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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는 서촌, 뒷이야기가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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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뜨는 서촌, 뒷이야기가 궁금해?

[프레시안 books] 최종현·김창희의 <오래된 서울>

이 책 <오래된 서울>(최종현·김창희 지음, 동하 펴냄)은 지금의 서울이 고려시대 남경으로 완성되던 순간, 고려 숙종10년(1104년)을 기점으로 서울을 들여다본다. 고려인들은 개성, 평양, 서울을 중경·서경·남경의 핵심 도시로 정해 경영했다. 숙종이 개성에서 남경에 올 때 묵을 행궁을 지은 자리가 조선시대에 와서 경복궁 대궐터로 계승되었다.

저자들은 서울의 역사가 조선 건국과 함께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를 넘어선다. 또한 2000여년 전 백제가 건국한 한강변 위례성 자리도 서울 사대문 안과 직접 연관은 없는 만큼 그것도 제외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남경이 된 이후부터 서울의 흔적을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방법은 고려 때 개성에서 서울로 오던 길을 찾아보는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수백 년 된 길은 공공재가 되어 잘 변하지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정치적 상황으로 왕들이 남경을 자주 찾지 않았다 해도, 이곳은 왕실의 사냥터이자 양주 회암사 같은 불교의 큰 사찰들이 한강과 북한산을 끼고 자리 잡고 있어서, 각종 불교 의례차 개성으로부터 서울 남경에 오는 길은 계속 다져져 있었다.

▲ <오래된 서울>(최종현·김창희 지음, 동하 펴냄). ⓒ동하
<오래된 서울>은 고려 때 서울이 불교권에 편입된 지리적 연유를 나옹선사에게서부터 찾아 제시한다. 삼각산과 한강, 임진강이 위치한 곳을 불교가 발흥할 터로 잡아 양주에 창건한 회암사는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참여하고 서울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한 무학대사의 절이기도 했다. 불교는 그렇게 조선 건국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지만 조선 역사는 불교적 영향을 기술하는 데 인색했다고 했다. 서울의 역사를 고려 남경시대부터 보는 이 연구는 학계 최초의 발표이다.

고려 때 길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인 부분으로 보인다. 지도와 지형 연구를 통해 개성에서 서울까지의 길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북쪽과 동쪽 두 방향에서 접근하는 고려시대의 길이 있었다. 개성에서 파주로 내려와 홍제동으로 해서 지금의 창의문 고개를 넘는 가파른 지름길이 그 하나이다. 또 하나는 파주에서 양주 회암사를 거쳐 동쪽의 평탄한 길로 들어와 청계천을 끼고 지금의 서울 도심을 통과하는 길이다. 이 길에는 서울 입성의 마지막 관문인 남경역이 있었다. 바로 지금의 안암천 옆 대광고등학교가 있는 언덕이라고 한다. 후일 조선시대 동쪽 관문인 동대문이 이 부근에 세워졌다. 안암동 남경역으로 들어온 행인은 청계천을 끼고 익선동 길로 해서 남경행궁에 도착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 창의문에서 자하문 터널 남쪽 옆으로 나오는 길을 서촌 탐색차 걸어본 적이 있다. 창의문 앞에서 벼랑 아래 평지로 가파르게 내려가 빌라 동네를 통과해 자하문 대로로 나오는 길이다. 자하문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산으로 막힌 고갯길이고 물길이던 평지를 복개해 만든 도로라고 한다. 빌라 동네 동구 밖 400미터 길을 걷는 느낌이 아늑하면서도 양옆의 북악산과 인왕산이 이마에 닿을 듯 거셌다. 이 책을 보고서야 비로소 고려시대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오래된 느낌이 어디서 온 것이었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저자들은 오랜 도시 연구를 통해 이 고려시대 길의 존재를 밝혀냈다. 사람들은 이런 연구에 의해 한발씩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 인왕산 아래 자하문로변. ⓒ동하 제공

익선동 고려의 길도 그러하다. 옛 사람이 추녀 밑 들창 가에서 비를 피해 서있던 그 길, 지금도 누군가는 낡아서 납작해진 익선동의 거미줄 같은 길을 걸으면서 현대의 도시 계획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눈치 챌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역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지역은 재개발된다고 한다. 여기 남은 서울의 오랜 흔적도 곧 사라질 것이다.

