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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못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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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못 살아"

[화제의 책] 김진숙의 노동자 이야기 <소금꽃나무>

"더는 밟힐 수가 없어, 도대체가 더는 당할 것도 없어, 마지막 일어서는 일이, 몸부림치며 일어서는 일이, 일어서 외마디 소리 친다는 일이, 제 몸뚱아리, 말라비틀어진 몸뚱아리 장작개비 삼는 일밖에는 없었던, 그를 아십니까? 이 세상에서 입어 보는 가장 비싼 옷이 수의가 된 지지리도 못난 사내, 그를 아십니까?"

"50년 그 긴긴 세월 그 몸뚱아리 하나로 살았으면서도, 기름기 흐르게 먹여 본 적도, 늘어지게 쉬게 한 적도, 한 번 잘해준 적도 없으면서 그 몸뚱아리를 그예 횃불로 밝혔던" 그는 배달호다.

지난 2003년 두산중공업에서 해고되고 구속, 가압류 등으로 고통 받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고 배달호 씨의 노제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이렇게 안타까움 심정을 밝혔다. 그는 "박창수의 무덤이 빤히 바라뵈는 곳에 배달호 열사를 묻고 와서 이빨까지 빠지는 듯한 심한 몸살에 시달렸다"고 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그해 10월 그는 또다시 김주익 씨의 추모사를 써야 했다. 높이 35m의 크레인에서 오직 "우리와 대화해달라"는 소박한 요구를 걸고 129일을 버티다 스스로 목을 멘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 공교롭게도 김진숙은 한진중공업(구 대한조선공사)의 해고자 출신이다.

기자가 '김진숙'이라는 이름을 처음 기억하게 된 것은 그 해였다. 배달호와 김주익, 되돌릴 수 없는 죽음들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 절규하며 추모사를 읽어 내려가는 그를 처음 봤다.

그를 통해 사람들은 배달호를, 김주익을 접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죽음 앞에 함께 울었다. 그의 절절한 추모사가 어떤 작가의 현란한 글보다, 살아 있는 날 것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또 한 번 울게 했던 그의 글이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펴냄)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원고지에 쓸 수 없었던 마음 속 얘기들…
▲ 이 책은 후마니타스의 노동절 기념 두 번째 책이다. 후마니타스는 지난해 처음으로 노동절을 기념해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하종강 지음)을 펴낸 바 있다. ⓒ프레시안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선 누군가는 내 등짝을 또 그렇게 보며 '화이바 똑바로 써라. 안전화 끄내끼 단디 매라. 작업복 단추 매매 채아라.' 그 지엄하신 훈시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을 겝니다."

<소금꽃나무>는 바로 그런 "이른 봄 피어나기 시작해서 늦가을이 되어서야 서러이 지는 꽃"들의 얘기다.

김진숙의 글은 "원고지에 쓸 수 없는" 글들이었다. 그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열여덟, 그 "숫자만으로도 축복받은 나이"에 공장 생활을 시작해 해수욕장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배달, 싸구려 샴푸나 주방 세제 외판원 등을 거쳐 시내버스 안내양까지 했던 그였다.

공장에서는 "손가락에 물집이 가실 날이 없어도, 행동이 빠릿빠릿하지 못하다고 발길질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종아리에 시퍼런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122번 시내버스 안내양 시절에는 새벽 4시 15분부터 여섯 번 노선을 왕복하고 나면 "입금하고 속옷 구석구석까지 홀딱 벗고 항문까지 몸 검신당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흘러 흘러 들어간 곳이 "여기저기 철판들이 괴물처럼 솟아 있고,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용접 불똥과 그라인더 쇳가루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덮쳐 오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그 곳에서 용접 일을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발끝이 보이지 않는 탱크 안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았던 그 시절이 있기에 그는 누구보다 노동자, 그 서러운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참 사는 것 같았던" 그 시절

그 지옥같던 현장에서 수시로 벌어지는 동료의 죽음. 하지만 세상도, 노동조합도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주변 아저씨들의 권유로 노조 대의원이 됐다. 하지만 김진숙은 "자기네들끼리 이름 써서 올리면 그게 대의원이고, 그 중에서 돈 좀 쓰면 간부 되고 더 쓴 놈이 위원장 되는 거고 그랬던" 대한조선공사 노조에서 회사보다 더 한 노동조합의 실상을 보았다. 그리고 시작한 '민주노조' 만들기.

