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머릿속에서만 그려왔던 일들을 스크린을 통해 보며 사람들은 울고 웃는다. 꼭 2시간 가까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니다.
1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장면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는 광고에서도, 어른이든 아이든 할 것 없이 좋아한다는 작은 게임기 속에서도 또 다른 다른 1000년이 지난 뒤라면 모를까, 아직 이 땅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것이 바로 CG(컴퓨터 그래픽)의 힘이다.
최근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디워>가 충무로와 평론가들을 넘어 일반인들 사이에서까지 뜨거운 논란으로 떠오르고 있다. 관객동원 700만 명 돌파를 코앞에 뒀다는 영화의 흥행에 애국주의 논란이 나오는가 하면, '100% 토종'이라는 <디워>의 CG를 놓고도 갑론을박이 팽팽하다.
하지만 각종 논리를 가지고 펼쳐지는 사람들의 논쟁 속에 정작 이무기를 탄생시킨 사람들은 없다. 심형래 감독이 CG 작업자들을 밝히지 않고 있는 탓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언제나 스펙터클하고 휘황찬란한 영상 뒤에 숨어 있는 CG 작업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빗겨서 있다.
그러나 스크린에서는 그 면면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들이 없이는 <디워>도 <괴물>도 만들어질 수 없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
그래서 만났다. 바로 내 옆에서 각종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기획 '사람이 소중한 일터' 두 번째 순서로 4년째 CG 작업자로 일하고 있는 맹호규 씨(32)를 지난 17일 CG 업체들이 모여 있다는 서울 구로동 구로디지털단지에서 만났다. (☞관련 기사 : 학교 급식 조리원 "지옥이죠. 그래도 이 일이 꼭 마약 같은 걸요")
"<디워> CG, 헐리웃 영화와 비교해 손색 없었다"
영화 <디워>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CG 작업을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눈은 어떨까? 호규 씨는 "최근에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좋았다"고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무기는 동물원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또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것처럼 이무기가 변해가는 모습도 담겨 있었어요. 기술적인 CG 면에서도 볼 만했어요. 헐리웃 영화와 비교했을 때도 손색이 없었다고 봅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을 실체로 마주했을 때 느꼈던 충격이 CG의 힘이라는 얘기다. 호규 씨는 "<킹콩>이나 <쥬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괴물들과 비교해 봤을 때도 <디워>의 이무기는 최고였다"고 말했다. "특히 이무기들이 싸우는 부분의 CG도 아주 훌륭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시나리오가 엉망"이라고도 한다. 호규 씨는 이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SF나 판타지물은 시나리오가 복잡하면 안 됩니다. 시각적으로도 정신없고 복잡한데 줄거리의 전개까지 복잡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겠어요? 누구나 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같이 CG 일을 하는 다른 동료들의 <디워>에 대한 평가도 비슷할까? 호규 씨는 "대부분 CG 면에서는 훌륭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물론 20% 정도는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지만…"이라고 덧붙였다.
"CG? 감독의 연출을 극대화시키는 도구"
그런데 컴퓨터 그래픽(Computer Graphic)의 약자인 CG는 도대체 무엇일까? 호규 씨에게 쉽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해봤다.
"영화나 광고에서 위험하거나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사람이 직접 찍기 힘든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CG입니다. 예를 들어, 차량을 30대를 한 번에 폭파시키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할 때, 생각처럼 '멋지게' 폭파되지 않을 수도 있고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 CG가 활용됩니다. CG가 많이 들어간 영화로는 반지의 제왕의 골룸, 킹콩, 반헬싱의 늑대와 드라큐라, 쥬라기 공원의 공룡, 블레이드의 드라큐라, 미라 등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많아요."
호규 씨는 "쉽게 말해 감독의 연출을 극대화시키는 최고의 도구"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CG라는 말이 불려지기 시작한 것은 배우 고소영 씨가 출연한 영화 <구미호>부터라고 호규 씨는 기억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하늘색을 기괴하게 표현하는 수준의 2D(2차원) CG였다. 기존의 풍경에 무서운 산장을 덧입히는 합성이 주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괴물>이나 <디워>의 CG는 새로운 3D Creature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수준까지 왔다. 게임에서 다양한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도 CG 작업에 해당된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영화 <반지의 제왕>의 '골룸'은 CG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CG만을 떨어트린 통계는 아니지만 문화관광부가 지난 6월 발간한 '2006 문화산업백서'를 보면 게임, 영화 및 광고 산업은 지난 2003년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다. 그 중에서도 게임 산업의 경우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성장률 48.4%를 보였다. 영화산업은 18.5%, 광고 산업은 9.2%였다.
