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광해군이 두 번이나 내친 충신, 결국…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광해군이 두 번이나 내친 충신, 결국…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연재 지난회 바로 가기 :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②

상처를 입고 다스리던 시절 ③

지방관을 전전하던 청음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것은 광해군 즉위년(1608) 11월이었다. 청음이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상자로 뽑혔던 것이다. 사가독서는 주로 홍문관 관원을 대상으로 책만 보면서[讀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賜暇] 제도이다. 김상헌을 비롯하여 이이첨 등 12명이 선발되었다. 이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청음의 시가 있다. '호당(湖堂)에서 한밤중에 바라보다가 회포가 있어 읊다'라는 시이다.

천 길 절벽 쌓인 눈이 옷에 비쳐 차갑고 千崖積雪照衣寒
산음 가는 배 한 척에 흥치는 끝이 없다 一棹山陰興未闌
끝이 없네 이 순간에 서쪽 향해 보는 뜻 無限此時西望意
이슥한 밤 달빛 따라 난간에 기대 있네 夜深隨月倚闌干


본문 중 산음(山陰) 가는 흥치란, 친구를 찾아가는 흥치를 말한다. 진(晉)나라 때 명필 왕휘지(王徽之)가 산음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그래서 바로 밤새워 배를 타고 대규가 사는 집 문 앞까지 갔다. 그러나 왕휘지는 갔다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일 뿐이다"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이렇게 홍문관 소속으로 연구만 하게 만든 공간이 곧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이었다.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서 압구정동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동호대교인데, 호당은 바로 이 옥수동에 있었다. 한강인데 호수[湖]라고 부를 이유는 완만히 흐르는 강은 호수처럼 보이기 때문인데, 시를 지을 때 종종 강을 호라고 부른다.

시에 나타난 시기로 보아도 겨울이니 호당에 뽑혀 들어가 지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청음은 문득 서쪽을 바라보다 가슴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 시를 지었다. 이때 바라본 서쪽은 어디일까? 그렇다. 대궐이다. 곧 임금이다.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무엇을 생각했을까?

사료 하나

김상헌과 광해군 얘기는 잠시 뒤에 하고, 먼저 실록 기사 하나 살펴보겠다. 광해군 시대를 이해할 때 필수적인 사료가 <광해군 일기>인데, 이 실록은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활자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필사본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중초본(中草本, 태백산 사고본)과 정초본(正草本, 정족산, 적상산 사고본)이 그것이다. 중초본은 초서로 쓰인 초초본(初草本, 초벌 원고)을 산삭(刪削)·수정(修正)한 미완성의 중간 교정본(校正本)이다. 정초본은 산삭이 끝난 원고이다. 이를 기초로 활자를 심어 인쇄하여 교정을 보고, 그 교정본을 토대로 최종 인쇄에 들어간다.

<광해군 일기> 중초본은 초서(草書, 흘림체)로 쓴 대본 위에 주묵(朱墨)이나 먹으로 산삭(刪削)·수정(修正)·보첨(補添)한 부분이 많고, 많은 부전지(附箋紙)가 붙어 있다. 본문 각 면의 위아래에 보충한 기록이 많다.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楷書體)로 정서되어 있다.

▲ <광해군 일기> 중초본(태백산본) 광해군 2년 12월 26일 기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빨간 부분은 지우라는 표시이다. 궁궐공사로 재정을 파탄 낸 광해군 덕분에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일기>는 인쇄도 하지 못한 채 초고 형태로 보존해야 했다. 또 그 덕분에 우리는 <광해군 일기>를 통해 유일하게 중초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실록을 편찬하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후금에 대한 방비 등 재정에 곤란을 겪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러고 보니 <광해군 일기>는 의외로 많은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광해군 일기>의 자료적 가치와 성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 필자의 책,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 서문을 참고하면 된다.

"애석하다"

청음이 호당에서 다시 조정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2년 뒤로 보인다. 위의 <광해군 일기> 기사가 청음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른쪽 페이지 맨 끝에 '이김상헌위직제학(以金尙憲爲直提學)'으로 시작하여, 왼쪽 페이지 첫 줄에서 끝나는 부분이다. 거기를 번역해보면 이렇게 된다.

