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 면허증의 갱신 기간을 알리는 도로교통공단의 통지서를 묵혀둔 게 몇 달째. 기한 내에 갱신하지 않으면 그것도 성가신 일일 것이기에 며칠 전 시간을 내어 면허시험장을 찾았다. 이제는 면허증이 없으면 시민이나 국민이 못 된다는 듯,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북적였다.
거의 형식적인 시력 검사를 포함한 적성 검사에 몇 분이 걸렸고, 1만 원의 수수료를 내니 새 운전면허증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내 적성이 자동차 운전에 맞는지, 그 사이에 운전을 위험하게 할 폭력성이나 신경과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교통 법규를 다 까먹은 것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한 검사는 물론 없었다.
하긴 처음 면허증을 딸 때도 그런 검사는 없었다. 수백에서 수천 킬로그램의 무게를 가진 강철 차체를 시속 수십에서 수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며 석유를 폭식하고 각종 배기가스를 만들어내는 이 기계를 움직일 자격증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돈을 투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가 갈수록 운전면허 취득 제도는 간소화되었고, 그렇게 갖게 된 면허증을 가지고 국민 대부분은 드라이버의 대열에 합류한다.
1865년 영국 의회는 적기조례(Red Flag Act)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자동차 법규를 발표했는데 내용이 이러했다.
① 1대의 자동차에 3인의 운전수를 태운다. 그중 한명은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가지고 55미터 앞을 달리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② 최고 속도를 시속 6.4킬로미터 이하로 하고, 시가지에서는 시속 3.2킬로미터로 한다. ③ 2톤 단위로 세금을 물고 시 경계나 주 경계를 넘을 때는 도로세를 내도록 한다. ④ 밤에는 촛불이나 가스불을 달고 운행해야 한다.
이 법으로 당시 최고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리던 자동차들이 느림보 운행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영국 자동차 산업이 뒤쳐지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1896년에는 결국 이 법이 폐지되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그 때의 자동차보다 지금의 자동차가 운전자에게나 보행자에게 더 안전해진 것인지 의아한 것이 사실이다.
물리학의 기초 원리로 보면 더 빠른 엔진과 더 강한 차체를 갖게 된 만큼 파괴력도 높아졌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산업과 문명 발전의 엔진이 된 자동차가 도로, 석유와 손을 잡고 시나브로 사람들의 상식과 습관을 바꾸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어쨌든 운전면허증의 갱신은 살인면허증의 갱신이자 오염 배출권의 갱신일 수밖에 없다. 다만 너무도 당연하지만 일상적인 일들이어서 좀체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 뿐이다. 한국에서 누군가가 집에서 총기를 소지하거나 대마를 재배하면 경찰이 출동하지만,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동차와 관련된 살인과 살상의 규모는 통계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 자동차 관련 사고 즉 교통사고는 한국의 경우 1991년을 정점으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2012년 현재로 22만3000건이고 여기에는 사망자 5392명, 부상자 34만 명의 발생이 포함된다.
이것은 실제보다는 과소 집계된 것임이 분명한데, 경찰에 접수되어 처리된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통사고 사망자 기준은 사고 발생 후 30일 이내 사망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고 후 몇 달 또는 몇 년을 고생하다가 사망한 경우, 또는 직접 확인되지 않은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 한국의 교통 사고율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도 아직 무척 높다. 인구 10만 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7명보다 훨씬 높은 11.3명이고, 특히 보행 중 교통사고 사망자 수 구성비는 OECD 평균인 18.3%의 두 배가 넘는 37.8%다.
나라마다 제도와 문화의 차이가 이러한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겠지만, 자동차의 구조와 도로의 주행 방식 자체가 사고의 가능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10년 단위로 보면 대략 한 나라의 인구 규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동차에 의해 죽거나 다친다고 하는데, 그래서 일찍이 기술사학자 호시노 요시로는 대량 학살 병기인 핵무기 시스템과 함께 자동차가 '현대 사회의 야만'을 구성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교통사고 피해의 '객관화'된 숫자는 별다른 인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쉽다. 우리 주변의 가족과 친구 중에 직접 교통사고를 경험하거나 몸과 마음에 사고의 상흔을 안고 있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음에도, 이 현대 사회의 야만은 불가피한 것이고 일상적인 것이며 조심해서 피해가야 할 것이기에 굳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우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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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동차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의 여러 측면들은 쉼 없이 환기 되어야 한다. 비단 교통사고의 직접적 피해뿐 아니라 배기가스와 소음, 진동이 주는 피해, 도로로 인해 파헤쳐지는 산과 강, 석유 생산 정점(Peak Oil)을 향해 다가가는 화석 에너지 소비의 문제들이 모두 그렇다. 또 이에 못지않게 자동차가 가져오는 인간관계의 변화도 살펴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수십 년 전 도널드 애플야드가 자동차와 지역 사회의 관계를 거의 최초로 실증적으로 연구한 결과가 흥미롭게 읽힌다.
