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말이다.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피곤할 뿐 아니라 무척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피해의식이 쌓이다 보면, 어느덧 섣부른 신뢰가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걸 깨닫게 된다. 게다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집단인 경우, 상처와 증오는 몇 갑절 더 깊은 것이 되고 만다. 깊고 오랜 집단적 상처를 품고서는 여유로운 호흡으로 회화를 감상하듯 문제를 탐미할 수 없다. 반대로 독일의 낭만주의 미학자 졸거(Karl Wilhelm Ferdinand Solger, 1780~1819)가 했다는 다음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쉬울 것 없는 여유로운 시각으로는 사무치는 결핍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잔인한 전쟁도 멀리서 보면 조화로운 풍경으로 변한다."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마티 펴냄)라는 책은, 착한 사람이 한다는 착한 일을 피곤하게 의심하는 책이다. 의심의 대상은 소로스로 대표되는 금융 자본이 자선과 교육 사업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이다. 또 그 과정이 20세기 초 카네기 등 산업 자본이 전통적 젠트리 계층에 맞서 사회적 명망을 얻게 된 과정과 놀랍도록 유사함을 지적한다. 요약하자면, 나쁜 것들이 못된 짓만 따라한다는 얘기다. 그리고는 요즘 대세인 '윤리 경영' 혹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담론을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묘사한다면, 이 책은 현대 자본주의의 훌륭한 미시 역사서이자 사회과학적 분석서라고 총평할 수 있겠다.
안철수는 대통령이 될 뻔했다
▲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니콜라 귀요 지음, 김태수 옮김, 마티 펴냄). ⓒ마티 |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에게는 여느 기업가와 다른 점들이 있었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걱정했고, 족벌기업의 수탈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다. 그것이 그렇게도 강렬한 희망을 주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당대의 안철수가 있었을 텐데.
이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문국현, 유일한,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언제나 존경받는 기업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쁜 자본'을 넘어서겠다고 나섰는데, 왜 누구도 '약자의 몰락과 고립'이라는 우리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했을까. 게다가 삼성, 현대, 포스코 같은 대기업에서도, 이제 윤리 경영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그들의 선한 뜻이 잘만 실행되면, 드디어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저자의 말을 소개한다.
"저자는 자선사업을 향한 금융 자본의 대대적인 전향을 자본가 개인의 도덕적 참회나 책무의식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세간의 해석을 넘어서는 통찰을 보여주면서, 이 현상을 금융 자본이 스스로 찾은 지배의 정당화와 영속화의 특정한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8쪽)
그래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선한 의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 병일 수도 있으니까. 배배 꼬인 심사에는 자기 같은 마음만 보이는 법이다. 그렇지만, 의도가 선하므로 한결 같이 믿어주는 건 또 옳은 일일까. 글쎄. 대책 없이 순진하면 자기뿐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 고생한다는 게 문제다. 대략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부자들의 선행을 대하는 것이, 독서 여행을 시작하는 나그네의 태도로 온당할 듯하다.
"위로부터의 선의가 세상을 치유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분노가 차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골드만삭스와 프리티 우먼 - 원조 자선가의 몰락과 금융 자본의 부상
착한 기업인이 대단한 자선을 펼치는 모범적 사례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 젠트리가 물러나고, 카네기와 록펠러 등의 신흥 '산업' 자본가의 지배가 확립된 시점이었다. 저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당시 노동자 계층은 유례없는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문제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상당한 투쟁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은행 등의 '금융' 자본은 철저히 '산업' 자본에 협력하고 있었을 뿐, 힘을 견주어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20세기 초 미국의 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신뢰와 호혜에 기반을 둔 상생적 관계를 구축했다.