김상헌(金尙憲)을 직제학으로 삼았다.【상헌은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조용하고 온아하며 또 문학에 재질이 있었다.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 】(以金尙憲爲直提學【尙憲, 尙容之弟也。 恬靜溫雅, 且有翰墨之才。〈但以椒掖近親, 長據顯要, 而不知辭, 可惜哉!〉】)

실록에 보면 가끔 인사 기록 다음에 그 사람에 대해 논평을 단 경우가 있는데, 이 기사가 그런 경우이다. 논평은【 】로 묶은 부분이다. 원문에서는 별도 표시가 없다. 나중에 인쇄본을 만들었다면 '사신왈(史臣曰)'이라고 덧붙여 본 기사와 구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 〉로 묶은 부분은 원문에 빨간 먹으로 지우라고 표시했던 부분이다. 그 내용은 "다만 궁액의 근친으로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한 점이라 하겠다"는 논평이다.

원래 논평은 장점과 단점을 다 기록하게 마련이다. 청음이라고 해서 단점이 없었을 리도 없으므로, 위와 같은 논평이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 한편, 실록을 편찬할 때 '산삭'이라는 것은 대개 긴 기사를 줄이는 일이고, 가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도 한다. 위의 경우는 청음에 대한 부정적인 평론 내용을 산삭함으로써, 그 평론이 잘못되었다고 편찬자가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다행히 우리는 원래 논평이 정확했는지, 편찬자의 삭제가 정확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다.

청음과 광해군

청음을 두고 '궁액의 근친', 즉 왕실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부른 것을 사실에 기초한 기술이다. 청음은 광해군의 왕비 유씨(柳氏)와 인척이었다. 김상헌의 아버지 김극효(金克孝)는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柳自新)과 동서 간으로, 김상헌은 왕비 유씨와 이종 사촌이 된다.

ⓒ오항녕

그런데 논평의 다음 부분, '오랫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사양할 줄 몰랐던 것은 애석하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우선 선조 후반에도 청음이 지방관으로 전전했음을 지난 호에 우리가 살펴보았다. 광해군 즉위 후에 2년가량 독서당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런 자리는 청직(淸職)이지 요직(要職)은 아니다. 교서나 외교문서를 짓는 직제학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청음이 요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관직 경력은 승지(承旨)였다. 광해군 3년 동부승지로 있었으니, 처음 승지가 되었던 듯하다. 동부승지는 처음 승지가 된 사람이 맡는 관직이이 때문이다. 바로 이 무렵 정인홍(鄭仁弘)이 퇴계 이황과 회재 이언적을 문묘에 배향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회퇴(晦退) 변척 사건이 일어났다.

정인홍의 상소는 아직 각 정파가 고루 등용되어 있던 광해군 3년(1611) 3월에 올라왔다. 광해군 2년(1610) 9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을 이른바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사표로 삼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도에 살았습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습니다. (…)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가정(嘉靖)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혹은 극도로 높은 벼슬을 하였고, 혹은 청직과 요직을 지냈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 이것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되거니와, 만년에 이르러서는 결연히 물러나 나라에서 여러 번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높고 뻣뻣한 일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행실입니다."

요지는 스승 조식의 학문이 치우쳐 있고 노장을 숭상한다는 이황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이황과 이언적이 세태에 영합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소에서 말한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벼슬을 했다는 것은 을사사화(1545, 명종즉위)와 정미사화(1547, 명종2) 때 벼슬을 했다는 말이다. 당시 이황은 홍문관 전한(典翰)을 지냈다. 그러나 이황은 형 이해(李瀣)가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탄압으로 장(杖) 1백 대를 맞고 갑산(甲山)으로 유배 가던 도중 죽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권력을 쥔 간신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정인홍이 말한 것처럼 절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상 오현 종사가 진행될 때는 말이 없다가, 오현 종사가 끝난지 해를 넘기고 몇 달이 지나서야 이런 상소를 올렸다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고 이유를 모르겠다. 정인홍의 상소는 거센 역풍을 맞았다. 임금의 지근거리인 승정원에서 정인홍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