애플야드는 하루 교통량 말고는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한 샌프란시스코의 세 개의 도로(각각 하루 2000대, 8000대, 1만5000대의 차량이 지나는 도로)를 골랐다. 연구에 따르면, 교통량이 적은 곳의 사람들은 평균 1인당 3명의 친구를 갖고 있는 반면 차량이 많이 지나는 도로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는 0.9명이었다. 자동차 통행량에 따라 인간관계와 지역 사회의 활력 정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애플야드의 두 번째 조사는 이 세 도로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역'을 지도에서 그려보라고 주문한 것인데, 교통 체증이 심한 도로의 사람들은 빨간 네모로 자신의 아파트 부분만을 그렸지만, 교통량이 적은 도로의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 앞이나 도로 전체까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표시했다.
세 번째 조사는 백지의 지도를 주고 자신이 살고 있는 거리를 그리게 한 것이었다. 교통량이 많은 도로의 거주자들은 주로 길의 윤곽만을 그렸지만, 교통량이 적은 도로의 거주자들은 건물의 세밀한 특징이나 주변의 나무까지 그릴 수 있었다.
교통량이 많은 도로의 주민들에게 도로는 함부로 나가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경계선이거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닌, 자동차로 이루어진 '벽'과 같은 곳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도로변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집 속으로 더 똬리를 틀며 숨게 되고, 바깥에 나갈 때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자동차 속으로 다시 몸을 재빨리 숨긴 채 주차장을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애플야드는 이 연구 결과를 담은 <살 만한 거리>라는 책을 출간된 다음 해에 어느 과속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사망했다고 한다. 그 자신의 운명이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에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어쨌든, 자동차 특히 승용차에 대한 의존 증대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증대는 비례한다고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승용차를 많이 탈수록 승용차 속의 우리 가족끼리 잘 살자는 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겠느냐는 가설이다. 그런 의식이 축적되면 교통 소통을 막는 데모꾼들이 더욱 성가신 존재로 여겨질 것이다. 사방팔방으로 도로를 뚫는 사업을 막는 환경운동가들이 한심하고 편리한 전기의 길목을 막아선 밀양 송전탑 주민들이 아둔해 보일 것이다.
주차 공간을 찾아 거리를 빙빙 돌고 자동차로 막힌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걷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자동차 속에서 그리고 자동차에서 내려 들어선 집에서는 간단히 섭취할 수 있는 가공된 뉴스를 보고 듣는 시간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이것이 굳이 검증이 필요한 가설일까?
자동차 중심 문화를 열성적으로 비판해 온 스키다 사토시는 자동차의 사적 이용이 '헌법 위반'이라고 단언한다.(<자동차, 문명의 이기인가 파괴자인가>(임삼진 옮김, 따님 펴냄)) 자동차와 같은 위험한 기계는 조심스레 최소한으로 이용되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적으로 이용하게 하는 것은 헌법이 명시한 국민 다수의 행복권과 자기 결정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을 위배할 정도의 위험 요인과 일상이 된 범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이거나 하나마나 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 극복을 외치는 것도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극복만이 아니라 왜, 어떻게를 같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엔진인 자동차 산업과 문화에 대해 묵인 방조하면서 그것이 가능할까?
한국의 사회 운동에서 자동차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일부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미약하다. 진보 정당들도 자동차와 싸우는 정책을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었다. 너무 큰 이야기이거나 표가 되지 못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근 관심을 받고 있는 대중교통 무료화 정책도 좋고, 혼잡 통행세 도입,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 구역 확대 같은 여러 가지 제도적 해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승용차 사회를 반대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왜 승용차, 승용차 운전자, 그리고 승용차 시스템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과 동의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승용차 사회와의 타협을 전제로 가능한 제도 변화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대안은 대안 없는 반대로부터 출발한다. 어쨌든 자동차가 '문제가 있다'를 새삼스레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폐암 경고문과 끔찍한 그림을 담뱃갑에 삽입하는 것을 의무화한 것처럼, 자동차의 운행 자체가 인명 살상과 자연 파괴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문구를 희생자의 사진을 자동차 차체 바깥에 의무적으로 포함시키자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앞부분을 보면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장면이 나온다. 현 국가 체제가 당연시하며 부과하는 자격과 규정을 주인공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적 장치였다. 승용차 문명 속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운전면허증이 시민의 자격증이 되었다.
어느덧 초보 딱지를 넘어 숙련된 운전자가 되고, 미숙한 운전자를 욕하며, 왕복 8차선 신작로가 없는 시골을 비웃으며, 주차 공간을 찾아 마트 지하를 빙빙 돌며 소비사회 시민의 자격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은 한국 국민 중 40%이고 매년 100만 명가량이 추가되고 있다.
나는 갱신한 운전면허증을 찢을 준비가 되어 있다. 승용차를 소유하고 기름값과 보험료를 감당할 능력도 없기도 하거니와, 내 경제적 사정이 승용차 반대 의사의 진정성을 훼손할 이유는 아닐 것이다. 혼자서 찢기 보다는 뭔가 선포식이라도 하면서 여럿이 함께 찢을 생각이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 (☞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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