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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과 정의를 원해? "이것은 당신들의 피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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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과 정의를 원해? "이것은 당신들의 피로가 아니다!"

[한병철을 다시 생각한다] <피로사회><시간의 향기> 수용론

이 글은 다소 늦게 도착한, 묵시적 복음에 대한 비판이다. "막차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막차를 타려는"(<마르크스의 유령들>(자크 데리다 지음,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펴냄)) 이 비판의 제스처는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우선, '수용'의 간극이라는 맥락에서. 2010년 독일에서 "새로운 문화 비평, 즉 극동의 관점을 통한 서구에 대한 문화 비평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었던 '철학자' 한병철의 복음의 수용과 2년의 시차를 두고 이곳에서 하나의 '힐링서'로–혹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예비 취업생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를 읽고, 신입사원에서 중간관리자까지는 <견디면 이긴다>(지윤정 지음, 현태준 그림, 퍼플카우콘텐츠그룹 펴냄)를 읽고, 그 위의 간부는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읽고 더 위의 CEO는 워렌 버핏과 안철수를 읽겠지?" (바로가기☞ '아프면 청춘! 견디면 직딩! '피로사회'의 맨얼굴은?'심보선, <프레시안 books>)–수용되었던, 두 지리적이고 시간적인 간극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 <시간의 향기>(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미리 그 간극을 요약하자면, 2010년의 독일과 달리 2012년의 한국에는 이미 '자기계발과 힐링'의 프레임이 형성되어 있었고, 여기에 '재독 철학자'의 복음이 도착하고 거기에 정확히 포개졌다. 유비적으로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상훈 옮김, 한마음사 펴냄, 원제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최근 출간된 <시간의 향기>에서 한병철은 이 니체적 최후의 인간을 하이데거의 세인(世人)과 노동하는 시간밖에 없는 노동자로 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미리 언급하자-을 이미 50년대에 알렉상드르 코제브를 중심으로 호황을 이루고 있던 역사의 종말 담론에 아주 뒤늦게 합류한 '복음'으로 특징지은 것과 이 비판은 궤를 같이 한다.

또 하나의 간극은 '피로사회'를 전후로 이미 번역된 저작들–<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와 <시간의 향기>(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과 곧 도래할 저작들–<폭력의 위상학>,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 <디지털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행위의 종언>–을 소급하는 동시에 미리 앞서서 여기에서의 '수용'의 프레임을 검토하고 예상해 보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재독철학자'라는 명명에서 정치적 체제 사이의 '경계인'이라는 의미가 완전히 탈색되어 문자 그대로 '독일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철학자'를 뜻하게 된 이 변화를 포함하여, <피로사회>가 출간된 이후 이 책과 이것으로 매개된 현상들에 대해 아직도 진행 중인 여럿의 하지만 서로 닮아 있는 비평적 태도들의 '프레임'을 비교・분석할 것이다.

요컨대, 두 가지 간극 모두 하나의 핵심 키워드에 연결되어 있다. '이데올로기적 수용'.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알랭 바디우가 <공산주의 가설(L'hypothése Communiste)>에서 '국가의 역사로서의 역사' 대신에 '사건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데 중요한 매개의 역할로 자리매김시킨 것에 가깝다. 라캉의 삼항계(실재적인 것-상상적인 것-상징적인 것)을 따라서 그가 상정하는, 실재의 영역에 있는 '진리들'이 역사 속에서 상징적인 사건의 장소에 구현되는 것은, 개인들이 상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주체화'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할 때의 그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예컨대 2010년의 독일은 '다문화주의의 위기 또는 이민자들의 사회통합 위기'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에서, 그리고 2012년의 한국은 자기계발과 힐링 그리고 이것과 연동하는 '정의론'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피로사회>는 각기 다른 식으로 수용되고 어떤 식으로든 주체화를 일으켰다고 본다.

