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정치경제는 어디로: 전세계적 자본 축적과 이라크 전쟁**
***들어가며**
모두 다 잠들어 고요하다. 지금 이 시각 인류 문명의 요람지였던 이라크에서 색색의 불벼락이 쏟아지고 있을 것이고, 남녀노소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팔다리 머리통이 툭툭 굴러다니고 있을 지도 모르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옆집 이웃의 살타는 불고기 냄새"를 지겹게 맡게 될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죽기로 죽이고자 하던 일부 미국인들 얻고자하는 것을 얻고 말았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이제 CNN이 신나게 중개할 전황을 프로 야구보듯 넋놓고 보는 것 말고 할 일이 없는 것일까.
물론 인간 세상의 어처구니 없는 부조리가 어디 한 두번이었으며 그 앞에 그냥 맥놓고 퍼질 수 밖에 없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그러니 적당히 해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 그래도 될까? 이번 부시 일당의 이라크 전쟁은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역사에 가득한 "예사의" 부조리와 달리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첫째, 그들의 다음 "무대"가 한반도가 될 가능성을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다. 둘째, 이 사건은 단지 좁은 의미의 지정학이나 국제 정치학의 사건을 넘어서서, 세계 경제와 사회 전체의 재구조화와 관련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후 약 10년간 우리에게 친근했던 "지구화 시대"의 경제, 사회, 문화는 이제 이번 전쟁을 전환점으로 아주 새로운 방향의 세계 질서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즉, "먼곳에서 벌어지는 비인륜적 학살"이라는 윤리적 의의를 훨씬 넘어서서, 우리 모두의 현실적 문제로 나타날 심대한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번 전쟁을 전지구적 정치 경제 체제의 구조 변환이라는 포괄적인 시간적 공간적 맥락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토론토 요크 대학교의 죠나단 닛잔(Jonathan Nitzan)과 심숀 비클러(Shimshon Bichler)는 이러한 지구적 규모의 축적 체제의 해명을 위하여 실로 괄목할만한 작업을 해온 바 있다. 필자는 이후의 일련의 기사를 통하여 그들의 연구 성과 중 현재의 전쟁과 관련하여 함의를 던져주는 부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반적인 독자들을 위하여 전문적인 경제학과 정치 사회학 이론의 논의는 피하고자 하였으며, 그 부분의 논의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지구적 축적과 변형의 이론>(닛잔과 비클러 저, 홍기빈 역, 삼인출판사) 이라는 이름으로 곧 출판될 책을 참조하시기 바란다.(서명 변경 가능)
앞으로 게재할 글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I. 연재에 앞서서: "음모"에 대해 말해보자
II. 보데의 법칙? :무기-석유 연합의 "차등적" 이윤율과 중동의 분쟁
III. 90년대의 축적 체제: 신자유주의의 번성과 지구적 인수 합병
IV. 부시 집단의 성격
V. 앞으로의 축적 체제: 지구적인 군사 분쟁과 세계 경제의 스태그플레이션의 가능성
VI. 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
***I. 연재에 앞서서: "음모"에 대해 말해보자**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음모이론"과 과학적 이론에 관하여 몇 가지 해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하여 분명 어떤 이들이 "음모이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자 할 것이 분명하기도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우리의 사고를 탄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능력한 기존의 "사회 과학" 이론의 사고 방식의 맹점을 짚고 나가는 것이 절실하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음모이론이란 이런 저런 사회적 현상과 사건들을 소수의 특정 집단의 "음모(conspiracy)"의 결과로 돌리는 태도이다. 유럽의 모든 혁명과 정변은 모조리 비밀 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의 음모로 돌린다든가, 국제 정치 정세의 변화의 모든 원인을 소위 "시온 의정서(Zion Protocol)"에 나타난 바 있는 "유태인의 세계적 음모"로 돌리는 따위의 것들이 고전적인 예이며, 가깝게는 케네디의 암살에서 소련의 몰락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외계인"과 그 앞잡이인 "그림자 세계 정부"의 책동으로 설명하는 것 까지 그 명맥을 이어온다.
