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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하면 우리도 미국처럼 된다? 완전한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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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하면 우리도 미국처럼 된다? 완전한 착각!

[프레시안 books] 필립 맥마이클의 <거대한 역설>

1960년 존 케네디의 선거 참모를 하다 그의 대통령 취임 뒤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경제사)을 버리고 린든 존슨 정부 때까지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국무부 정책기획본부장을 지낸 월트 로스토(Walt Rostow)가 1956년에 이런 말을 했다.

"저개발 국가들의 지리적 위치, 천연 자원, 그리고 인구를 고려할 때 만일 그들이 사실상 소련권에 붙어버린다면 미국은 세계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이다."

로스토가 말한 '그들'이란 '자유 세계'의 경계를 지키고, 다른 나라들이 소련권으로 기우는 '도미노 효과'를 방지하는 데 군사적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나라들이다. 유고슬라비아, 이란, 터키, 이스라엘, 인도네시아,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타이, 대만 등이 거기에 포함됐고 한국도 그 주요국의 하나였다. 미국은 이들 나라에 경제·군사 원조를 집중했다. 한 국가의 경제는 전통 사회-선행조건 단계-도약 단계-성숙 단계-고도 대량 소비 사회 단계의 5단계에 걸친 개발 과정을 거친다는 로스토의 경제 발전 5단계설이 예전 한국 대학 입시에 단골 문제로 등장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5단계설을 담은 로스토의 책 이름이 <경제성장의 단계들-비공산당 선언>(The Stages of Economic Growth-A Non-Communist Manifesto)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회주의권에 대적하기 위한 냉전 전략의 일환이었는데, 로스토는 존슨 정부 때 미국의 본격적인 베트남전 개입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비록 베트남에서는 실패했지만, 반공주의자 로스토는 한때 맹위를 떨쳤던 종속이론을 무력화시킨 대표적 개발 성공 사례로 거론될 만큼 승승장구한 한국을 자기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해준 최고의 위안거리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개발 분야의 국제적 권위자 필립 맥마이클 코넬 대학교 교수는 저서 <거대한 역설>(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에서 '개발'의 개념을 이렇게 정리한다.

"일종의 정치적 구성물로서, 식민 지배 본국(종주국), 정치·경제 엘리트, 다자간 국제기구 등 지배적 행위자들이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 그 질서에 대한 반대를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

1965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과 그가 추구하던 경제 민족주의가 수하르토의 유혈 쿠데타로 무너졌다. 기밀 해제된 1964년의 영국 외무부 문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서구의 이익을 수호해야 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이 지역이) 필수 상품의 주요 생산지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전 세계 천연고무의 거의 85퍼센트, 주석의 45퍼센트 이상, 야자 과육의 65퍼센트, 크로뮴 광석의 23퍼센트를 생산한다."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2년 전인 1963년의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는 영국의 헤럴드 맥밀런 총리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상황과 기회를 봐서 수카르노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지지를 받으며 전체주의적 '교도 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던 수카르노가 그 지역에서의 서방 이익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판단하고, 수하르토의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 수 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20세기 최대의 학살극 가운데 하나가 자행됐다.

2001년 4월에 기밀 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동·중부 자바에서, "매일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공산당원들이 (수하르토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다. 그 총 수는 10만에서 100만 가까이 되지만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언론에서 묻거든 낮은 수치를 얘기해 주는 게 현명하다." 그때 미국 중앙정보국은 자신들이 작성한 인도네시아 공산당 간부 명단, 즉 제거해야 할 '빨갱이' 살생부를 인도네시아 첩보기관에 넘겨줬다.

이후 수하르토 친미 독재 체제는 1997년의 동남아 외환위기로 그 다음해에 무너질 때까지 30여년 간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는, '지배적 행위자들이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 그 질서에 대한 반대를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구성물'이라고 <거대한 역설>이 정의한 개발의 한 전형적 사례일 수 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유사 사례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이 그런 정치적 구성물을 유지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 오랜 세월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해 온 가난한 국가들의 부패한 지배 엘리트들은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다. 거기에서 한국이란 나라는 과연 예외적인 경우일까?