1. 독일적 장면 - 인종적대와 피로사회

2010년의 독일 사회는 <독일이 사라진다(Deutschland Schafft sich ab)>의 출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주민들, 특히 터키 이주민들의 통합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독일은 이주민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것이라는 이 묵시적 경고는, 이 책의 저자 틸로 자라친(Thilo Sarrazin)이 베를린 시 재무장관 출신이자 당시 독일 연방은행 이사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마치 제 3제국 시절 '피아구분'을 정치적인 것의 조건이자 중핵으로 역설하던 칼 슈미트의 유령이 귀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 전역의 지하철 역사에서 묵묵히 케밥을 팔고 있는 터키인들이, 야간 편의점(Nachtladen)을 운영하는 그들이 일순간 암묵적으로 '적'으로 탈바꿈되는 이 사건은 결국 자라친의 이사직 사퇴로 종결되었고 그 이후 수상 메르켈은 자국에서의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이후 자라친은 정당체계–즉 독일 사민당 의원직 사퇴-와 자본주의 체계에서 퇴장했다가, 미디어 철학자 노르베르트 볼츠와 함께 새로운 정당(FZD, 독일 미래자유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정당 자본주의 체계로 귀환한다).

▲ 한병철 교수. ⓒ문학과지성사 제공

자본주의의 첨단에 서 있는 연방은행 이사에서 사퇴하게 된 그 함의들을 분석하는 것도 흥미로울 테지만, 여기서는 이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사건 위에 <피로사회>가 일종의 '가리개'처럼 정확히 포개졌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내에서 그런 적대란 없다"라고 위무하는 것으로 피로사회론은 독일 사회에 착근되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하려 한다.

"적이 없는 곳에서 엉뚱한 열정으로 적들을 보려 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지 않는 갈등들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바로가기 '우리들 중에서 적이 나온다'아담 소보스친스키, <디 차이트>, 2010. 09. 09, 번역은 필자)라는 식으로, 자라친의 '도발'은 피로사회론으로써 일축되었다. 자라친이 면역학적 부정성과 갈등 모델에 기대어 터키 이주민들에게서 부정성을 보았던 자리에서, 한병철은 그들을 "면역학적으로 퇴치되어야만 하는 타자들과 이방인들로 파악될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했던 것이다.

즉, "이방인 적대는 교환과정과 교역과정을 보편적으로 설립한 아주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견지되지 못한다(이런 이유에서 틸로 자라친은 바로 연방은행 이사 자리를 견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라친의 '적대'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다만 서구 유럽 사회에서 "적대의 결여를 보여주는" 증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독일의 '피로사회'는 다름 아닌 '인종적대와 절멸'이라는 묵시에 대한 일종의 무화이자 위무였고 힐링이었던 셈이다.

2. 한국적 장면 - 정의론과 자기계발/힐링 사이의 피로사회

독일에서 '피로사회'가 인종적대를 상상적으로나마 해소하는 데 기여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정의론'의 또 다른 판본으로 수용되었다. <피로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겨냥하고 있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한마디로 피로사회론이 '정의론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어본 <피로사회> 출간 이후, 더 정확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의 폭발적인 반응에 이어서 베스트셀러가 된 <피로사회>에 대한 대담이 실린 <한겨레> 창간 24돌 특집기사를 소급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한국적 수용, 즉 '정의론으로서 피로사회론'에 대해 흥미로운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가기 '피로사회를 벗어난 사람들'<한겨레>, 2012년 5월 15일)

"신진욱 : '정의론'에서 '성과 정의'는 분배 정의의 중요한 한 차원으로 이해되어 왔다. 특히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서 노동, 성과,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사회적 정의'의 중요한 측면이었고, 이는 자유주의 정의론이 주로 '기회의 정의'에 집중해온 것과는 구분됐다. 오늘날 사회 현실에 대한 주된 비판 가운데 하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의 자원을 가져간다는 것 아닌가? 이른바 '20 대 80 사회' '1퍼센트 대 99퍼센트' '승자독식 사회' 등의 규정들은 그런 분배 정의의 훼손을 가리키고 있다. 한 교수의 성과사회 비판은 이런 분배 정의의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한병철 : 나의 피로사회 담론은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다. 신 교수는 분배를 적게 받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지만, 나의 피로사회 담론에서는 분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착취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범주를 가지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힘들다." (강조는 필자)