이러한 음모이론이 불신과 냉소를 받는 것은 두가지의 다른 이유에서 기인한다. 첫째, 음모 이론은 그 진위 여부를 아예 검증할 수도 없도록 짜여진 논리 구조로 자의적인 인과 관계를 설정하는 비과학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들이 통념으로 갖고 있는 상식에 비추어 기상천외한 원인을 들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을 음모이론으로 몰아 잘못된 것으로 공박하는 주장들을 볼 적에 이 두 가지를 잘 구별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두 번째 종류의 이유에서의 비판은 자칫 새로운 과학적 이론을 통념과 다르다는 이유에서 무조건 기각해버리는 반대의 지적 오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음모이론인지 아닌지는 첫 번째의 관점 즉 그 이론이 철저하게 "과학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
특히 인간 사회의 많은 일들은 실제로 특정 집단의 의도적 행동 – "음모"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 을 통해 결정된다. 여기에 소개하는 닛잔/비클러 이론도 그런 의미에서라면 분명히 세계적 자본 축적과 전쟁을 둘러싼 지배 계급 분파의 "음모"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통상의 사회과학자들의 주장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음모이론으로 취급되는 것은 단연코 거부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철저하게 "과학적인 명제"의 형태로 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과학성"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과학성: 인과율과 경험적 논박 가능성의 문제**
대부분의 이론은 어떤 현상의 인과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A 라는 사건의 원인을 B, C, D….등 무수한 사건 중에서 특별히 B 라는 사건으로 돌리는 인과귀속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즉 "싹이 나왔다"라는 사건 A의 원인을 "물을 주었다"는 사건 B에 돌려, "물을 주면 싹이 나온다"라는 이론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럴듯하게 들리는 인과귀속에 근거한 이론도 있지만, 아주 자의적이고 엉뚱하게 들리는 인과율에 근거한 이론들도 있다. "까마귀날면 배가 떨어진다"든가 "초치면 풍나온다"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이 세계의 만물은 서로 연관된 흐름안에서 존재하며, 인과율이란 그 흐름에서 두 개의 사건 만을 쏙 뽑아 내어 그냥 얽어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원리상 어떤 이론의 인과율이 다른 이론의 인과율보다 본질적으로 더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거나를 따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물을 주면 싹이 나온다"는 주장이나 "초치면 풍나온다"는 주장이나 임의적인 인과관계 설정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므로 어느 쪽이 특별히 우월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벌어진 월식을 설명하려는 각종의 "과학적 명제"들은 그 원인을 "하나님의 분노"로 돌리는 미신적 주장과 비교하여 어떤 형식적 특수성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과학적 명제가 "경험적으로 논박가능(empirically falsifiable)"한 형태를 띠고 있어야 할 것이다. 흄이 말하는대로 인과율이라는 것에 어떤 본질적인 진리가 담겨 있는게 아니라면, 어떤 명제가 "과학성"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 이론이 주장하는 인과관계가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에 달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유의미한 진리들에 과학적 명제만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최소한 누군가 자신의 주장을 "과학적" 명제로 내세우려면 반드시 그 "경험적 논박 가능성"을 갖춘 형태로 내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분노로 월식이 벌어졌다"는 명제는 과학적 명제가 아니다. 이 명제를 경험적으로 입증하거나 논박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분노했다"는 사건 A와 "월식이 벌어졌다"는 사건 B가 독립적으로 관찰 가능해야 하며, 둘째 그 두 개의 사건 발생의 상호 연관이 어떠한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분노"를 어찌 우리 중생들이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 하나님의 분노라는 것이 단지 "월식이 벌어지는 것"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타나는 법이라면, 이 명제는 사실상 동어반복이 되어버려 입증이고 논박이고 불가능한 것이 된다.
