지가 아닌 암묵지로 사회적 인정을 받은 이명박 후보가 오히려 암묵지를 인정하는 데 인색해 보인다. 적어도 최근 발표한 교육 관련 공약만 놓고 보면 그렇다.

이 후보는 사실상 고교 입시를 부활하는 공약을 내놨다. '자율'과 '경쟁'이라는 단어가 곳곳에 박힌 공약이다. 이처럼 '자율'을 강조했음에도, 학생의 자율성을 키우는 내용은 찾기 힘들다. 또 입시 경쟁을 강화할 수 있는 내용은 눈에 띄어도, 다른 종류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입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이익이 커지는 집단이 누릴 수 있는 '자율'은 넘친다. (☞관련 기사 : 이명박 교육공약이 빠뜨린 질문들)

이런 공약대로라면, 시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이 우대받는 현상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입시 경쟁에 얽매여 다양한 경험을 쌓지 못 했던 학생이 성인이 됐을 때, 경험을 통해 얻은 암묵지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우리라는 점은 당연하다.

또 지나친 입시경쟁, 그리고 이런 경쟁 속에서 느낀 우월감이나 열패감은 '시험 잘 치는 능력'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이렇게 될 경우, 학위나 자격증은 없지만 암묵지가 풍부한 현장 전문가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이명박, 신정아 사건 보며 무슨 생각했을까

이 후보는 박사 학위나 자격증이 아닌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은 암묵지로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교육 공약은 간판은 없지만 현장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주눅들게 하는 내용이다.

예일대 박사 학위라는 간판으로 다른 검증 장치를 무력화한 신정아 씨 사건을 보며, 이 후보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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