길 이야기가 서론처럼 이어지다가 책은 경복궁 서쪽 동네 서촌 이야기로 접어들어 간다. 이 책이 '오래된 서울' 시리즈의 첫 권이면서 왜 굳이 서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지가 흥미로웠다. 두 저자는 이곳이 조선 초부터 지금까지 실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자리 잡고 이야기를 남긴 터라 그렇다고 썼다.

사실 이곳 서촌의 분위기는 인왕산의 존재와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으로 출입하는 계층의 주거지라는 조건이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서촌은 서울 사대문 안의 주거지로 오랜 전통을 이어오면서 서울의 핵심적인 기질 한 부분을 형성했다.

이곳은 조선 600년간 최고 권력의 변천이 눈에 보이고 미술사적으로도 접근 대상이 되며, 문예가 일어나고 가장 역동적인 사회 계층이 태동한, 서울 연구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서촌에 집중된 개인적인 감상서부터 자료 발굴과 예술, 기록, 학문, 전시회와 연구단체에 걸치는 방대한 작업이 지금도 끊임없이 이뤄지는 곳이다. 서촌을 찾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 두 저자 또한 이 책을 위해 지도와 그림에 나오는 지점을 정확하게 각도를 맞춰 찾아내려고 상당한 발품을 들였다고 했다.

서촌에 살았던 인물 이야기는 기존에 많이 알려진 사람들부터 새롭게 알아낸 존재들까지 언급된다. 거대한 바위의 인왕산과 세찬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있어 풍광이 빼어난 이곳은 조선 건국자 왕족용 집터로 처음에 지정되었나 보다.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태종 임금이 된 이방원의 집이 통인동에 있어서 세종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 후 반정으로 왕좌에 오른 인조와 중종도, 장자가 아닌 열외의 신분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른 효종, 영조도 여기서 태어났다. 서촌 태생으로 후일 왕이 되는 운명으로 전환된 인물들이 많아서 그들의 집터인 수많은 궁집이 등장하는 역사적 풍운도 언급된다. 이 동네엔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지리설도 있어 이 터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이 당대에 꽤나 화제였을 것이다.

▲ 삼성미술관 LEEUM이 소장한 '한양도성도'. ⓒ동하 제공

왕권만이 오간 것은 아니었다.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에게서 비롯된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15세기 초 이곳에서 나왔다. 세조에게 죽임 당하기 전 안평은 꿈에 박팽년 등과 경치가 좋은 동네를 산보한 뒤 그 내용을 그림으로 엮어내게 하고 김종서 등 23인이 그림에 붙여 글을 남겼다. 후일의 연산군과 정조까지, 왕자의 풍류로 유명한 이곳의 봄 경치는 지금 남아있는 것 이상 아름다웠던 듯하다.

최근에 방송 드라마로 선보인 <마의>에서 고양이를 끼고 산 효종의 딸 하나가 여기 서촌 사직단 앞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이 책에 나왔다. 그런데 마의이자 어의 백광현도 이곳 서촌 사람이었다는 것이 2011년 역사 박물관의 서촌 특별전에서 공개됐었다. 방송극에서 이들이 사는 서촌이야기가 혹시 묘사될까? 했는데 이 지역까지는 눈길이 닿지 않는 듯했다.