▲ <피로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결국, '피로사회'는 주로 '탁월하게 뭔가를 성취한 개인들'을 호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대담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타인에 의한 착취'와 '자기 착취'로의 착취방식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구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즉 피로에도 급수와 자격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요컨대 "이것은 너희들의 피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호명에 반응하는 개인들 또는 역으로 말해서 이러한 호명을 요구하는 개인들의 등장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것은 "'피로사회'의 진단은 정확하지만, 그 해결책은 너무 단순하다"라는 비판이 다루지 않았던 질문이다. "성과 주체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착취 구조를 외면하는 개개인의 무장해제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그칠 공산이 크다"(☞바로가기 '<피로사회>를 경멸하는 이유'장정일, <시사IN>)는 지적이나, "사실 <피로 사회>가 수행하는 현대 사회 진단은 매우 예리하고 냉철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 다소 무력하게 들릴 정도다"(심보선, 위의 글)는 지적은 피로사회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타당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적 수용과 주체화–그 주체화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일단 괄호치고서–에 대한 비평으로는 부족하다.

앞선 대담에서 신진욱 교수가 제기했던 '분배 정의론'을 고쳐서 다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피로사회론으로 쓰고 정의론을 읽어냈던 다수가 존재한다면, 그들의 요구는 '공정한 분배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 착취라는 고급 피로에 대한 요구'로서의 정의였다. 타인에 의한 착취와 타인에 대한 적대감에 대한 피로 대신에, 자신의 '노동할 수 없는 현실'이나 '과도한 노동의 현실'과는 별개로–그래서 상상적인 이데올로기로서–'긍정성 과잉의 주체'이자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탁월한 개인'(excellent individual)의 자리에 대한 요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탁월함'을 다룬 책들이 피로사회론이 나오기 전에 여럿 출간되었다. 예컨대, 자기계발 담론의 선구자로 평가되곤 하는 공병호의 <나는 탁월함에 미쳤다>(21세기북스 펴냄)나 ('탁월함에 대한 평등주의적 요구'가 책의 부제에 그대로 구현되어 있는) 이재영의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탁월함에 이르게 되는 조건과 도구들>(원앤원북스)이 그것들이다.

'피로의 자격'에 대한 평등주의적 요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연애담론에서의 수용이다. 어느 인터넷 페미니즘 저널에 실린 글( ☞바로가기 '사회학적 노(No)와 예스(Yes)'마태윤, <이프>)에서 피로사회론 또는 '긍정과잉론'은 '연애기술'에 대한 정언명령으로 둔갑한다. 한병철의 진단을 따라 규율사회/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과 달리, 긍정성 과잉의 사회에서 남성의 유혹에 대한 여성의 대답은, 글의 제목처럼 액면 그대로 다른 해석의 여지없이 '예'는 예로 '아니오'는 아니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이끌어낸다.

"만약 아직도 여자의 NO를 YES로 받아들이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원시인이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난폭한 마초일 가능성이 많다."

말하자면, 혹자의 도식을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사회'라는 긍정성의 지평을 벗어나는 '부정성'에 대한 관심보다는 또 다른 '피로사회라는 긍정성 과잉의 평등의 고원'에 진입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요구가 이 수용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이다.