맥마이클은 개발을 '통치를 위한 프로젝트'로 파악하며, 사회공학으로서의 개발의 기원을 "서구권이 비서구권을 식민화하는 구도"에서 찾는다. 거기에는 단지 식민지 자원을 추출(약탈)해서 식민 종주국들 산업화의 물적 토대를 쌓아올린 사실만 포함되는 게 아니다.

"개발을 하려면 식민 지배 행정가들이 식민지 주민을 관리하여 주민들이 자원 추출형 경제와 단일경작 농업에 적응하도록 하고, 식민지 하급관리들이 지배자를 위해 식민 정책을 시행하도록 만들며, 주민들이 물리적·정신적 변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도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 즉 '백인이 져야 할 짐'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비서구 사회는 사실상 해체 당했다. '더 진보한 서방'이 '낙후되고 고루한 경제·문화 전통에 사로잡힌 후진 지역'을 서구형의 더 나은 사회로 개조해서 그곳 주민들을 구제해 준다는 허구의 이데올로기, 그 사기적 수법을 통한 야만적인 식민화와 산업화, 그것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통용됐다. 식민지는 경제적·물리적으로만 종속당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문화적으로도 종속당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가 바로 그렇게 해서 해체 당한 식민지의 전형이었다. 한반도에서 '(자비로운) 백인이 져야 할 짐'을 지겠다고 자청한 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에 재빨리 편승해 한편이 된 일본이었다. '탈아입구' 운운하며 조선과 중국을 식민지배 당해 마땅한 이웃들이라고 멸시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바로 그 위선적이고 야만적인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아류였고, 식민자와 피식민 백성 사이에서 식민자들 수족노릇을 하며 식민 체제에 편승한 현장의 소수 원주민 하급 관리들이 바로 '친일파'들이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입에 올리는 자들은 통계수치가 제시하는 '성과'의 이면에 도사린 잔혹한 경제적 수탈과 문화·심리적 좌절과 해체의 고통을 서구 제국주의형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당한 대가로 간주하며 외면했다.

이 문제는 맥마이클이 <거대한 역설>을 쓴 문제의식과도 얽혀 있다.

"오늘날 비교적 풍요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학생들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발전의 궤도에서 '최고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자기가 속한 사회가 인류가 이룩한 경제적·기술적 성취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또한 젊은이들은 이러한 발전의 연속선 그리고 자기 사회가 그 연속선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근대화를 수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자기가 사는 세상을 역사적 조망 내에 위치시켜 객관적으로 보게 하기란 어렵다.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세상이 '사회 진화가 이루어진 최종적 상태'-진보의 필연적인 행진의 결과-라는 식으로만 파악하지 말고, 다른 식의 관점으로 파악해 보도록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내 경험에 따르면, 학생들이 단순한 진화론적 견해의 한계를 넘어 상상하지 못하는 한 자기가 속한 문화·사회와 다른 문화·사회의 가치를 인정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단순한 진화론적 관점을 넘어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면, 자기 자신의 문화를 사회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사회 변동과 개발과 전 지구적 불평등에 관해 성찰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을 과연 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도전이라 하겠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 대다수는 사회 진화(발전)의 유일한 경로는 단선적·단계적 발전 궤적을 그려온 것으로 묘사돼 온 서구형 발전이며 현재의 서구 선진국이야말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로 간주한다. 그들은 그 척도로 선진과 후진을 가르며, 후진이 선진이 되는 길은 서구의 뒤를 쫓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후쿠자와가 그랬고 일제 식민주의자들이 그랬으며, 그들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식민지 하급 관리자들과 그들과 세계관·가치관을 공유하는 오늘의 주류 개발론자들이 그렇다. 서구화에 뒤진 나라나 지역 사람들을 자기모멸, 자기부정, 그리고 서구 콤플렉스와 맹목적 서구 모방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불평등한 세계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그런 '단순 진화론적' 시선을 맥마이클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에도 잘못은 되풀이되고 있다. <거대한 역설>이 제6장 '지구화 프로젝트의 그림자'에서 인용한 인류학자 제임스 퍼거슨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의 불평등 심화는 자본이라는 트럭이 '사용 불가능한' 아프리카 지역은 그냥 지나치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특정 지역-그 나라의 주류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에만 내려서 사업을 벌이는 상황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민간 자본이 장악한 광물 추출 지역과 외부의 인도적 지원에 근근이 의존하는 낙후된 오지, 이 두 종류로 이루어진 아프리카의 현실을, 개탄할 만큼 부실한 지구화의 증거가 아니라 지구화가 상당히 정교하게 발전하고 진화한 형태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이런 아프리카 현실은 잘못된 예외가 아니라 개발의 당연한 귀결이요 일상다반사라고 퍼거슨은 얘기하고 있다. 그는 "(전통사회 나름의) 응집력 있는 국가 제도와 사회를 희생하면서 (예전) 식민 지배 당시의 분업 체계를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복원한 이런 모델"을 신 식민주의와 조응하는 '재식민화' 로 파악한다.