이들(상업은행)은 수익만을 좇는 비인격적 사업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정 주치의'에 가까웠다. (…) 은행과 고객의 관계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사회적 친밀감에 기초했다. (…) 골드만삭스의 경우, 일부 기업 고객은 7대, 심지어 8대에 걸쳐 이 은행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며 "은행장들은 집안의 유산처럼 전임자에게서 승계 받은 고객을 다시 후임자에게 넘겼다." (42~43쪽)
그러다 모든 것이 돌변한다. 금융 자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90년에 개봉한 줄리아 로버츠의 출세작 <프리티 우먼>에는 매력적인 독신남 에드워드(리차드 기어)가 등장한다. 극중에서 그의 직업은 기업 사냥꾼인데, 그것은 재정이 어려운 회사를 인수해서 종업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생산 설비를 분해해서 다시 파는 것이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수법은 잔혹한 약탈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거래가 실제로 회사의 기술적 전통과 직원의 경제적 기반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영화가 1990년에 개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굴복시킨 역사적 전환이 1980년대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순진한 기대와 '진보적' 금융 자본의 배신 - 해방군이 점령군으로
왜 그리 짧은 시간에 그리도 대단한 변혁이 일어났을까. 예전부터 대립하던 '산업' 자본과 노동계층은 그 과정에서 대체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산업' 자본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할 당시, '금융' 자본 측은 노동자와 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혁명을 표방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시민 중산층은 산업 자본과의 오랜 투쟁에 지친 나머지, 금융 자본을 해방군으로 반기는 우를 저질렀다.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닌가! 금융 자본의 노련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인해, 한동안 노동과 시민 사회에서도 금융 자본의 선전을 사회 진보로 여기며 반기기까지 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참여연대와 장하성 펀드가 선의로 추구하는 바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융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대립하지 않고 (…) 경영자 및 사장과 대립한다. 생산과 무관해 보이는 금융 자본은 오히려 순수해 보인다. 즉 금융 자본은 산업 자본처럼 노동의 직접적 착취의 난폭함에 물들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 능동 자본과는 달리 금융 자본은 이렇게 '좋은' 자본이며 전형적인 진보적 자본이 된다. (28쪽)
그러나 이 전쟁의 본질은, 노동에서 착취한 잉여가치의 주인을 정하는, 자본가끼리의 제로섬(zero-sum) 패권다툼일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승자가 되든 최대의 피해자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운명이었다.
이러한 전환이 중산층과 노동자와 빈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이제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쌍용자동차와 외환은행에서 벌어진 일들은, 1980년대 이래 미국에서 수없이 이루어진 비극의 되풀이일 뿐이다.
금융 자본의 위기와 생명 연장의 꿈 - 자선과 사회적 책임의 표절
그러나 80년대의 승리자인 금융-주주 자본주의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들이 몇몇 벼락부자를 탄생시킨 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뒤늦게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의 규제 움직임은 경계할 만한 것이었다. 의심을 받게 된 '금융' 자본은 즉시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힌트는 그들의 적이었던 '산업' 자본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앞선 시대, 카네기·록펠러 등 '산업' 자본가들이 철도, 금속, 석유 제국을 건설했을 때, 그들의 고민 또한 '도덕적 정당화'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국 건설사는 사기와 투기로 얼룩졌고, 사람들이 그들에게 붙여 준 별명은 '도적 남작들'이었다. 그러자 도적 남작들은 산업 현대화를 일군 계몽 기업가로 자신을 부각시키며 현대적 자선 사업과 자선 재단을 발명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하려 했다.
표절을 불사한 80년대 금융 자본의 필사적인 노력은 결국 보상을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그 보답은, 자본의 대리인에 불과했던 전설적 투기꾼들이 주가 조작과 사기죄로 처벌받음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칼 아이칸, 마이클 밀켄 등의 사기꾼들은, 금융 자본주의의 도래를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셈이 되었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은행과 연기금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말이다.