"정인홍은 그의 스승을 추존하려다가 저도 모르게 분에 못 이겨 말을 함부로 한 나머지 도리어 그 스승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 이황이 조식에게 노장(老莊)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고 중도(中道)로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은, 그의 치우친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논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지, 조식이 벼슬을 하지 않은 일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 인홍이, 만일 이황이 그의 스승과 더불어 혹 서로 좋게 지내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을 이유로 이렇게 흡족하지 못한 얘기를 하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는 본정(本情) 이외에 스스로 허다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차자 중에 이른바 '식견이 투철하지 못했다'느니, '사의(私意)가 덮어 가리웠다'느니 한 것은, 정작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승정원의 계(啓)는 광해군 3년 4월 8일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계를 기초한 사람이 청음이었다. 사관은 "좌부승지 오윤겸, 동부승지 김상헌이 함께 이 계사를 올렸는데 상헌이 계사를 기초(起草)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고서 크게 노하여 책망을 하려고 하였는데, 상헌이 유씨(柳氏)와 인척이 되는 까닭에 궁중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즉시 병을 이유로 사직하는 소를 올리니, 왕이 그를 체직시켰다"라고 말했다.

외직에서 만난 계축옥사

이렇게 짧은 승지 경력을 뒤로 하고, 청음은 광주(廣州), 연안((延安) 등 외직을 맡았다. 이때 계축옥사가 터졌다. 영창대군을 옹립한다는 소문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옥사였다. 의금부에서는 "장단 부사(長湍府使) 김상관(金尙寬)의 아들은 연안 부사府使) 김상헌(金尙憲)의 양자인데 김래(金琜)의 딸과 혼인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김래는 바로 국구(國舅) 김제남의 아들이었고, 인목대비와 형제 간이었다.

살얼음판 같던 상황에서 청음은 인척관계 때문에 재앙을 맞기도 했고, 모면하기도 했다. 흔히 정치적 이합집산이 벌어질 때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 첫 번째로 고려하는 것이 집안, 가문이다.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청음의 경우 이런 추론이 들어맞지 않는다. 김제남과 광해군 중에 집안으로 따지면 권력이 있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편이 실리(實利)에 부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정인홍의 회퇴 변척을 비판할 때도 관직을 내놓았고, 부당하면서 처절했던 김제남의 옥사 때도 파직을 감수했다. 가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글을 잘 지었던 청음은 2년 뒤인 광해군 7년, 사과(司果)의 자격으로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 왕후(恭聖王后)로 추증하면서 지은 책봉 고명(誥命)에 대한 사은 전문(謝恩箋文)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그 글에 들어간 '관과(觀過)'라는 두 자 때문이었다. <논어>에, "사람이 저지르는 잘못은 각기 그 종류가 다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잘못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는 말에서 나오는데, 사헌부에서 '관과'라는 말은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김상헌을 탄핵했다.

돌아온 청음

어떤 이유로라도 당할 탄핵이었다. 광해군의 정치는 이후 인목대비 폐모, 끊임없는 궁궐 공사, 원칙 없는 외교로 갈팡질팡하다가 민심을 잃었고, 광해군은 결국 폐위되었다. 혹시 광해군 즉위년 동호의 독서당에서 시를 지으며 걱정했던 일이 이런 상황이었을까. 모를 일이다.

안동 풍산으로 낙향했던 청음은 광해군 12년(1620)경 남양주 석실(石室)로 돌아왔다. 그리고 3년 뒤 그곳에서 반정을 맞았다. 반정 당시 청음은 생모인 정씨의 상중이었다. 상을 마친 뒤 이조참의를 거쳐 인조 2년(1624) 대사간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행실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김상헌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절도에 맞고 안팎이 순수하고 발라서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과 같았다. 바라보면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뜻으로 범하지 못하였고, 문장도 굳세고 뛰어나며 고상하고 오묘하여 옛 사람들의 글짓기에 가까웠다. 조정에서 벼슬한 이래 처신이 구차하지 않았고 나쁜 짓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기 때문에 여러 번 배척당하였으나, 이해와 화복 때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광해 때에는 버려져 시골에 있었는데, 반정 초기에는 상중이기 때문에 곧 등용되지 못했다가 상을 마치자 맨 먼저 이조참의에 제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에 제배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사모하였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