반면, 그런 면에서 "초치면 풍나온다"라는 명제는 그 깜찍함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입증 가능성"을 띤 버젓한 과학적 명제의 틀을 갖추고 있다할 것이다. 그 인과귀속의 성격이 상식에 부합하고 않고는 과학성과 아무 상관이 없고, 경험적으로 입증 논박이 가능한가 아닌가가 관건이 된다. 오히려 그를 통해 상식을 비판하고 파괴하는 것이 과학의 임무가 아니던가.
***음모 이론의 문제: 입증도 논박도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음모이론으로 공격당해온 주장들이 어째서 비과학적인 것인지를 따져볼 수가 있다. 그 대부분은 그 명제를 경험적으로 입증도 논박도 할 수가 없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음모"라지 않는가. 모두 다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열려져 있다면 이미 "음모"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 "음모를 꾸민자들"의 존재도 의도도 경험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식이다. 그래서 모든 음모이론의 줄거리에는 항상 그 "음모를 은폐하기 위한 음모"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리메이슨"이나 "유태인" 같은 집단들은 아예 정의상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우리같은 범인들로서는 아예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위 "외계인 음모 이론"도 마찬가지여서, 그 외계인의 존재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세계 각국 정부의 음모가 모름지기 한창인 모양이다. "돌부리에 채어도 미제국주의의 음모"라는 농담도 마찬가지. 미 CIA는 항상 모든 음모를 은폐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입증이 불가능할 뿐 오늘도 도처에서 반미주의자들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입증이고 논박이고 그 내부 집단의 사정을 잘 아는 자신들이 던져주는 설명을 믿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음모이론의 해악성이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냉철히 이성적 경험적으로 따져볼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람들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은 공포와 증오에 기생하여 자칫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리는 어거지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음모이론의 문제는 그들이 "음모"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명제의 기본적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여 합리적 생산적 토론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드는 미신이라는 데에 있다.
***현대 사회과학 안의 "음모이론"**
재미있는 점은, 이 "경험적 논박가능성"이라는 과학적 명제의 기본 요건은 존경받는 현대 사회 과학자들에게서도 무시되고 있는 예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경제의 성공 비결은 "근면한 민족성"에 있다는, 국내 한국 경제론의 최고 대가라는 이의 주장을 생각해보라. "근면한 민족성"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하고 측정하여 비교할 방법은 개발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는 그냥 통념에 기댄 "의견(doxa)"에 불과하다.
상식처럼 유포된, "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경제 발전을 통해 중산층과 시민 사회의 성장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도 비슷하다. 도대체 그 중산층이라는 것은 몇 몇 사회학자들의 "중민이론"이라는 것 이외에 어떤 경험적 실체가 있으며, 그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저런 민주화의 계기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인가? 이러한 경험적 근거들이 정확하게 주어지지 않은 채 만약 이런 명제들이 사용된다면 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들이다.
나아가 어떤 경제학자들은 음모이론과 판박이인 진짜 음모이론을 마구 유포하는 경우도 있다. 시장 경제의 자체적 작동은 항상 완벽한 일반 균형을 일관되게 지향하는 법이란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무지하고 탐욕스런 노동 조합 및 이런저런 이익 집단들 그리고 거기에 부화되동하는 줏대없고 근시안적인 정치가들이 계속 그 시장 경제의 자율성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가장 유명한 버젼은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집산주의자들의 음모(collectivist's conspiracy)"라는 주장이다. 그 이후 이 주장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소위 "시장 개혁"이 실패할 때마다 스스로를 변호하는 보신술로 지겹게 변주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과학적 명제로 제출이 되려면 먼저 그들은 그 "이상적 일반 균형이 지배하는 시장 경제"라는 것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단 한 번이라도 경험적으로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를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일반 균형"이라는 것도 "철학자의 돌"처럼 학자들의 책에나 나오는 허구에 불과한 것이며, 거기에 근거하여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음모"에 모든 탓을 돌리는 것은 저질의 음모이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람들이 얌전히만 따라주면 철학자의 돌이 나타나서 현실 경제를 이끌어주련만, 그들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오늘도 철학자의 돌은 요원할 뿐이다". 이런 것을 과학적 명제라고 내미는 것인가?
