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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나오지 않는 음악, 진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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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음악, 진짜 음악이다?

[청춘의 고전] 1강 <장자>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출판사 알렙이 기획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 시즌 쓰리(3)가 지난 1월 문을 열었다. '청춘의 고전'은 지난 두 해 영화와 미술을 고전과 함께 읽어가며 젊음의 공간 홍대 앞에 철학의 열기를 불어넣었다. 이번 시즌 3는 정독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음악의 선율과 철학 고전의 만남을 시도한다. 1월 9일 첫 강을 시작으로 6월 30일까지, 매월 둘째, 넷째 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총 12강으로 진행된다. (☞강의 커리큘럼 바로 가기)

국악과 오페라, 재즈와 힙합, 비틀즈와 싸이까지, 각양각색의 음악들이 어떤 고전을 만나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 첫 강좌는 침묵의 음악으로 불리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장자>의 음악론을 겹쳐 읽으며 음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 1월 9일, 뜬금없는 성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로 시작된 전호근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강의로 들어가 보자. (필자 알라딘 인문 MD 박태근)


장자가 들었던 하늘의 음악

조금 전 들려드린 소리는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입니다. 왜 이 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는지를 염두에 두시고 오늘 강의를 따라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들어볼 음악은 음악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음악입니다. 장자는 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입니다. 그는 전국시대 사람인데, 그때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그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게 바로 맹자와 장자입니다. 맹자가 활동했던 무대는 천하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는 거지요. 장자는 반대로 천하를 다스리지 말아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활동 무대는 강호입니다. 강호는 강과 호수입니다. 강과 호수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물고기입니다. 물고기가 강과 호수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사람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이게 장자의 도입니다. 지향이 다른 거죠.

그래서 맹자와 장자가 지향하는 음악도 다릅니다. 우선 공자는 고전파 음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자는 엄격한 양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클래식이 아니면 쳐주질 않았는데, 맹자는 클래식과 유행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행가라 하더라도 백성들과 함께 즐기면 높은 정치적 이상을 품은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했고, 클래식이라 하더라도 여민동락(與民同樂)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봤습니다. 공자와 비교하면 대중지향적인 음악가라고 봐야겠지요.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까, 이걸 중요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장자는 공맹과 또 다릅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음악론은 천뢰(天籟)입니다. 하늘 천(天)은 자연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성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다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신성한 존재의 대표가 바로 천입니다. 초월의 영역에 있는 거죠. 유가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하여 이를 내면으로 끌어들였는데, 장자는 이를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자기가 자유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물론 장자는 연주를 하진 않았으니 그 음악론은 텍스트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음악론과 일치하는 오늘의 음악을 찾은 겁니다. 바로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입니다. 우리는 근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음악을 듣는 거지, 아마 장자 시대였다면 4분 33초가 아니라 훨씬 길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웃음)

인간의 음악을 넘어서려는 시도들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듣기 전에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아까 천뢰 가운데 천이 자연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자연을 잘 표현한 음악, 뭐가 있을까요? 비발디의 '사계', 슈만의 '봄',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모사는 우리를 감탄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치 ~ 같다', '마치 ~처럼'이라는 겁니다. 장자와 존 케이지는 여기에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이따 들어볼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도 마찬가지고요. 우선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들어보겠습니다.

베토벤, '전원 교향곡', 4악장 폭풍, 5악장 폭풍이 지나간 후의 평화

초반부에 팀파니를 세게 치는 소리는 천둥과 번개를 뜻하고, 현이 떠는 소리는 비바람이겠지요. 바이올린 고음으로 빗소리를 표현하기도 하고요. 5악장에서는 목동의 풀피리 소리도 들리고, 바순으로 묘사한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듣는 게 작곡가의 의도에도 맞고 적당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악에 나온 새소리가 정말 제대로 된 새소리인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올리비에 메시앙입니다. 메시앙이 '새의 카탈로그'라고 하는 작품을 남겼거든요. 그중에서 꾀꼬리를 들어보겠습니다. 피아노 작품입니다.

올리비에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메시앙은 우리가 꾀꼬리 소리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우리 입장에서 마음대로 묘사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면서, 정말 새 입장에서 새소리를 표현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관점에서 만들어낸 게 이 작품입니다. 새가 듣는 새소리와 우리가 듣는 새소리가 다르다는 말이지요. 같을 리가 있겠습니까. 같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흔히 프랜시스 베이컨을 이야기하면서 종족의 이돌라(idola, 우상)를 이야기하는데, 이게 바로 종족의 이돌라입니다.