3. 포스트-진정성 레짐과 피로사회

한편으로 이러한 평등주의적 요구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던, 피로사회론이 제시하는 해결책인 '부정적 힘의 피로'나 '무위의 피로'에 함의된 어떤 난관을 지시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진단'과 '비판'은 곧장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 난관은 흥미롭게도 '피로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인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봉착하는 것과 많이 닮아있다.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펴냄)에 실린 '스노비즘과 윤리'에서 호모 사케르와 그 대척점에 있는 형상인 스놉의 차이를 다음처럼 지적하고 있다. 호모 사케르가 "사회적으로 배제된 자들, 정확하게 말하면 배제됨으로써만 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 그런 예외적 존재들[이자] (…) 저항의 의지도 삶의 의지도 절망의 의지도 없(어서) 그리하여 당연히 사유의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고"(94쪽) 있다면, 스놉은 "성찰성을 도구화[해서] (…) 성찰 그 자체를 성찰하지 않는다."(96쪽) 그리고 '피로사회'에서 규율사회의 명령 주체였던 초자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자리에서 "스놉은 초아자의 명령을 있는 그대로 수행하는 자(이고), 스놉은 사실상 초자아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103쪽) 두 형상의 비교를 통해서 김홍중은 스놉에게 성찰을 성찰할 수 있는 윤리를 다시금 요청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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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이란 무엇인가>(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하지만 '포스트 진정성 체제'에서, 즉 더 이상 '도덕적 진정성/활동적 삶'(vita activa)과 '윤리적 진정성/성찰하는 삶'(vita contemplativa) 사이의 간극이 메꿔지지 않는 상황에서 호모 사케르와 스놉 두 형상은 생각보다 서로 가깝다. 한병철이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배제된 사람들일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그것에 속한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두 형상 공통적으로 절대적 지평으로–더 이상 헤겔적 의미의 부정성을 도입하기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개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아감벤이 부정성의 지평 안으로 어떤 (배제된) 개인들을 '내가 바로 그 호모 사케르였구나'라고 깨닫고 분노케 한다면, 한병철은 긍정성의 지평 안으로 어떤 (탁월한) 개인들을 '실은 내가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고 성찰하도록 촉진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호명으로 그리고 이 호명이 흘러나온 지평 안으로 더 이상 부정성을 끌어올 수 없다는 데 있다. 비록 한병철이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피로사회>, 49쪽)고 역설하지만, 이 부정적 계기는 실로 미약하다. 그의 진단을 받아들이게 되면, 이 부정성이란 개인의 외부에서 들이닥치는 게 아니라, 오직 내재성이 외부로 뒤집혀져서 그것이 유일한 가능성의 평면이 된 상황에서 개인의 내면의 차원에 전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호모 사케르'는 개인들을 '배제된 자들'로 자기 발견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거기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다시금 기존의 법질서로의 포함을 요구하는 것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

이처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칼 슈미트를 따라 '비상상황' 또는 '비상사태'를 상례로 만들고 수용소를 '근대의 노모스'로 일반화하고 있다면, 한병철은 '정상상황'에 방점을 둔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도래하는 인간은 호모 사케르가 아니라 호모 리베르(Homo liber, 살아있는 인간)일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131쪽, 각주 18)고 그의 '긍정주의'를 오래 전부터 정식화했다.

물론, 이 긍정주의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자기 계발의 것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김진호가 두 종류의 긍정주의를 세심하게 구분할 것을 주문한 것처럼, 이 스놉의 주체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이 긍정주의는 부흥회의 형태를 띠고서 1960~70년대에 급속도로 성장한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자기 긍정의 메세지로서 성장주의에 기반을 둔, 말하자면 한국사회의 '근대화의 논리'였다. 이와 달리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긍정의 배신>(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에서 논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긍정주의는 '민족주의와 같은 집단적 긍정성의 요소'나 현재의 것을 부정하는 '미래지향적' 요소보다는 차라리 '현재적인 것에 대한 긍정'에 가깝다. (김진호, '힐링과 멘토의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녹색평론>, 2013년 3-4월 129호, 79~80쪽))

4. 피로사회 이전과 이후

여기서 <피로사회>의 이전과 이후의 저서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피로사회론'의 긍정주의의 맹아와 이후에 계속 다듬어지고 정교화될 그 변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독일 사회에서 한병철의 이름을 처음 알린 저서 <과잉 문화성/하이퍼 문화성(Hyperkulturalität)>(2005년)에서 그는 '하이퍼 문화'를 '문턱 없는 문화'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문턱이 다름 아닌 '부정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부정성의 소멸은 뒤이은 저서 <권력이란 무엇인가>(독어본 2005년, 한국어본 2011년)에서 곧장 푸코적인 미시권력의 주체 생산 문제에 연결된다. 즉 죽음이라는 부정성과 억압을 매개로 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사라진 자리에 무한하고 절대적인 에고의 내면성이 대신 들어서게 된다. 이제 초자아나 타자의 부정성과 마주한 채 그것을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장악해서 다시금 자기로 회귀하고 자기 주권성을 세우기 위해 투쟁하던 그런 권력의 형상은 불가능해지고 만다. 남은 건 '타인 없는 자기 착취의 세계'이다.