***과학적인 방식으로 음모를 이야기해보자**
앞으로 보게 될 닛잔/비클러의 이론은 세계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자본 분파 즉 "지배적 자본(dominant capital)"의 축적 행태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구 방식은 기존의 주류 사회과학과는 크게 다르며, 그야말로 "음모"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화끈한 고급정보같은 것을 기대하는 분들은 곧 실망할 것이다. 평범한 사회과학자인 이들이 손에 넣어 사용하고 있는 자료들은 만인에게 개방된 역사적 통계적 자료이며, 또 이들의 이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내년에 백악관과 JP모오건이 더욱 유착할 것이다"는 식의 엽기성 예언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자본 축척 패턴의 변화와 그에 수반되는 정치 사회적인 변화에 대한 분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이론에 동의하건 않건 한 가지 분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점은 이 이론이 분명히 "경험적으로 논박가능한" 형태를 띠고 있는 "과학적" 명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이론이 "음모"에 대한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분명코 구체적인 특정 인간 집단들일진대, 언제부터인가 현대 사회과학은 몇 가지 범주의 사회적 행위자들 – 계층, 성, 지역, 인종, 민족 등 – 만을 설정하고 그 각각의 행동을 깔끔하게 이론화하여 그러한 교과서적 법칙으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된 몇 종류 행위자들 이외의 집단의 의도와 행동을 강조하게 되면 대번에 "음모이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만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맹점이 생겨나게 된다. 사회 변동과 그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집단, 즉 "지배 계급"의 의도와 행동에 대한 연구가 빠져 있는 것이다.
한번 묻자. 쌍동이 빌딩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또 조만간 어디어디에서 벌어질 사태들 또 크게 오르락내리락할 석유 가격과 그 여파가 그렇게 해서 설명될 사태인가? 오히려 부시 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또 전쟁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자본 분파의 의도와 행동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닌가? 자본의 축적에 따라 모든 정치 사회적 역동이 크게 좌우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 "지배적 자본"의 행태를 연구하는 것이 핵심적 과제가 아닌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각종 수요 공급 곡선과 생산 함수의 분석, 국가 관계의 게임 이론적 분석에 집착하는 것만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또 뚫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오히려 현대 사회과학에 오염되지 않은 18세기의 아담 스미스는 자본가 계층을 설명하는 데에 "음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같은 업종의 자본가들은 잘 만나서 놀고 즐기지도 않지만, 일단 만나서 대화가 벌어졌다하면 반드시 공공에 대한 음모와 가격 인상 책략으로 귀결되는 법이다"(A. Smith, Wealth of Naitons, (New York: Modern Library, 128p.))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는 카이제르 소제라는 신비의 인물이 나온다. 국제 범죄계의 지존으로 여겨지는 그이지만 전혀 꼬리가 잡히지 않아 꼭 봉래산 신선마냥 실재 인물인지 조차 의심되는 존재이다. 그에게 놀아나는 범죄자들 또 그를 잡아보려는 경찰의 숨바꼭질이 숨차게 벌어진 뒤, 경찰은 카이제르 소제가 실재 인물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다음의 진리를 뼈아프게 배운다. "최대의 음모는 카이제르 소제가 가공 인물이라는 소문이다".
"음모이론"은 이성적 상황 판단의 적이다. 하지만 현실의 "음모"에 대한 과학적 연구마저 무작정 "음모이론"으로 몰아부치는 태도야말로 또 하나의 "음모이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의식적으로건 아니건 그 "음모"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말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필자 홍기빈은 현재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 박사과정에서 국제정치경제학을 공부하는 소장학자로, 외국에 체류중이면서도 국내외를 넘나드는 다양한 이슈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여러 온/오프라인 매체에 보내며 많은 반향을 얻고 있다. 프레시안 연재글의 제목 '현미경과 망원경'은 정치와 경제, 국제와 국내의 이분법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자 하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외교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책세상)와 논문「칼 폴라니의 정치경제학-19세기 금본위제를 중심으로」등이 있으며 역서로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外>(책세상) <자본론을 넘어서>(백의)가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