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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왜 중국계를 싫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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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말레이인은 왜 중국계를 싫어하는가?

[서남 동아시아 통신] 전쟁과 말레이시아 종족 갈등

1957년 말레이시아가 독립 국가로서 성립된 이후, 말레이시아의 중요 국가 목표 중 하나는 다양한 커뮤니티들의 화합과 조화로운 공존이었다. 말레이시아 인구는 인종적으로 다수인 말레이인이 67.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 집단으로 24.6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계, 7.3퍼센트를 차지하는 인도계가 주요한 구성원이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전부터 말레이인과 소수 민족, 특히 중국인과의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어 왔다. 이는 1963년 중국계가 우위를 차지하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이탈해 독립 국가를 선포한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면화되었다. 또 1960년대에 전개된 인종 분규는 말레이시아 사회에 잠복하고 있던 소수 민족 문제가 독립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불평등에 기인한다고 생각되었던 소수 민족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인도계는 인종 분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본국 인도와의 지속적인 연계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말라야 사회 내에서의 고립주의적 성향이 완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각 집단 간의 갈등과 분쟁은, 정치권에서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를 아우르는 정당 연합 국민전선(Barisan National)이 선전을 거두면서 상당히 봉합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각 집단의 상이한 문화, 전통, 종교는 오히려 갈등 양상을 문화적인 차원으로 다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양상은 특히 2000년 이후 두드러진다. 따라서 말레이시아 다민족 사회에서의 민족 집단 간 갈등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근본적 원인과 함께 문화와 역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좀 더 복합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근래에 발생했던 사건 중 각 민족 집단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일본군 점령기를 전후한 시기에 말라야 사회의 다른 민족 집단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했던 경험들이다.

1940년대 말라야의 주요 민족 집단은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각기 다양한 사건을 경험하고 있었다. 중국은 1937년부터 중일 전쟁을 겪으며 대일본 투쟁이 격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중국이 내부의 분열을 일단 봉합하고 외부의 적과 싸우던 1940년대 전반은 바로 말라야의 중국인들도 강한 민족 의식과 통합을 경험했던 시기이다. 일본 주둔군의 가혹한 화교 정책도 중국인들을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몰아갔다.

인도계의 경우도 1940년대 전반은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군이 동남아에 진입하면서 과거 인도인들의 보호자가 되었던 영국이 말라야에서 물러나고, 1941년 말부터 이 지역은 일본의 직접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영향력을 강화했던 것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로, 그들로 인해 인도 본토의 온건한 국민회의 중심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급진적, 전투적 성향을 띄는 민족주의가 확산되었다. 동시에 혁명적 민족주의자들과 일본과의 연계 하에서 말라야의 인도인 이주자들은 이 시기 어느 정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말레이계 역시 일본 주둔기에 유화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들의 일부는 중국인 노동력의 자리를 메우며 새로운 산업 분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 동남아 인도인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인도국민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함께 영국에 대항하여 싸웠다. 1943년 총사령관 수바스 보스가 싱가포르에서 인도국민군의 사열을 받고 있다. ⓒ서남포럼
말레이인들 사이에 민족의식이 급격히 고양된 것은 1945년 이후의 일이다. 그렇지만 일본 군정기에도 민족주의의 맹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3년에 일본 군정은 케다(Kedah), 클란탄(Kelantan) 등 북부의 4개 주를 태국에 이양함으로써 말레이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는데, 천황 숭배와 일본어 사용 등을 강요함으로써 초래된 문화적 이질감 역시 이들 속에서 민족의식이 태동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 점령기, 말라야 인도인 커뮤니티의 경험은 여타 민족 집단의 그것과 뚜렷이 구분된다. 점령군인 일본군과 각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한 것이었다. 비록 인도인들 자신은 여타 커뮤니티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점령기가 물자 부족과 수입 중단으로 경제생활이 거의 마비되는 고난의 시기였다고 회고하지만, 그것은 같은 시기 중국인 커뮤니티가 겪었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숙청과 강제 모금으로 요약되는 중국인들의 경험은, 대동아 공영권 이론에 동조하며 인도국민군을 조직하여 일본을 돕고 그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혜택도 누렸던 인도인들과는 현격히 대비된다. 두 민족 집단의 이렇듯 상반되는 대일본 관계는 본래 결속력이 강하고 외부 사회와 쉽게 섞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한 양자 간의 관계를 더욱 생경하게 만들었다.

한편, 말레이인들에 대한 일본의 정책은 비교적 유화적인 것이었으며, 일본 군정기 말레이인들은 비록 전반적으로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그 통치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그 형편이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이 접수한 광산과 산업 시설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자, 바로 말레이인들은 그 자리를 메웠다. 이는 영국인들이 만들어놓았던 말레이인의 기존 이미지 즉 농경에 적합하며 제조업 등의 산업시설에서의 노동에는 부적합하다는 이미지를 깨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말레이인들이 기왕에 가졌던 불만은 정치적인 부분보다는 경제적인 요인이 주된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변화는 말레이인들의 일본 군정에 대한 감정을 상당 부분 누그러뜨렸을 수 있다. 말레이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인의 강한 민족의식 때문에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며 이득을 본 셈이지만, 이런 상황을 보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심경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인도인과 말레이인들의 관계는 일본군의 점령으로 인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군정기 이전부터 인도인과 말레이인은 대금 업자와 채무 농민의 관계로 치환되어 있었고, 그와 관련한 부정적 요소들이 잠복해 있었다. 농민들의 채무는 동남아에서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것으로, 말라야에서도 그 정도는 좀 약하지만 역시 커다란 사회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말레이계인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레이 유보제(Malay Reservation)가 실시되어 비말레이인의 토지 소유가 전반적으로 제한되었지만, 실제로는 토지 소유가 불법적으로 넘어가 실제 경작자인 말레이인들이 땅을 빼앗기는 경우는 여전히 있었다. 일본 군정과 인도인 커뮤니티의 호혜적 관계도, 인도인과 말레이인 커뮤니티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근현대사의 다양한 사건과 주요 민족 집단이 각기 겪었던 상이한 경험들은 각 민족 집단의 성격과 태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어떤 역사적 경험들은 타민족 집단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고, 또 경제적 갈등과 함께 각 민족 집단의 갈등 관계가 성립되는 어떤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940년대, 특히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점령 기간 동안 각 커뮤니티가 겪었던 서로 다른 경험들은 전후의 민족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건국 이후 말레이시아에서 각 민족 간의 갈등이 사회 문제화 되었던 데는 일부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하는 요소들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도인 커뮤니티가 주류 사회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측면이나, 정치적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된 후에도 여전히 문화적 갈등 요인이 잔존하는 상황 등을 이해하는 데, 커뮤니티가 공유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화요일, 일요일 동시 게재합니다. 이지은 서강대학교 강사(국제대학원)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8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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