▲ <투명사회>(한병철 지음, Matthes & Seitz Berlin 펴냄). ⓒMatthes & Seitz Berlin
이러한 '부정성의 종언', 곧 '타자의 종언'은 최근에 출간된 <시간의 향기>(독어본 2009년, 한국어본 2013년)에서 '소여로서의 시간'의 소멸로 번역된다. 서사화가 가능해서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던 그런 '좋은 시간', '향기로운 시간' 대신에 의미를 알 수 없이 반복되는 '활동'과 '활동적 삶'이 절대화된다. 이러한 시간은 '노동의 시간'이자 '노동자의 시간'으로 다시금 시간의 향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민주화'를 넘어서는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그는 결론 맺는다. 마치 예전에 한 정당이 내걸었던 '저녁이 있는 삶'의 표제어가 노동 시간 단축에 '민주주의의 향기'를 부여했듯이 말이다.

물론, 이 '노동 거부' 더 나아가 금융자본주의에서의 '지불 거부'의 제스처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68년 혁명 이후 그것의 반동으로 일어난 자본주의의 '전도된 혁명의 급진성'에 관심을 두고 정식화된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의 '노동자주의'에서 이미 주창되었다. "노동자의 주체적인 행동 뒤에야 비로소 그 역량의 포섭을 통한 자본주의의 자기 수정 운동과 급진화가 뒤따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 '운동 이후의 운동'은 68운동의 '국가에 대한 데모스의 반란'이라는 도식을 비판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대신 새로운 주체 유형–'다중', '프레카리아트' 등-이 주도하는 여러 사회 운동의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는 이러한 저항 운동의 일본적 버전이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다. (68년 5월 혁명과 71년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각기 기반해 있는 현좌파의 두 유형에 대한 간략한 비교를 위해서는 필자의 글을 참조.☞바로가기, '좌파와 출판계의 두 가지 노선-1968년 5월과 1971년(메모)')

<피로사회> 이후 <폭력의 위상학>(2012)에서는 권력에 대한 맞짝으로서 타인에 의한 착취 대신에 '자기 착취'의 폭력이 논의되고, <투명 사회>(2012)는 '부정성의 소멸'과 '자기 긍정'이 통제사회의 판옵티콘 대신에 '네트화'를 통한 다수의 상호감시이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착취로 발전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감시되고 무차별적으로 투명해지는 현상은 독일 '해적당'의 의회진출로 대의민주주의의 차원에까지 확장되었고, 이 현상은 곧 '이데올로기의 종언'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투명함이 섹슈얼리티의 차원으로 번역되면, 벌거벗음이자 음탕함이고 포르노그래프이다. <에로스의 종말>(2012)의 제목처럼, 이 투명함은 비밀스럽고 내밀한 에로스의 종말을 가속화시킨다. '해적당'을 '정치 색깔 없이 의견만 내세우는 당'으로 비판했던 한병철은 최근 저서에서 이 비판을 대의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의 종언에까지 확장시킨다.(<디지털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행위의 종언>, 2013년, 독일 출판사 소개 글의 번역문은 다음을 참조.바로가기☞)

5. 묵시적 복음서이자 힐링서로서

앞으로 한국에 번역 소개될 그의 저서들의 제목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종언' 혹은 '종말'에 직접 지시되어 있듯이, 그의 담론은 요즘 유행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처럼 '종언 담론' 또는 '묵시 담론'의 계열에 속한다. '피로사회론'의 현실 진단은 놀라우리만치 적확함에도 그 해결책은 싱겁다는 비판이나, 더 나아가 그의 '긍정주의'에 대한 진단을 연애 기술에 대한 하나의 정언명령으로 수용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종언담론과 묵시담론이 구축한 총체성의 지평에서는 역설적으로 그 지평을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손쉽게 마련될 수 없다. 이것이 두 담론들의 강점이자 한계이다.

