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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 직전에 내가 죽었다면, 이 글은…

[금정연의 '요설']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②

☞금정연의 '요설' 이전 이야기 바로가기 :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①

<제17장>
오, 독자여 어디 있는가? (O Reader, Where Art Thou?)


지난 원고의 마지막 문장을 나는 "살아서 만납시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또 다른 원고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당신도 아마 지금쯤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몇 번의 마감을 아슬아슬하게 넘겼고, 기다리다 지친 편집자들의 정당한 협박을 받았으며, 추석이라는 이름의 전투적인 명절을 치렀고, 어쨌든 살아남았다.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만남이란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나는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본다.

먼저 지난 글을 읽은 당신(a)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b)이 같지 않은 경우다. 인간에 대한 제법 보편적이고도 선량한 믿음에 근거한다면, 제법 그럴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당신들(a+b)이 '요설'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달고 있는 연재 배너를 클릭한 것은 순전히 실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신들을 탓하는 게 아니다. 하루 종일 인터넷을 들여다보다보면 누구나 그런 사소한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당신(a)은 그 글을 끝까지 읽어버렸다. 바로 여기가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애에서 많은 비극이 그렇게 일어나듯) 사소한 실수가 커다란 실수로 전환되는 지점이고, 동시에 이 가설이 흔들리는 지점이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 앞에서 우리 모두가 반복하는 외침 :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무시하고 넘어가자. 인간에 대한 나의 확고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가설을 전개하는 이라면 응당 그래야하듯이, 나는 최대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이 가설을 밀어붙일 생각이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건 당신들과 나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나는 당신(a)이 그 글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실을 비판하지 않겠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당신(a)은 그렇게 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 후에야 내가 그래도 괜찮다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없는 법이라고, 당신(a)도 그 실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지 않았느냐고 위로할 수 있는 맥락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애용하는 마법의 문장이다. 그리하여 구원이 찾아온다. 무슨 이유에선가 나의 지난 글을 읽어버린 당신(a)은 한 번 침을 뱉은 후, 낭비한 시간을 아까워하며, 다시는 이따위 글을 읽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따라서 당신(a)은 이 글을 읽고 있지 않다. Q.E.D.). 그것은 실수로 클릭한 이 글을 아직까지 읽고 있는 당신(b)에게도 추천할 만한 태도다. 아무리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없는 법이라고 해도, 가능한 빨리 돌이키는 게 좋을 것이다. 배움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배움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만족하는 바이다. 이 얼마나 계몽적인 일인가?

▲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이 가설에도 문제점은 있다. 당신(a)과 당신(b)이 같지 않다면, 연재의 연속성은 무의미해진다. "살아서 만납시다"란 제법 비장한 결구도,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로렌스 스턴 지음, 김정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가 우리한테 주는 깊은 학식과 지식"을 들려드리겠다는 약속도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두 번째 가설을 도입한다. 당신들(a와 b)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유아론(唯我論)이다. 한 마디로 혼자서 북도 치고 장구도 쳤다는 이야기다. 아쉽지만 이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아마 강신주 선생이 하셔야 할 것 같다(이미 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첫 번째 가설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누구나 유아론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사실은 지적해야겠다. 관념론적인 의미에서는 물론이고, 현실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어쩌면 벌써 10개월 가까이 이어진 이 연재를 통해, 그리고 인터넷 상의 온갖 '낚시'를 통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얻었고, 따라서 이런 글을(늦어도 지난 글부터는) 아예 클릭도 하지 않게 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books'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도 무지한 중생들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정당화되는 자신들만의 낚시로 사업을 펼치는 모든 계몽주의자들이 꿈꾸는 행복한 엔딩이라 하겠다.

(하지만 선생, 저는 계몽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되기엔 일단 제 자신의 배움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따라서 저는, 다시 한 번 지적 성실성이란 불필요한 단어로 무장한 채, 이 가설을 이어가려 합니다.)

유아론이란 무엇인가? 실재하는 것은 자아뿐이고, 다른 모든 것은 자아의 관념이거나 현상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한 마디로, 세상 전체가 되어버린 비대한 머리통이다. 사실 그런 비대한 자의식이 없다면 누구도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자의식의 괴물들이 만들어낸 저마다의 세계를 방문하는 것과 같다(옮긴이 김정희 교수는 해설을 통해 "스턴이 자아의 확고성, 실재성, 우월성을 인정받고 싶은 낭만주의적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소설에 대해 말할 때, 우리의 머리통이 조금쯤 커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것 – 흔히 '작가 부심'과 '독자 부심'이라 일컬어지는 – 을 견디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우리는 굳이 소설을 통하지 않고서도 거대한 머리통을 얼마든지 보고, 또 스스로의 머리통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철학체계에 '물자체(Ding an sich)'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알지 못하는,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물, 객관적 실재다. 이것을 우리의 가설에 도입하면 알 수 없는, 알지 못하는,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독자자체'가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람? 알 수 없는 나는, 다시금 첫 번째 가설로 돌아가고픈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첫 번째 가설은 두 번째 가설로 이어지므로, 나는 다시 두 번째 가설로 돌아온다. 어디에선가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한데, 베스트셀러 작가님들의 호언과는 다르게, 세상 어딘가에는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므로, 그리고 나의 비대해진 자의식은 "그 사람이 내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어?"라고 묻고 있으므로, 나는 다시금 첫 번째 가설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다시. 또 다시.