예컨대 산유국 앙골라의 경우 원유 채굴 과정 이후의 나머지 거의 모든 부가가치 생산 과정은 앙골라 바깥에서 이뤄졌고 그 결과, 원유 채취로 생긴 부는 그 과정에서 하급 관리자로서 득을 본 소수 '친일파'들을 뺀 앙골라 전체 사회에는 거의 유입되지 않았다. "25년 동안이나 원유 생산 붐이 일었는데도 앙골라 국민은 아직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앙골라와 비슷하게, 아프리카 전역에서 출현 중인 지배적인 모델의 특징으로, 대단히 능란한 민간 기업이 착취하는 광물자원 밀집지대, 기업이 필요한 대로 무엇이든 제공해주는 보안 전문 업체, 명목상 주권을 보유한 국내 엘리트 집단이 외국 기업으로부터 한 줌의 보상을 받는 대가로 합법적 영업과 국제적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관행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이야말로 현대판, 아프리카판 '친일파'들, 원주민 하급 관리자들이 아닌가.

'개발독재 우등생' 한국을 아프리카 현실과 바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겠고 심리적 거부감마저 줄지 모르겠으나, 이쯤에서 론스타와 김앤장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떠올려 보는 게 부자연스럽진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놀라운 성취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로스토가 자부심을 느꼈을지도 모를 한국의 개발 과정을 성공작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장기 개발독재의 감내하기 어려웠던 억압과 왜곡과 희생들, 그리고 생태환경 파괴 또한 잊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분단과 전쟁, 세습체제 하의 북쪽 절반의 억압과 빈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야기하고 존속시키는 분단 체제라는 만성적 질병 또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맥마이클이 재인용한 대표적 종속이론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다음과 같은 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의 저개발은 크게 보아 종속된 저개발 국가와 개발이 이루어진 구 식민 지배 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거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경제와 기타 관계의 역사적 산물이다. (…) 이러한 지배-종속 구조를 검토해 보면 종속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자기보다 못한 종속 국가의 자본 도는 경제적 잉여분을 빨아들이고, 그 잉여분 중 일부를 다시 최고 지배국가로 이전시킨다."