그럼 이제 오늘의 주인공, 존 케이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 귀에 들리는 대부분은 소음이다." 방금 들은 꾀꼬리 소리가 사실 소음에 가깝지요. 우리가 전통적 음악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듣기가 힘든 겁니다. 한 시간이 넘는 베토벤의 음악은 들어도, 메시앙의 8분 남짓한 꾀꼬리 소리는 듣기가 힘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귀에 들리는 대부분은 소음입니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하면 소음은 우리를 괴롭힌다." 어떤 사람에게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마침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이제 '4분 33초' 연주 영상을 함께 보실 텐데요.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음과 침묵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이 둘로 작곡을 하는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게 있으면 안 나는 것도 있는 겁니다. 배경에 흐르는 음악과 앞쪽에 나오는 음악의 주파수가 같으면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고요함이라는, 정적이라는 게 없으면 음악이 들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조합해서 작곡을 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티비를 통해서 이 공연을 보는 분들은 티비의 음량을 줄이고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끝나고 나면 또 자막이 나옵니다. 이 공연에 피아노 연주자로 나온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의 이야기인데 "이 곡을 처음 연주할 때,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이 와 있었습니다. 고함을 치고 대소동이 일어났지요." 이게 4분 33초의 악보입니다. 무려 3악장으로 나뉩니다.(웃음) 이걸 악보로 만들어서 팔아먹었어요. 대단하지요.(웃음) 그럼 감상해보시지요.


▲ 존 케이지 '4분 33초' 악보.

존 케이지, '4분 33초'



어떠십니까? 공연 당시에는 난리가 났답니다. 왜냐하면 입장료가 있었거든요.(웃음) 데이비드 튜더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저 사람도 4분 33초 동안 시계만 보다가 일어선 겁니다. 일종의 사건인데요. 오늘은 여러분들은 이 곡이 어떤 건지 알고 보셨기 때문에 사건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만약 이런 걸 처음 경험했다면 그건 사건이었겠지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기다릴 때의 정적, 기침 소리, 기대감, 설렘이 있을 테고요. 그렇게 긴장하고 기다리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고 연주도 시작되지 않으면 처음에는 갸우뚱하겠지요. 그러다가 웃음소리도 날 것이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고, 걱정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다양한 상황이 존 케이지가 의도한 겁니다. 소란이 크면 클수록 음량이 큰 음악이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소음을 음악 속으로 끌어온 사람이 또 있습니다. 함께 들어볼까요.

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고가 사다리 차의 종소리

이 곡에는 조가 없습니다. 장조나 단조가 없는 정말 다른 음악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소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지요. 그런데 아이브스는 우리가 실제 듣는 소리는 이렇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는 거죠. 만약 영화를 만들 때 우리 일상을 그대로 담아서 스크린에 올리면 깜짝 놀랄 겁니다. 실제 그런 영화가 있기도 하고요. 바로 그런 식의 음악인데, 그래서인지 1901년 즈음에 이 음악을 작곡했는데 50년이 지나서야 처음 연주가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거지요. 차례로 들어본 이런 음악들이 음악의 근본에 대해 물음을 던진 사람들의 작품인 겁니다.

인간의 음악, 대지의 음악, 하늘의 음악

그러면 이제 텍스트 속에서 이런 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장자의 음악론에 관한 대목을 해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물론(齊物論) 제1장인데요, 하늘의 음악은 소리가 없다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정말 소리가 없거든요. 존 케이지 식으로 하면 소음일 수도 있겠고요. 앞에서 들은 음악을 통해서 소리가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텐데요. 소리 없는 것을 어떻게 소리가 나게 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어떻게 들리게 할 것인가, 이게 존 케이지가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장자가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신라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까 성덕대왕 신종 소리를 들려드린 겁니다. 같은 발상입니다.

남곽자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장자>에서 도를 아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성곽 남쪽에 사는 사람인데, <장자>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도를 아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장자>에서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비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나옵니다.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의 몸뚱이는 참으로 말라버린 나무와 같아질 수 있으며 마음은 참으로 불 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있는 사람은 전에 안석에 기대 있던 사람이 아니십니다."

남곽자기가 현실의 세계가 아닌 도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달라 보이는 거죠. 그 도의 세계를 음악에 빗대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음악에 빠져있을 때 상태는 다르잖아요. 그걸 얘기하는 대목입니다. 다음은 남곽자기의 대답입니다.

"연아, 너의 질문이 참으로 좋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는데, 네가 그것을 알아차렸구나! 너는 사람의 음악은 들었을지라도 아직 대지의 음악은 듣지 못했을 것이며 대지의 음악은 들었어도 아직 하늘의 음악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겁니다. 남곽자기가 도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걸 음악을 통해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를 낮춰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베토벤 음악을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베토벤이랑 동일한 수준에 갔다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뢰(人籟), 인간의 음악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뢰(地籟), 대지의 음악은 무엇일까요.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의 음악, 대지의 음악, 하늘의 음악에 대해 묻는 부분입니다. 남곽자기의 대답을 잘 들어보면 음악에서 어떤 것이 표현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안성자유가 묻습니다. "감히 그 이치를 여쭙습니다."

