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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코끼리' 삼성에 맞선 '작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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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거대한 코끼리' 삼성에 맞선 '작은 들꽃'

[화제의 책] 삼성해고자 아내의 이야기 <들꽃은 꺾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슬픈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들어도 무덤덤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다지 슬프지 않은 내용에도 눈물을 질질짜고 흥겨운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도 바보같이 울곤 합니다."

지난 1998년 해고된 삼성SDI 노동자를 남편으로 둔 박미경 씨는 남편의 해고가 가져다 준 삶의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숨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해고자 아내의 지옥 같은 삶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남편의 해고 이후 '이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 막막하기만 했던 미경 씨였다. 복직 투쟁에 전념하는 남편 대신 작은 비디오 가게를 운영해 생계도 책임지면서 또 동시에 감옥에 갇힌 남편 대신 1인 시위까지 해야 했던 그는 해고자의 아내로 살았던 지난 세월이 "숨 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왜 그렇지 않았을까. 어느 날은 "남편이 어두운 길을 걷고 있을 때, 은은한 달빛이 되어 길을 밝혀주고 싶다"가도 또 어느 날은 "세간의 화두가 된 분신자살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이를 악물다가도 금새 다리에 힘이 풀리기도" 했을 테다.

딸 아이가 '나도 아빠처럼 감옥 안에 갇히면 안 되나'라고 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죽음과 삶을 오가며 살아야 했던 미경 씨였다. 그는 지난 세월 틈틈이 인터넷 사이트(www.antisdi.com)에 올린 글을 묶어낸 책 <들꽃은 꺾이지 않는다>(삶이 보이는 창 펴냄)을 펴냈다.

미경 씨의 글은 질서정연하게 정돈돼 있지도 않고 조목조목 삼성의 부당함을 짚어내는 날카로움도 없다. 물론 노동운동의 거창한 이론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하지만 매일의 소소한 일상을 여동생에게 수다 떨듯이 풀어낸 그의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의 얘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의 글은 조금의 꾸밈도 없는 해고자 아내의 삶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라면…"
▲ <들꽃은 꺾이지 않는다> ⓒ프레시안

어느 날 갑자기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통보를 받은 사람의 그 막막함이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다. 그 막막함에 "부당하게 해고됐다"는 억울함까지 덧붙여질 때 사람들은 지루하도록 긴 복직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외로운 투쟁에도 대개 무관심하지만, 그들 뒤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가족들의 고통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그런 세상을 향해 미경 씨는 이렇게 호소한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다면 해고자의 목적은 원직복직 쟁취와 생존권을 위해서 투쟁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미경 씨는 자신이 남편 송수근 씨가 지난 1998년 "매년 엄청난 흑자를 내는 삼성SDI가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전환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다 당신 부하들의 근태조작으로 부당해고 됐다"고 밝혔다.

남편이 해고되던 당시 네 살 박이 꼬마이던 딸 아이가 어느덧 열세 살 소녀가 됐다. 그 기간 동안 송 씨는 두 번이나 구속당해 2년의 옥살이를 했고 그 결과로 신체 건강 나이 10대였던 그가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아 지체장애 5급 판정까지 받게 됐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기 어려운 삼성의 만행들

이들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복직 투쟁은 '해고의 억울함'에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더 억울한 일들을 당해야만 했다. 부당해고에 맞서 싸움을 선택한 남편에게 돌아온 것은 사측의 미행과 납치, 구속 그리고 일상적인 도청과 감시였다.

"삼성은 무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합니다. 전화도청이나 미행 등은 물론이고 사생활 하나하나까지 치밀하게 감시합니다. (…)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저희 집에 걸려온 전화를 삼성 노무팀이 받았습니다. 남편 친구가 '미경 씨 없어요?'하고 물으니 삼성의 노무관리자가 '잠깐 어디 갔나보네요'하며 얼버무리더랍니다. 남의 집에 걸려온 전화까지 받는 삼성이 뭘 못하겠습니까."


1인 시위를 하는 남편의 피켓을 부수고, 생계를 위해 회사 건너편 인도에서 전 직장동료들을 대상으로 포도장사를 했다는 이유로 남편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한 것은 그저 '평범한' 일이었다. 그는 "회사가 어느 날 남편을 납치해 경주로 끌고 가 술잔에 몰래 약을 타서 강제로 먹인 뒤 H콘도에 감금하고 '합의 안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생매장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양측이 합의해서 문제를 풀라"는 법원의 결정에 회사가 남편에게 내민 합의서에는 기막힌 내용들만 가득했다. '고향을 떠나서 살면서 삼성에 대해 입도 뻥긋 안한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기 어려운 삼성의 만행들을 더 많은 국민들이 직접 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두고두고 볼 수 있도록."



"언론도 법도 '진실' 외면한 채 막강한 '힘' 앞에 무릎 꿇더라"
▲ 지난 1998년 해고된 삼성SDI 노동자 송수근 씨의 아내 박미경 씨. ⓒwww.antisdi.com

지옥 같았던 세월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 동안 또 많은 것을 배웠다. "수박처럼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도, "대다수의 언론과 법이 '진실'이나 '정의'를 외면한 채 막강한 '힘'을 가진 삼성 앞에 무릎을 꿇더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박미경 씨는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지독했던 가난과 너무 깊은 상처를 안겨준 삼성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가난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통을 견디는 힘을 길러준 밑거름이 되었다면, 삼성은 땅을 치고 통곡할 만큼의 억울함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세상을 몰랐던 제게 인생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 그 힘 앞에서는 진실도, 정의도 모두 하찮은 것에 불과하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세상엔 '힘'을 가진 자보다는 그 '힘'에 짓밟히고, 억눌린 자들이 더 많은 것을요."

오늘도 희망을 안고 뚜벅뚜벅 걷는다

지난 2002년 12월, 만기 석방일이 아직도 4개월이나 남은 남편을 면회하고 와서 그는 새로운 대통령에게 희망을 걸었었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이 나라 법과 제도가 일부 특권층에겐 유독 관대하게 적용됐던 과거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과 제도로 개편되길 바라며, 다가올 2003년에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사라지고 지금까지와는 현저히 다른, 국민 모두가 평등하고 건강한 참된 삶을 누리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더불어 강도 높은 재벌 개혁과 불법세습, 세금포탈, 편법증여 등을 저지른 이건희의 구속과 양심수에게만 강요하는 준법서약서 철폐와 이 땅의 모든 양심수들의 조건 없는 석방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가 희망을 걸었던 대통령의 임기가 1년이 채 안 남은 지금까지도 그의 남편은 여전히 해고자다. 하지만 그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거대한 힘을 가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자를 억누르는 자들,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진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할 날이 꼭 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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