모든 영화나 광고에서 CG의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관객이나 소비자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만큼 CG의 중요도와 그에 들어가는 비용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괴물>의 경우에는 총 제작비 100억 원 가운데 50억 원이 괴물을 만들어내는 데 들였고 <디워> 역시 순제작비에 300억 원이 들었다.
"1초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은 영화 CG에 이처럼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은 "실제는 쉽게 스쳐가는 1초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에서 몇 달의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라는 것이다.
호규 씨도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한 장면이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동조건은 어떨까? 영화가 성공을 하더라도 그 흥행이 직접 CG작업자나 애니메이터에게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업체 규모에 따라, 주된 작업 분야에 따라, 또 개인별로 다른 경력에 따라 임금 수준도 차이가 많이 난다.
호규 씨는 "동료들을 보면 대략 20대의 경우 연봉 2000만 원 안팎, 30대가 되면 2500만 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근로계약의 형태도 천차만별이다. 애니메이션에 들어가는 그림을 직접 그리는 에니메이터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이지만 CG 작업자의 경우는 게임 작업을 주로 하는 업체는 정규직이 많다. 게임은 단발성 프로젝트라기보다 출시 후 관리 및 업그레이드까지 계속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그런 거 따지고 들면 취직 못 합니다"
고용이 불안한 것은 아니지만 자발적인 퇴사자가 많다. 이직율이 높은 것이다. "받는 돈에 비해 어디나 너무 많은 일을 시키니까 조금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쉽게 회사를 옮기곤 한다"는 것. 호규 씨도 "너무 힘들어서 주5일제하는 회사로 옮겨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호규 씨가 다니는 회사는 격주 주5일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일하는 토요일의 경우에는 "저녁 6시는 기본"이라고 했다.
"평소에도 퇴근이 항상 늦으시죠?" 물었더니 "어느 업체나 퇴근시간은 없어요. 그렇다고 '대중 없다'는 절대 아닙니다. 그건 차라리 좋은 거죠"라고 답했다. 매일 10시~12시까지 야근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대학 때 총학생회에서 일도 했었다는 호규 씨지만 연일 이어지는 야근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틈을 주지 않는다. "평일에는 아예 약속을 잘 잡지도 않지만 그나마도 했던 약속의 20%밖에는 못 지키는 편"이라며 호규 씨는 찡그렸다.
휴일에도 쉬느라 바쁘다. 인라인스케이트나 등산을 즐기는 편이지만 생각처럼 신나게 놀지는 못한다고. 당연하게 반복되는 야근은 모든 직장인의 일에 대한 흥미도도, 집중력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매일 야근하면 초과근무수당은 받고 있을까? 호규 씨는 "절대 없죠"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줘야 하는데…"라고 말을 이어봤다. "그런 거 따지고 들면 대한민국에서 취직 못 합니다"라는 단호한 목소리가 돌아 왔다.
법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서 살면서도 "법이라도 지켜 달라"는 말조차 하기 힘든 것. 그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10년 후? 남은 절반의 꿈 이뤄야죠"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과 함께 전세계의 3대 에니메이션 제작국으로 꼽힌다. 하지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의 처우는 현격히 다르다. 호규 씨는 "미국은 같은 일을 하는 CG 작업자라도 야근은 절대 없다"며 "5~6시면 회사 전체가 불을 끈다고 하니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에 다시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호규 씨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룬 셈이다. <스타워즈>를 보고 '저런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면 참 재밌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의 호규 씨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호규 씨는 "절반만 이룬 거죠"라고 말했다. 아직 본인의 작품을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10년 후, 호규 씨의 남은 절반의 꿈은 어디쯤 있을까? 그 때면 CG 작업자들의 '정년'이라는 35세도 훌쩍 넘긴 40대가 될 터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니 이 바닥을 떠날 수는 없겠죠. 아마 10년 후면 제 영화를 만들고 있을 겁니다."
오늘도 별을 보며 퇴근하면서 호규 씨는 남은 절반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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