▲ <폭력의 위상학>(한병철 지음, Matthes & Seitz Berlin 펴냄). ⓒMatthes & Seitz Berlin
이 글의 맨 처음에 데리다가 후쿠야마를 향해 던진 질문-종언 담론의 "막차가 떠난 뒤에도 어떻게 막차를 타는 게 가능한가?"–은 이제 한병철에게도 유효하다. 후쿠야마의 종언 담론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에 냉전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1950년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코제브의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분석을 도입했다면, 한병철의 그것에는 68년 혁명 이후 그 혁명 결과를 자본주의가 포섭하면서 급진적으로 등장한 신자유주의 담론이 표명했던 '운동의 종언'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의 '피로사회론'이 장정일의 비판처럼 한국 사회에 '힐링'의 또 다른 판본으로 수용되는 데 그쳤다면, 이 수용은 2004년 <문학동네>에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논문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반응과 비판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홍종이 '근대문학의 종언'은 '과소진술'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대문학 자체의 종언은 다만 근대적 개인의 마음을 지배했던 '진정성의 레짐'이 난관에 봉착한 것에 대한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듯, '피로사회론' 역시 적대의 대상이 불투명해진 상황에 대한 비판철학적인 기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적대의 불가능성이 독일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연장에서 해석되었던 것과 달리, 이곳에선 다문화주의가 전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선별적 시민권'이 인종주의 적대를 대체하고 있다는 차이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제도적으로 이민자들에게 동등한 시민권이 부여되는 유럽과 달리 이곳에선 그 시민들의 무기력한 '보호협회'인 국가 대신 다른 국가와 새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가능성도 예외적인 경우-난민, 망명–를 제외하면 제한적이다. 우파의 문화적 관용이 가리고 있는 지점도 이러한 '선별성'의 문제와 그 선별 근거에 해당하는 '개인의 탁월성' 문제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진단이 무한히 자기 긍정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비판의 대상에 결국은 포섭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신자유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근대적 정치철학이 기반했던 모든 종류의 적대 대신에 노동의 시간을 중단할 수 있는 '사색적 삶'이 가능한 '탁월한 개인'을 해방의 주체로 내세우는 것은–아마도 그의 의도와 달리–신보수주의가 회귀하는 그리스적 시민의 탁월함(virtus)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는 인상도 지우기 어렵다. (그와 그의 동료였던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신보수주의적 함의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바로가기☞ '독일 신보수주의 혹은 독일적 출처의 어떤 계보')

신보수주의적 탁월함이란 다음 질문과 대면해야만 한다. 앞서 소개한 책의 부제, '누구나 탁월함에 이르게 하는 조건과 도구들'처럼, '탁월함'이라는 술어에 '아무나' 또는 '누구나'를 결합시키려는 평등주의적 요구는 결국 역설적으로는 근대적 평등이 구현되어 있는 '아무나/누구나'의 자리를 지우거나 최소한 부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탁월함을 '특이성'과 바꿔도 무방하다).

랑시에르를 따라 이렇게 고쳐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탁월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설은, '모든 것이 모든 사람 안에 있다'는 평등의 '조건'에서 그 모든 것을 탁월함으로 환원시키고 결국, 그 탁월함이라는 자격에 대한 요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탁월함이라는 자격 없이도 혹은 그 자격을 떠나서 모든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곧 평등의 '실천'이라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탁월함에 대한 평등주의적 요구는 (대중의) '인정투쟁과 자기경멸'(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악순환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6. 맺으며

▲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히로세 준 지음, 김경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이처럼 비판과 진단이 곧 해결책이 되고 마는 그 한계는 묵시담론과 종언담론을 포괄하는 비판담론에 내재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비판의 대상을 전면화하고, "헤겔이 말했듯이 하나의 개념은 그 지시대상이 위협에 직면하여 종말에 가까워질 때, 그것이 변해가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공간의 생산>(앙리 르페브르 지음, 양영란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7쪽)는 의미에서의 이 비판 담론은 바디우의 말처럼 '패배의 시학'이나 '패배의 철학'에 가깝다. 묵시와 힐링 사이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이 담론에 대해 오히려 "그 자체로 진리들이 되는 데 주저했던,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유들에 대해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수단을 정교화하는" (바디우, <세계들의 논리들(Logiques des Mondes)>) 그런 철학이 시급한 게 아닐까?

아마도 이 철학은, 결국엔 세상 물정에 밝다고 자처하는 이조차 발목 잡는 억압적인 현실 논리 대신에 늘 저기에 있었던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알아보는' 그런 철학이 될 것이다. 예컨대 공동체와 사회의 법과 규범이 인준하는 욕망 체계에는 나타나지 않는 그런 사랑을 알아보는 철학, 당분간은 이것을 '비평으로서의 철학'으로 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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