'도시락 거부 투쟁'을 처음으로 이뤄내고, 현장에 쥐가 많아 일을 못하겠다며 온종일 쥐를 잡으러 다니는 '쥐잡기 투쟁',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굳이 한 화장실에서만 볼일을 보겠다며 공장을 휘휘 돌아 줄을 섰던 '한 화장실 이용하기 투쟁' 등을 하면서 김진숙은 "참 사는 것 같았다"고 했다.

"싸워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들의 투쟁은 위험해 보인다. 싸워서 얻은 해방감을 단 하루도 누려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거는 이들이 무모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북선은 우리가 만들었다."

하지만 "살 만 했던" 그 시절은 짧았다. 그는 노조 활동 때문에 1986년 7월 14일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모든 게 와르르 소리 내며 무너지는 느낌"을 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발버둥 치며 울부짖었던" 날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들은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하고, 파업 중에 쓰러져 '죽인 사람도 없이' 세상을 뜨고,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며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있다.

"저 시절엔 기가 질려 못했지만 이 시절엔 아무리 불러도 안 온다"

김진숙 씨는 "이럴 줄 알았으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다"고 안타까워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민주노조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교도소 짬밥보다 못한 냄새나는 꽁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 그냥 물 말아서 먹고, 불똥 맞아 타들어간 작업복, 테이프 덕지덕지 넝마처럼 기워 입고, 체감온도 영하 수십도 한겨울에도 고양이 세수해 가며, 쥐새끼가 버글거리던 생활관에서 쥐새끼들처럼 뒹굴며 그냥 살 걸 그랬습니다."

그는 차라리 "한여름 감전 사고로 혈관이 다 터져 죽어도, 비 오는 날 족장에서 미끄러져 라면발 같은 뇌수가 산산이 흩어져 죽어도" 그냥 못 본 척 못 들은 척 살고 "인간이 되고픈 꿈을 포기해서 그 억만금 같은 사람들이 되돌아 올 수 있다면, 용찬이 예란이에게, 준엽이, 혜민이, 준하에게 아빠를 다시 되돌려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에서 나왔다"고 지적한 뒤, "대기업 노조가 나라를 망친다"고 강변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것이 노무현의 '절차적 민주주의'냐"고 반문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LNG 선상 파업으로 김주익 지회장이 구속됐을 때 인권 변호사 이름을 팔아 그를 변호했던 노무현 대통령 각하! 21년 된 노동자의 임금이 105만 원, 세금 떼면 80만 원, 그마저도 가압류로 12만 원. 129일을 크레인에 매달려 절규를 해도, 늙은 노동자가 88일을 애원해도, 청와대·노동부·국회의원 누구 하나 코빼기 내미는 놈이 없었습니다.

놀고먹는 사람들은 아파트 한 채만 잘 찍으면 수억이 굴러들어 오는 나라에서 하루 온종일 일하는 노동자가 생존의 벼랑 끝에서 불붙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이 정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참여정부입니까?"


오히려 세상은 더 잔인해졌는지도 모른다. "저 시절엔 기가 질려 '동네 사람들아!'를 못 했다면, 이 시절엔 절차대로 한 일이니 아무리 불러도 동네 사람들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벗어던진 사슬이 고스란히 그들에게"

세월은 흐르고 이제는 그들 뒤에 '비정규직'이라는 더 처절한 '민들레'들이 죽 늘어서 있다.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우리가 떠나온 자리에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보니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슬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돼물림돼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김진숙은 "'열심히 싸워서 민주노총 사업장은 대부분 주40시간이 됐다'고 자랑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민주노총의 투쟁이건 산하노조의 투쟁이건 비난이 난무할 때, 조중동만 탓하기엔 참 옹색해져 버렸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에서, 대우자동차에서, 만도기계에서, 한진중공업에서, 병원에서, 은행에서, 공공기관에서, 수백만의 노동자가 잘렸지만 단 한 명도 자신이 구조조정 대상이 되리라는 걸 상상하지 않았듯이, 무심한 냉대와 비수 같은 말 한마디가 언젠가 고스란히 내 심장에 꽂히게 되리라는 걸 상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철도공사, 이랜드 등 정규-비정규직이 함께 싸운 곳과 달리 한국통신, 현대중공업, 현대차 등 비정규직들끼리만 싸웠던 곳은 다 패배해 결국은 정규직도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 내몰려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는 "꽁꽁 언 땅을 저 혼자 힘으로 헤집고 나와야 하는 민들레"를 향해 "기꺼이 몸은 낮춰야 한다"고 거듭 호소했다.

"민들레 너희도 시험 쳐서 소나무가 되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민들레에게 숨쉬고 씨앗 흩날릴 영토와 햇볕을 나눠줘야 합니다. 민들레가 죽어가는 땅에선 어떤 나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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