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는 본래 '버몬트 진보당'이라는 진보 정당 소속이었다. 그렇다. 미국에도 진보 정당이 있다. 하지만 이 당은 전국 정당이 아니라 버몬트 주에서만 활동하는 정당이다. 그래서 샌더스는 연방 하원에 진출한 이후에는 줄곧 공화당도, 민주당도 아닌 무소속으로 분류된다. 놀랍게도 그 자신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자처한다. 미합중국 상원의 유일한 사회주의자 의원인 것이다.
좌파 정치의 불모지인 미국에서 어떻게 자칭 사회주의자가 상원의원까지 될 수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지방 정치에서의 오랜 투쟁의 역사가 있다. 버니 샌더스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 6년간 버몬트 주 벌링턴의 시장으로 있었다. 버몬트 진보당이 만들어진 것도, 그리고 그가 중앙 정치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때의 성과 덕분이었다.
벌링턴은 샴플레인이라는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아담한 도시다. 그런데 1981년 이 도시의 시장 선거에서 파란이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텃밭이던 이곳에서 무소속 시장 후보 버니 샌더스가 현직 시장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었고, 벌링턴에는 별다른 연고도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 우선 노동조합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미국 노동조합은 선거에서 보통 민주당을 지지하곤 한다. 그런데 민주당 소속의 전임 벌링턴 시장은 공무원 노동조합과 소방관, 경찰관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억눌렀다. 그러자 이들 노동조합이 선거에서 진보 성향 무소속 후보 샌더스를 공개 지지하고 나섰다.
또 다른 승리의 요인은 부동산 개발 문제였다. 1980년대 들어 미국 전역에 신자유주의적 투기 바람이 불면서 벌링턴에서도 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고 반면에 부동산 개발 쪽으로 돈이 몰렸다. 특히 샴플레인 호반에 콘도미니엄 건설 열풍이 불었다. 벌링턴의 서민들은 아름다운 고향 산천이 부자들의 돈놀이 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샌더스 후보는 이러한 열망을 앞장서서 대변했다.
▲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 ⓒwikipedia.org |
아니나 다를까 샌더스의 첫 임기(미국 자치단체장의 임기는 대개 2년이다)는 보수적인 시의회와의 투쟁으로 점철됐다. 공화당도, 민주당도 시장의 정책에 반대로 일관했다. 시의회 내에서 시장 지지 세력은 단 2명뿐이었다. 시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사업은 거의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의회의 승인이 필요 없는 사업에만 겨우 손을 대는 형편이었다.
결국은 대중의 힘으로 보수 세력을 압박하는 수밖에 없었다. 샌더스 시장과 그 지지 세력은 우선 독자 정치 조직을 따로 만들었고, 지지자들을 모아 '페어플레이를 위한 시민위원회'라는 시민 단체도 만들었다. 시장이 직접 지지자들과 함께 시 곳곳을 누비며 보수 세력을 비판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홍보하는 리플릿을 돌리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통한 것일까. 1983년 시장 선거에서 샌더스 시장은 52%의 득표를 기록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또 시의회에서도 샌더스를 지지하는 진보 세력이 13석 중 6석을 차지해, 비록 과반수는 아니지만, 조례 제정을 주도할 수 있게 됐다. 이제 한껏 탄력을 받은 진보파 시정부는 주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진보적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야심 찬 것은 부동산 정책이었다. 샌더스 시장은 시청 안에 '지역사회개발청'(CEDO)이라는 부서를 새로 만든 뒤 샴플레인 호반에 대한 공영 개발을 추진했다. 공영 개발의 원칙은 계획 단계에서부터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새로 건설된 주택은 부유층, 중간층, 서민층에게 각각 3분의 1씩 분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샴플레인 호반에는 부유층만을 위한 위락 시설 대신 호반 시민 공원과 주거 단지가 들어섰다. 이외에도 '토지신탁기금'을 설립해서 1가구 다주택 소유자들로부터 집을 사들여 노동자 가정에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임대하기도 했다.
지역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각종 문화 정책도 실시됐다. 그 중에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정부와 자매 결연을 맺은 사업도 있었다. 레이건 정부가 니카라과 혁명을 훼방 놓으려고 한창 무력 개입을 일삼던 와중에 벌링턴은 니카라과 민중과 연대한 것이다.
샌더스 시장의 임기는 1986년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버니 샌더스는 벌링턴 시장 시절의 성과를 바탕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또 샌더스 지지 세력은 1999년 '버몬트 진보당'이라는 독자 정당으로 발전했다.
비록 100석의 연방 상원에서 단 한 명뿐인 좌파 의원이지만 버니 샌더스의 활약은 눈부시다. 2011년도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야합한 감세 법안에 홀로 맞서기도 했다. 그가 택한 수단은 8시간 반에 걸친 필리버스터였다. 이때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2012년 대선을 앞두고는 버니 샌더스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운동까지 벌어졌었다. 샌더스 자신이 상원에서 할 일이 더 많다며 고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최근 오바마케어를 둘러싼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힘겨루기는 연방 정부 폐쇄 사태까지 초래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보편적인 공공 의료 보험을 도입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것은 (공화당의 공세와는 달리) 오바마와 민주당이 아니라 샌더스 의원이다. 오바마는 '사회주의자'라는 티파티의 딱지에 불쾌감을 표시하지만, 샌더스에게 이것은 미국이 스웨덴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민간 의료 보험 가입에 지원금을 제공한다는 오바마케어(정식 명칭은 '환자 보호 및 건강보험료 적정 부담 법')조차 '사회주의' 소리를 듣는 미국에서 버니 샌더스의 성공담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예외적 사례다. 하지만 결코 이유 없는 '기적'만은 아니다.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출발한 30여 년의 역사가 그 튼튼한 뿌리다. 이러한 뿌리는 미국과 같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싹을 틔워낼 만한 힘이 있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의 이전투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이번 재·보선을 보면서 버니 샌더스 생각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전에도 이 나라에서 진보 정당이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를 낼 수 있는 곳은 울산과 창원 일부 선거구뿐이었는데,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진보' 정당이 하나가 되든 열 개가 되든 이제까지의 관성대로라면 다시 10년이 지나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돌파구는 무엇인가? 몇 석 안 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만 의존했던 기존 진보 정당 전략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쟁취하는 정치 혁명이 어느 날 갑자기 성사되지 않는 한, 우리가 타진해봐야 할 것은 벌링턴에서 실현된 가능성을 이 땅의 어느 곳에서 피워내는 일이다. 지역 사회를 바꿔낸 성과를 튼튼한 토대로 삼아 전국 정치에 도전하는 일이다. 진보 정당 운동의 전략적 전환이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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