왕족에 이어 벼슬하는 사대부들이 경치 좋은 이곳에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장동 김씨(안동 김씨의 서울 파벌)가 옥인동·청운동 일대에 살았는데, 그 터를 일찌감치 마련해 그들에게 물려준 이가 해인사를 중수하고 팔만대장경도 인출하며 여러 가지 평을 들었던 학조대사란 사실은 처음 공개된 것이다. 다만 이들의 영광이 시시콜콜 서술되면서도 그보다 더 나아간 시대에 고종과 흥선대원군 손에서 끝장날 때까지 누리던 세도정치의 장소로 고스란히 남아있는 석파정 현장은 그 비중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조선 후기 송석원이란 이름으로 천수경 장혼 등 중인계층의 시와 그림의 문예 운동이 일어난 것도 서촌에서였다. 그것은 인왕산이란 거대한 풍류의 장소와 중인들의 시대적 각성이 있어 가능했던 것인지 모른다. 정조시대란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여기에서 김인문과 김홍도가 그들의 시회(詩會)모임을 그린 걸작이 나오고, 김정희의 글씨, 정선의 수많은 서촌 풍경 그림, 그 외 수많은 예술가와 그 작품이 등장한 것은 이미 알려진 대로이다. 이 책에서는 그림의 해설에 정성을 기울여 화가의 시각을 찾아내려 하고 문예 운동의 세밀한 부분까지를 추적했다. 중인 세력의 성장은 서촌에서 유난히 돋보인다.

이 서촌 터가 최고 권력자의 세거지로 주인이 바뀌어가며 시대를 대변한 것도 그동안의 숱한 서촌 이야기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과 이 책의 소개와 다르지 않다. 김씨 가문을 뒤이어 나라가 망하던 한말 대표적인 권력자가 이 지역을 점령해 자취를 남겼는데, 묘하게도 수십 년 뒤에 이완용의 넓은 집터도 윤덕영의 프랑스식 저택도 자취가 사라져버렸다.

이들과 대척점에 서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망명했으며 온갖 애를 쓰다 스러진 이회영과 김가진이 등장한다. 청운동 김가진의 집터가 후손들을 젖혀버리고 끝내는 이들의 치열한 생을 알 리 없는 일개 교회에 불하돼 버렸다는 사실은 현대사의 한 성격을 유추케 한다. 서촌은 이렇게 오늘날에도 권력과 밀접한 면모를 지녔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막상 더 흥미가 가는 것은 권력의 운용이 아닌, 현대 일반인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이 동네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사람들 이야기에는 중세와 다르게 여성들의 삶도 다뤄졌다. 시인 이상의 집터가 남아있고 그의 동행격인 화가 구본웅의 그림이 자취를 전한다. 한때 이상의 부인이던 변동림은 '그 시대(일제 강점기)엔 아무도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최초의 한국 복식사를 쓴 이여성과 화가 이쾌대가 형제간으로 이 동네에 살다가 월북한 과정, 김수임과 앨리스 현 두 여성이 모두 6.25 전쟁 당시 미군정과 연관돼 있다가 좌우익 대치의 정국에서 비극적 생을 맞은 것, 전장으로 떠나면서도 윤동주의 시가 적힌 원고를 필사적으로 간수해온 친구 정병욱의 이야기, 이중섭이 모든 희망을 걸었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전시회에서 그림 값도 떼이고 더 이상 추스를 수 없이 절망하여 죽은 곳.

광풍을 머금은 현대사가 골목골목 배어있는 틈에서 이들이 살며 느꼈을 사랑과 처절한 몸부림, 이런 것들이 예술사의 한 송이 꽃처럼 남았다. 이들은 살아생전 그들 정신의 승리를 한 순간이라도 확신했을까? 이 책에서는 남은 이들의 회고로 마무리된다.

이런 사실을 발굴해 낸다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공력과 집중과 확인 작업을 거쳐야 가능한 것인지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리고 여기 나온 사람들의 수십 배가 될 무수한 인물 중에서 책 규모에 들어갈 만큼만 추려 소개한 것임에 틀림없다. 서울 태생이건 아니건, 서울은 찾아드는 모든 사람에게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야수 같은 바람에 맞장 떠 상대하지 않으면 생이 진전할 수 없는, 생존의 장이기도 하다.

그런 서울에서 오래된 길 이곳저곳을 거닐어 보는 일은 다분히 탐미적인 영역이다. 이 책은 그러한 행보에 사실적 근거를 붙여준다. 서울이 900년 역사를 가진 도시임을 역설할 자료를 찾는 일에 여러 사람이 협력했다는 과정이 의미 있어 보이고, 수백 년간의 인물들 삶을 엮어내기 위해서는 두 저자가 필요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어떤 책 하나, 그림 하나, 전시회 하나로 서울의 전모를 다 담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힘이 생기고 서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도시로 더욱 완성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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