이것이 바로 헤겔이 말하는 악무한의 세계인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세 번째 가설을 검토하지 않았다. 그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역시 이번에도 지적 성실성의 도움을 빌려 진행해보도록 하자.

앞서 나는 만남이란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이 필요하고, 보시다시피 나는 여기에 있다고 썼다. 하지만 만남에는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장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장소는 바로 '프레시안 books'의 지면이다. 나는 내가 어김없이 그 장소에 '살아서' 나갈 것을 전제했다. 이제 고작 첫 문단을 쓴 주제에! 하지만 나는 아직 이 글을 끝내지 못했고, 따라서 아직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데드라인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다가와 있다. 실은 벌써 지났다. 그러니 나는 데드라인의 끝을 잡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에서, 춤을 추고 있는 셈이다. 심히 보아주기 괴로운 춤이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이 글을 끝마치지 못한다면,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죽어버린다면, 당신이 누구건 상관없이 이 글은 결코 당신에게 가닿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확률은 반반이다.

나는 문득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떠올린다.

이 사고 실험에는 알파입자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속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과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는 밸브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독가스가 든 통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밸브가 열리는지 볼 수 없다. 이 밸브는 방사능을 검출하는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기계 장치는 라듐 등이 붕괴하며 방출한 알파입자를 검출하여 밸브를 연다. 밸브가 열린다면 고양이는 독가스를 마셔 죽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라듐은 단위 시간 당 50퍼센트의 확률로 알파붕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단위 시간이 흐른 후에 고양이는 50퍼센트의 확률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것이다.
(☞위키 백과에서 인용)

고양이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 단위 시간이라면 나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은 마감 시간이다. 마감 시간(은 이미 넘겼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마감의 마감 시간', 즉 진정한 마감 시간)이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나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설명하기 위해 이 실험을 고안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이 실험에서는 관측자가 상자를 여는 동시에 상태가 고정된다. 즉 대상에 대한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위키 백과)

그렇다면 나의 경우,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역시 독자다. 마감 시간이 지난 후에 이 글이 '프레시안 books'에 걸려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나의 생사가 결정된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한 독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코기토다.

그러니 독자와 자의식과 기타 등등에 대한 골치 아픈 가설일랑 다 잊어버리고, 다시금 로렌스 스턴과 <트리스트럼 섄디>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그것이야 말로 내게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이고, 시간에 쫓기는 자유기고가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윤리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하자. (자신이 아직 탄생하기도 전인) 1718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여 그 5년 전인 1713년의 일화로 글을 마친, 플롯의 연속성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트리스트럼 섄디의 선례를 따라서. 로렌스 스턴은 1권과 2권의 표제어를 에픽테토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적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어느덧 우리에게 허락된 지면이 끝나버렸다. 난감한 노릇이다. 이렇게 잔뜩 뜸을 들였는데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야만 하다니, 당신들((a)와 (b)는 물론이 글을 끝까지 읽은 (c) 모두에게)에게 어쩐지 죄를 지은 기분이다.

그래서 트리스트럼 섄디를 따라 파티를 준비했다. 비록 내 비대한 자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파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오신 김에 다 잊고 신나게 놀아주시길 바란다. 다음에는 더 훌륭한 원고를 드릴 것을 약속한다. -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이만한 수준의 대접거리를 만들어 내느라 실컷 고생하고도, 뭔가 일을 잘못 처리해서 세련된 취향을 가진 신사 양반들이나 비평가들에게 헐뜯길 빌미를 제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양반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일 중에서도 그들을 파티에서 배제하는 일이 가장 위험하고, 또한 식탁에 비평가(직업상) 같은 사람은 있지도 않은 것처럼 다른 손님들에게 온통 신경을 쏟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게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 나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다 대비를 한다. 우선 첫째로, 나는 그들을 위해 여섯 개의 좌석을 일부러 챙겨 두었다. - 그리고 그다음으로, 나는 그들에게 온갖 예의를 갖춘다. - 선생님, 당신 손에 입을 맞추겠습니다. - 단언컨대, 어떤 손님도 당신의 반만큼 즐거움을 줄 수 없습니다. - 뵙게 되어 충심으로 기쁩니다. - 바라건대, 마음 편히 가지시고, 격식 같은 것은 차리지 말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그리고 마음껏 즐겨 주세요.

내가 좌석 여섯 개를 마련해 놓았다고 했는데, 좀 더 친절을 베풀어서, -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를 일곱 번째 좌석으로 제공할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참이다. - 그런데 한 비평가가(직업상은 아니지만, - 타고난 천성으로) 그만하면 잘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셔서, 내가 그냥 그 자리를 채우려 한다. 다만 내년에는 훨씬 더 많은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108쪽~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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