저개발의 개발. 즉 저개발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저개발은 개발이 만들어낸 동전의 뒷면과 같은 것이라는 프랑크의 종속이론을 한물간 것이라고 간단히 치부할 수 있을까. <거대한 역설>이 부제로 단 '왜 개발할수록 불평등해지는가'라는 물음은 프랑크의 문제의식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킨 세계체제론적 시각으로 보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는 소수의 준중심부 중의 하나에 해당할 한국이 기여하고 있을 세계 차원의 '저개발의 개발'의 어두운 그림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경제 성장이 빈곤과 함께 나타나는 '개발의 역설'을 맥마이클은 몇 가지 사실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세계 인구 중 상위 10퍼센트의 부유층이 전 세계 소득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8퍼센트에 달하지만 2010년 현재 5살 미만 어린이 중 거의 절반이 영양실조 상태다.(2009년 현재 42.5퍼센트)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3이 텔레비전을 통해 세계 소비자의 이미지를 접할 수 있게 됐지만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현금이나 신용을 보유한 사람은 그 중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텔레비전 광고는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전 지구적 생산품을 소비하는 것 같이 묘사하지만 그것은 한낱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전 세계 상품과 용역의 86퍼센트를 소비하고, 하위 20퍼센트 인구는 1.3퍼센트만을 소비한다. 옛 식민 지역 인구 중 약 절반이 슬럼 지역에 살고 있고, 30억 명이 넘는 인구가 서구식 소비에서 배제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불의 기억>(박병규 옮김, 따님 펴냄)을 쓴 우루과이 출신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해 놓고 수많은 사람들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꼴이다. 이 세계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평등하게 만든다. 생각이나 습관을 강제로 평등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기회는 불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들, 할 능력이 없는 자들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지배 엘리트와 그들의 원주민 현장 하급 관리자들 사이의 동맹은 강고하며, 모순은 구조적이다.

사회학자 안키 호오펠트는 신자유주의 하의 지구화 프로젝트 개발이 다시 만들어낸 21세기형 세계 질서라는 새 건축물을, "고도로 역동적이고, 대단히 배제적이며, 극도로 불안정한 경계를 특징으로 하는" 3중의 동심원 구조로 설명한다.

"동심원 3개 모두가 국가 경계와 지역 경계를 가로질러 함께 나타난다. 제일 안쪽의 동심원에는 모든 대륙, 모든 나라의 엘리트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비율은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발전 정도에 따라 모두 다르다. 아주 대략적으로 말해, 부자 나라에서는 은행 거래 가능 인구 40퍼센트, 생계 불안 인구 30퍼센트, 배제 인구 30퍼센트로 나온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이 비율이 20 대 30 대 50퍼센트가 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10 대 20 대 70퍼센트 또는 심지어 10 대 10 대 80퍼센트로 나오기도 한다. 제일 안쪽 동심원은 아마 전 세계 인구의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은행 거래 가능 인구', 즉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중간에는 유동적이면서 더 큰 사회적 동심원이 있는데 세계 인구의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불안정한 형태의 고용관계 속에서 노동해야 한다. (…) 제일 바깥의 셋째 동심원은 전 지구적 시스템에서 실질적으로 소외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 지구적 시스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들은 자기가 져야 할 짐보다 더 큰 짐-환경 훼손, 자원 부족, 전쟁과 분쟁, 강제적 박탈-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다. 이들은 하루 2달러로 생계를 유지하며, 전 지구적으로 대략 28억 명에 달한다."

식민 지배 프로젝트로 출발한 개발은 식민지의 저항과 탈식민 대항 운동이 거세진 20세기 중반, 즉 옛 제국들의 식민지 직접 경영이 불가능해진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단계로 진행한다. <거대한 역설>이 개발 제2단계로 설정한 '개발 프로젝트' 시대(1940년대~1970년대)를 설계하고 이끌어간 주역은 세계대전 승자 미국이었다. 이 시대에는 노동 운동과 탈식민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적해야 하는 냉전 전략에 따라 제3세계를 경제·군사적으로 원조하면서 국가를 시장보다 우위에 두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도입됐다.

독재자들이 자본과 시장을 호령한 그 시절의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개발 독재체에겐 정권 장악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개발이 필요했고, 옛 식민 지배 세력에겐 냉전 체제의 전략적 우위를 지키고 옛 식민지들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연장·강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개발 담론이 필요했다.

그 다음에 등장한 개발 담론은 '지구화 프로젝트' 시대(1970년대~2000년). 2차 대전 이후의 미국 절대 우위 시대가 흔들리면서 뉴딜적·케인스적 국가 우위는 악이고 시장이 선이라는 자본 쪽의 목소리가 커졌다. 국가가 종으로, 시민은 소비자로 격하당한 전 지구적 시장 제국 추구의 지구화 프로젝트 시대의 시장은 그러나 자연스러운 현상도 아니고 자유로운 현상도 아니었다.

