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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이름값' 못하고 또 사기 친다면…"

[장석준 칼럼] 이제 '어떤' 노동당이 될 것인가

7월 21일(일) 진보신당이 임시 당 대회를 열어 당명을 바꿨다. 9개의 당명이 제출됐고, 치열한 토론이 있었으며, 수십 차례의 표결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한 새 당명은 '노동당'이다. 같은 날 진보정의당도 당 대회를 개최해 당명을 '정의당'으로 개정했다. 민주당-안철수 세력 왼쪽에는 이제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이 존재하게 됐다.

진보신당의 새 이름 '노동당'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분위기도 있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 중에는 북한의 조선로동당을 연상시킨다는 걱정이나 공격도 있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때문에 대한민국 정치에서 언제까지고 '노동'을 금칙어로 놔둘 수는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회가 아니라 돌파의 문제다. 10년 전 민주노동당도 어쨌든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당 활동을 펼쳤고 국회에도 진출했다. 게다가 '진보'라는 이름을 공유하던 세 당들 중 진보신당-노동당만큼 북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분명한 당도 없다.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반응은, 그보다는, '노동당'이 '도로 민주노동당'이 되지 않겠냐는 우려다. 사실 이것은 진보신당 안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재창당 방향을 놓고 '노동자 정당' 성격을 강화하자는 입장이 있었는가 하면 과거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되풀이하자는 것이냐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근본적 한계는 조직 노동자 중심의 정당,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정당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이 정체 상태에 빠진 것은 당 내 NL(민족해방)-PD(민중민주) 대립 이전에 이 근본 문제 때문이었다.

지난 1월의 진보신당 대표단 선거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때 부대표 후보로 나선 나는 재창당 방향으로 '노동자 정당'을 추구해야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붙는다고 주장했었다. 결코 '도로 민주노동당'이어서는 안 되고 네 가지 점에서 크게 달라진 새 노동자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 여정을 시작한 노동당에게 그 네 가지는 여전히 중대한 성찰 지점이다. 아니, 이제 노동당의 길을 분명히 선택한 만큼 더욱 중요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몇 달 전에 풀어놓았던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앞으로 노동당이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첫째는 노동자들에게 달콤한 이야기,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는 노동당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된 지지 기반인 노동자들에게 쓴 소리를 할 줄 아는 노동당이어야 한다.

이미 상당히 높은 임금 수준에 도달한 노동자들이 이제껏 해오던 대로 임금 인상 투쟁을 계속하기만 하면 행복한 삶이 가능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노동당이어선 안 된다. 민주 노조 운동의 여진으로 등장했던 민주노동당은 이런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노동당은 노동 운동 전체의 투쟁력을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수준부터 끌어올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어디에서 공돈 들어오는 것처럼 복지를 말하는 노동당이어서도 안 된다. 민주노동당은 이 문제를 놓고 논쟁만 하다 분당 사태를 맞았다. 조직 노동자들의 영향력으로 저소득층 복지 수준부터 끌어올리자는 내용의 '사회 연대 전략'은 논란만 불러일으키다 결국 사문화하고 말았다. 이후 복지 의제는 노동 운동이 아니라 보수 정치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렸다. 이에 반해 노동당은 제대로 된 복지를 위해서는 고임금 노동자들이 세금 더 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거짓말하는, 사기 치는 노동당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길을 가자고 설득할 수 있는 노동당이어야 한다. 설령 그게 표를 깎아먹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국회의원 10명 생긴다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혹 원내 교섭 단체를 만들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처럼 자본-노동 간 세력 관계를 뒤엎는 어떤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껏 진보 정당 운동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노동자, 민중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였다. 나부터 반성한다.

노동당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항쟁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는 당이어야 한다. 할 수도 없는 무엇을 해주겠다고 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게 아니라 다가올 항쟁을 위해 지금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당이어야 한다. 저도 모르면서 아는 척 건방 떨지 않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것, 이게 요점이다.

셋째는 바로 지금부터 노동 운동의 근본 과제를 이야기하는 노동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노동당'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진보 정당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있다.

지구 자본주의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유럽 재정 위기를 비롯해 자본주의 중심부의 침체는 장기화하고 있다. 반면 위기에 대해 유일한 균형추 역할을 하던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벽에 부딪혔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이 조만간 우리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누가 나서서 기득권 세력이 망쳐놓은 세상을 접수할 것인가?

사회과학의 어떤 고전들은 그 일에 앞장서는 게 노동 계급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를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준비 안 된 노동 진영은 이때 시민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별반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을 이름으로 내건 당은 바로 그 '준비' 작업을 자신의 근본 임무로 삼아야 한다. 좌파의 문화적 지반부터 다시 쌓아가야 하고,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의 이상으로 새로운 세대에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막상 상황이 터졌을 때 더 이상 그게 1997년의 반복이 아니게 만들 잠재력을 높여야 한다. 당장에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런 과제는 강령 문서 한 구석에 고이 모셔놓는 진보 정당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자본주의 극복의 한 길을 쭉 가는 노동당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넷째 과제가 따라 붙는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먼저 우리 삶부터 바꾸자고 말하는 노동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인수한 뒤에 자본가 없이 자본가처럼 운영할 수는 없다. 그들과는 '다르게' 경영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그 준비를 갖춰가야만 한다. '다른'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다르게' 살기를 결단해야만, 세상을 끌어갈 '다른' 방식도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당은 노동자들이 당장에는 낯설어 하고 듣기 싫어할지라도 '더 많이 쓰기 위해 더 많이 일하는' 삶에서 벗어나자고 설득해야 한다. 입시 경쟁, 집값 경쟁에서 우리부터 벗어나자고 줄기차게 말해야 한다. 민중의 집이든 협동조합이든 또 무엇이든 이러한 실험들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경영할 우리의 능력을 지금부터 훈련하자고 채근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당의 새 '노동 정치'는 흔히 '녹색 정치'라 불리는 시도들과 결코 먼 거리에 있는 것일 수 없다.

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제 노동당 당원이 된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다짐이다. 이렇게 각오를 다지면서도 이 과제들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음을 절감한다. 하지만 다른 이름도 아니고 '노동당'을 택했으니 이 길을 피할 수 없다. 당명 결정 직후 이용길 노동당 대표의 첫 일성처럼 "이름값을 해야" 한다.

까먹은 시간이 너무 많다. 쉬고만 있던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때다. 지난 일요일, 한국의 진보 정당 운동은 그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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