"대지가 숨을 쉬면 그것을 바람이라고 하지. 이 바람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내. 너는 저 멀리서 울리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높은 산 깊은 숲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 넘는 커다란 나무의 구멍이,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어떤 것은 입 같고, 어떤 것은 귀 같고, 어떤 것은 가로 나무 같고, 어떤 것은 나무 그릇 같고, 어떤 것은 절구통 같고, 어떤 것은 깊은 웅덩이 같고, 어떤 것은 얕은 웅덩이 같은데, 거기서 물이 급히 부딪치는 소리, 화살이 아는 소리, 꾸짖는 소리, '헉헉' 들이마시는 소리, 외치는 소리, 볼멘소리, 웃는 소리, 아양 떠는 소리가 나지. 앞의 바람이 우우하고 불면 뒤의 바람이 따라서 웅웅 소리를 내. 가벼운 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을 하는데, 사나운 사람이 지나가면 바로 모든 구멍이 텅 비어서 고요해지지. 너도 바람이 지나간 위에 나뭇가지들이 흔들흔들 살랑살랑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겠지."

이게 바로 장자의 지뢰입니다. 흔히 자연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대대로 문장가들이 이 부분을 흉내 내어 글을 짓습니다. 박지원은 시골 사람 코 고는 소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정말 대단합니다. 코 고는 소리를 물 끓는 소리, 톱질 하는 소리, 새끼 돼지가 새근대는 것 같다며 다채롭게 묘사하거든요. 아마 올리비에 메시앙이나 찰스 아이브스 같은 사람이 박지원을 만났으면 아주 좋아했을 겁니다. 자기처럼 소리를 들을 줄 안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귀가 열려 있지를 않지요.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겁니다.

안성자유가 이렇게 말했다. "대지의 음악은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이고, 사람의 음악은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인 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남곽자기가 이렇게 대답했다. "불어대는 소리는 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각자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데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여기지. 그렇다면 그 구멍들이 성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누구일까."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를 내게 하는 존재가 따로 있느냐 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남곽자기의 말에 따르면 이게 바로 천뢰(天籟)인 겁니다. 남곽자기는 불어대는 소리가 만 가지로 같지 않다고 했는데 구멍의 생김새에 따라 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멍들로 하여금 각자의 소리를 내게 하는 존재는 그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노자>에도 나오는데요. '태음(大音)'이라는 겁니다. 노자에는 태음과 비슷한 층위에 있는 것들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대방무우(大方無隅)입니다.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네모를 네모라고 부르는 건 네 개의 모퉁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가장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 변의 길이가 무한이면 모퉁이가 없겠지요. 이게 대방무우입니다. '태음희성(大音希聲)'이 같은 이야기인데, 가장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다.

하늘의 소리를 담아낸 성덕대왕신종

처음에 들었던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다시 떠올려보지요. 성덕대왕신종은 그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주조를 시작해서 다시 그 아들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됩니다. 이 종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요.

지극한 도는 형상 밖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지극한 도는 보이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다. 커다란 소리가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들으려 해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소리가 나는 종인데, 거기에 새겨진 글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소리로 만든 게 되겠지요. 장자가 이야기한 천뢰나 노자가 이야기한 태음을 신라인들이 작곡한 게 성덕대왕신종인 겁니다. 자기 아버지 성덕왕의 훌륭한 덕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지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에, 종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도록 주조한 겁니다. 이게 신라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소리에 대한 해석입니다.

다시 장자로 돌아가면 하늘의 음악은 사람의 음악과 대지의 음악 각각이 소리 나게 하지만 자기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연주하지 않는 음악이지요. 존 케이지의 발상과 같습니다. 소문이라고 하는 뛰어난 연주자가 있었는데, 장자는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한 곡만 연주하는 것이고,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으면 모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연주회에 가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었다고 하면 그 한 곡을 듣고 온 겁니다. 그런데 어떤 연주에 가서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면 수많은 음악을 듣고 온 거지요. 같은 말입니다.

이처럼 장자와 노자가 말한 음악을 현대 음악에서는 존 케이지나 올리비에 메시앙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로 치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입니다. 제가 들려드린 소리는 1964년에 녹음된 소리입니다. 아마 이런 음악들을 한 번에 연주한 연주회는 없었을 겁니다.

장자는 자기 논리의 탑을 엄청나게 쌓아올리고 나서 다시 그걸 무너뜨립니다. 멋진 해결책을 내놓는 게 멋진 철학이냐, 아닙니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내놓는 게 철학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장자>를 읽는다는 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해결책이 중요해서 그걸 읽는 게 아니라 던진 질문이 유효하다는 말인 겁니다. 아마도 오늘 강의의 질문도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어떤 점에서는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직접 마주하는 것. 그게 바로 아이브스의 음악이나 장자의 음악론이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치열하게 이런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감상을 하신다면 더 많은 감동과 음악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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