"시장은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며, 국제 금융기구, 은행, 기업, 국가, 심지어 비정부기구들(NGO)까지 가세한 권력의 관리를 받는다. 지구화 프로젝트의 특징은 개발 프로젝트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치적으로 개입을 단행했다는 점이다."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길 펴냄)의 칼 폴라니가 얘기한 그 시장이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번영을 가져다주리라는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구화로 인한 물질적 혜택을 세계 인구의 5분의 3은 누리지 못했다. 5분의 3은 한층 더 강화된 착취 구조 속에서 뼈 빠지게 일하거나 손바닥 만한 농지 또는 도시 빈민가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게다가 가속적인 생태계 파괴와 함께 저항이 양 방향에서 거세게 밀려왔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김은령 옮김, 홍욱히 감수, 에코리브르 펴냄)의 '봄'이 상징하는 식민 지배 체제 내부에서의 반격이 그 하나고,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와 중남미 좌파 정권들의 잇따른 등장, 중동 민주화와 같은 외부 저항이 다른 하나다. 신자유주의적 수탈에 대한 저항,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 환경 속에서는 원천적으로 지속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그렇게 만들었다.

이제 개발은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 시대(2000년 이후)로 넘어가고 있다. 지구화 프로젝트 단계가 자본의 무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거는 규제를 제거하려는 기업·금융 및 그 동맹 세력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대항 운동이었다면, 지속 가능성 프로젝트 단계는 다시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동원에 의해 촉발됐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도 지배-피지배의 불평등 관계를 청산하고 생태를 복원·유지할 수 있는 탈성장적 지속 가능성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지향만 있을 뿐 아직 구체적인 대안으로 자리 잡진 못했다. 형성 중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역설>은 개발의 그런 역사 및 이론과 실태를 풍성한 실증적 사례들을 동원해 살핀다. 옮긴이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2차 대전 이후 사회과학 분야의 가장 포괄적인 주제가 개발이라며, 경제 성장과 성장 동력, 자유시장, 국가 개입, 산업 정책, 인구 변동, 젠더 역할, 정치 발전, 도시화, 주거, 빈곤, 농어촌 문제, 교육, 국토 균형발전, 민주주의, 노동 정책, 이주자, 시민권, 신자유주의, 지구화, 경제 민주화, 복지 국가, 불평등, 기후 변화, 생태계 보존, 에너지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의제가 개발의 관점에서 다뤄질 수 있다고 했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국제 NGO론을 가르치면서 <거대한 역설>을 기본 텍스트로 활용해 온 조 교수의 체험이 녹아 있는 얘기다.

1996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의 원래 제목은 'Development and Social Change: A Global Perspective'다. <거대한 역설>은 2000년 이후 지구화 프로젝트 단계와 각종 대안 담론들이 추가된 2012년 5판 개정판을 번역한 것인데, 제목을 그렇게 단 이유를 조 교수는 이렇게 밝혔다.

"개발만큼 역설로 가득 찬 현상도 없을 것이다. 개발의 기원 자체가 지배와 종속에 바탕을 둔 권력 관계로부터 출발한 역설, 신생 국가의 존립 근거로 표방했던 국가 발전 담론이 억압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한 역설, 생활 조건 향상과 환경 악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역설, 강대국이 자신의 존립을 위해 옛 식민지와 종속적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면서도 그러한 관계를 국제 원조라는 제도 속에 고착시켜 개발도상국이 선진산업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역설, 개개인을 국가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가 결국 시장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억압 기제로 귀결된 역설, 자원 고갈과 지후 변화 시대를 맞아 기존의 개발 모델을 폐기하고 탈성장을 추구하는 새로운 '개발' 모델을 찾아야 하는 역설 등 어느 하나 역설 아닌 부분이 없을 정도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제시한 시장과 사회의 이중적 움직임과 연결 지어 상세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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