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섬나라의 근 500년 전 여왕과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 사이의 유의미한 비교가 짤막한 글 한 꼭지 안에서 가능할까? 게다가 '유혈의 메리'(나는 'Bloody Mary'를 옮길 때 '피투성이 메리'라고 한다.)란 험한 이름이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박동천의 부정적 관점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이런 걱정을 갖고 그 글을 읽었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박동천의 글은 박근혜를 엘리자베스1세에 비교하는 일각의 얘기에 대한 반박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메리의 대립 지향적 종교 정책과 엘리자베스1세의 관용적 정책의 차이만을 지적한 것이다. 한 꼭지 글에 충분히 담을 수 있는 논점이다. 제목의 약간 뾰족한 느낌은 필자의 몫인지 편집자의 몫인지 잘 모르겠다. (☞관련 기사 : '유혈의 메리'와 박근혜)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적 인물과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다. 상대는 프랑스 제2제정(1852~1870년)의 주인공 나폴레옹3세다.
▲ 나폴레옹3세. ⓒwikipedia.org |
'12월의 사나이(l'homme de décembre)',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8~1873년)의 별명이다. 1848년 12월 10일 프랑스의 첫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1851년 12월 2일 친위 쿠데타로 종신 대통령이 되고, 1년 후 같은 날 나폴레옹3세로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대통령 선거 날짜는 그가 정한 것이 아니지만 쿠데타와 황제 즉위 날짜는 그가 정한 것이었다. 왜 그는 12월 2일을 길일로 여겼을까?
12월 2일은 1804년에 루이 나폴레옹의 아저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년)가 나폴레옹1세로 즉위한 대관식 날짜였다. 그가 나폴레옹1세의 계승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었는지, 이 날짜를 택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나폴레옹1세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쥐었던 인물이다. 인류 전 역사를 통해서도 그만큼 큰 권력을 쥔 인물이 몇 되지 않는다. 그처럼 큰 권력이 한 인물에게 집중되는 일은 1815년 그의 몰락 이후 200년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나폴레옹1세의 몰락에서 그 조카의 대통령 취임까지 기간과 박정희 대통령 저격에서 그 딸의 대통령 당선까지 기간이 똑같이 33년이라는 것은 물론 우연한 일이다. 그러나 차분히 살펴보면 100%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강력한 통치자의 후광을 업은 후계자가 시대의 흐름을 헤치고 표면에 떠오르는 데 30여 년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두 경우의 공통점이다.
이 공통점에서 음미할 만한 뜻을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근 200년 전의 프랑스 상황과 오늘의 한국 상황 사이에 통하는 측면을 드러내야 한다. 당연히 짤막한 글 한 꼭지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나폴레옹3세와 박근혜가 공유한 문제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나폴레옹 숙질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라도 풀어보고 싶다. 박근혜가 나폴레옹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늘은 우선 1848년 집권에 이르기까지 루이 나폴레옹의 행적을 통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부터 밝혀둔다.
루이 나폴레옹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1세(이하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나폴레옹제국의 괴뢰국으로 세운 홀란드왕국의 왕이었다. 어머니 오르탕스는 조세핀 황후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이므로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불임증의 조세핀이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얻기 위해 딸을 시동생과 결혼시킨 것이라 하며, 그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의 실제 아버지가 나폴레옹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이 7세 때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 보나파르트 일족은 망명자의 신세가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스위스에서 자라고 독일에서 얼마동안 지냈다.
나폴레옹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1814년 나폴레옹의 첫 번째 퇴위 때 황제 자리에 앉았다가 며칠 만에 물러났고, 비엔나에 감금되어 살다가 1832년에 죽었다. 나폴레옹 추종자들은 이것을 나폴레옹2세로 보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은 3세가 된 것이다. 1831년 루이 나폴레옹의 형이 죽고 이듬해 나폴레옹2세가 죽을 때 루이 나폴레옹의 백부 조셉과 아버지 루이는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숭배 운동인 보나파르티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퇴위하고 부르봉 왕조로 되돌아간 것은 연합국의 강요 때문이었다. 많은 프랑스인이 이것을 억울하게 여기고 나폴레옹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한 것은 1814년 한 차례 퇴위했던 나폴레옹이 유배지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바로 황제 자리를 되찾았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워털루 패전으로 나폴레옹은 다시 쫓겨났지만 많은 그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나파르티즘은 1830년 7월 혁명 이후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루이 나폴레옹은 이 기세에 힘입어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진입을 시도했으나 웃음거리에 그치고 말았다. 1836년에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나폴레옹의 엘바 섬 탈출 때처럼) 지역 주둔군의 봉기를 촉구했으나 (나폴레옹의 탈출 때와는 달리) 주둔군은 그를 즉각 체포해서 추방했고, 1840년에는 50명의 용병을 이끌고 배를 타고 들어왔지만 역시 바로 체포되어 이번에는 종신형을 받았다.
1846년 5월 유폐되어 있던 요새에 일하러 들어온 석공과 옷을 바꿔 입고 탈출한 루이 나폴레옹은 영국에 망명해 있다가 2년 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파리로 돌아왔다. 1848년 4월 그가 제헌의회에 의석을 얻을 때까지 제2공화국 지도부는 그를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8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약 560만 표를 얻어(75% 득표율) 압승을 거두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 압승의 중요한 원인이 왕정 복고파의 지지에 있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질서 회복, 강한 정부, 사회 통합과 국가의 영광을 내건 루이 나폴레옹을 공화파의 기세를 꺾을 보수 후보로 왕정 복고파가 인정한 것이다. 왕정 복고파는 부르봉 왕조와 오를레앙 왕조(1830~1848년 재위한 루이 필립 1세의 가문) 지지자로 갈려 있어서 강력한 독자 후보를 내지 못하고 루이 나폴레옹 정부가 왕정 복고를 위한 과도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선거 결과에 더 직접적이고 강한 작용을 한 것은 '보나파르트'란 이름이었다. 1848년 12월 선거는 프랑스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여성은 아직 해당되지 않는다. 프랑스 여성은 아직 1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1830년 7월 혁명 시점의 프랑스 유권자는 10만 명이 안 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시점에도 겨우 20만 명이었다. 그런데 10개월 후의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40배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영광'을 상징하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새로 투표권을 얻은 서민 대중에게 어떤 힘을 발휘할지, 제대로 예측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이 되는 데 힘이 된 최대의 정치적 자산은 보나파르티즘이었다. 1848년 이전의 보나파르티즘은 하나의 바람일 뿐, 확실한 정치 세력이 아니었다. 연합국에 빼앗긴 프랑스의 영광에 대한 그리움과 왕정 복고로 강화된 기득권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짓밟힌 혁명 정신에 대한 아쉬움이 뒤섞여 나폴레옹 숭배를 확산시켰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이 바람이 근대 최초의 '대중 정치' 무대를 휩쓸고 루이-나폴레옹을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오늘 얘기 중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을 언급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상황을 이해하는 데 이 두 차례 혁명이 초점이 된다. 다음 회에는 두 혁명의 성격을 설명함으로써 나폴레옹3세를 권력으로 이끌어준 보나파르티즘의 성격을 밝히도록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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