산업 자본의 때늦은 깨달음 - 소유자의 횡포
80년대 '주식 소유자-금융 자본'의 공격에 직면하자, '산업' 자본은 납품업자·지역 공동체·노동자를 지키는 사회적 가부장으로 자신의 위상을 수정했다. 그리고 '금융' 자본을 향해 '소유자의 횡포'를 그만두라며 항의했다. 이는 대단히 드라마틱한 자기모순이었는데, '소유자의 횡포'란 바로, 산업 자본 자신에게 대항하던 노동자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모르는 산업 자본가의 표절은 다음의 뻔뻔한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납품업자, 기관, 고객, 지역 공동체가 우리(산업 자본)와 연결되어 있다. 이들 중 아무도 주식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주주가 누리는 민주적 자유 같은 것을 향유하지 못한다. 이들은 주주보다 더욱 기업에 의존한다." (100쪽)
기업에 의존하는 '기업과의 일체성'으로 본다면, 노동자만큼 직접적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도 없다. 그런데도 산업 자본가들은 기업 '소유자'로서의 권력을 노동자들에게 원 없이 휘둘렀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카네기는 철강왕이 된 후에도 근로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고 봉급을 삭감했으며, 1892년 홈스테드 공장의 점거 파업을 유혈 진압하면서 10명의 사망자와 60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만일 그 시절부터 산업 자본가가 납품업자·고객·지역 공동체를 살뜰히 챙겼더라면, 노동자들도 '진짜' 소유자의 공격으로 어려움에 빠진 1980년대의 산업 자본가들을 조금은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법적으로' 주식회사의 진짜 소유자는 주주다. 이 점이 타당한지는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착한 조지 소로스가 벌이는 특별히 착한 일?
유대-헝가리계 미국인 조지 소로스는 외환 투기를 통해 20조 원의 재산을 모았다. 그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전 세계에 걸쳐 20명 남짓밖에 없을 정도다. 그런 그가 1991년부터 '열린사회 재단'을 설립하여,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자선 사업을 추진했다. 마치 자신의 성공을 가져다 준 금융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휴머니즘과 박애주의로 전향이라도 한듯 말이다.
(조지 소로스)의 인생 이력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시장의 탈규제로 인해 최근에 형성된 금융 귀족이 과거 19세기 산업 엘리트의 정당화 전략, 그 중에서도 교육 제도에 대한 투자를 어떤 방식으로 승계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선은 상승하는 사회 계층이 자기 계층의 재생산 문제에 봉착했을 때 권력 행사의 정당한 자격과 관련된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115쪽)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소로스의 자선도 일종의 표절이다. 그러나 선명한 차이점도 있다. 산업 자본은 물론, 80년대 금융 자본의 자선과 비교하더라도 그 차이는 뚜렷하다. 일단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윤리적 조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 재산의 거대한 스케일만큼이나 그가 벌이는 자선 및 교육 사업의 목표도 전통적 자선의 전망을 훌쩍 뛰어 넘는다.
소로스의 교육 사업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이해해야 한다. 1990년경 워싱턴에 자리 잡은 미국 정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의 정책 결정권자간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후에 이 합의는 '워싱턴 컨센서스'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들은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대외적으로 확산시키려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IMF와 세계은행은 제3세계 국가의 경제 위기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었으므로, 그 목표는 90년대 내내 비교적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었다. 경제 지원의 조건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 도입을 요구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1998년 한국에 대한 IMF의 처방이 대표적 성공 사례였다.
자선 사업을 구상하던 조지 소로스는, 이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그가 구상하던 교육 사업의 비전을 발견했고, 그의 자선 사업을 이에 연동시켰다. 소로스는 국가나 공동체의 총체적 규제에 대한 두려움을 체화한 인물이다. 나치의 박해를 겪었고 런던 정경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칼 포퍼의 사상에 깊이 영향 받은 그의 이력에서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소로스의 사상적 배경은, 자연스레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연결되었다. 개인과 시장의 절대적 자유와 작은 정부는, 절대로 칼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의 적'이 아닐 테니까.
조지 소로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중부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을 설립했다. 이 대학은 사실상 워싱턴 컨센서스의 세계화라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물적 토대였다. 소로스가 추구하는 이런 목표를 위해서는, 환경·인권·개발·젠더 문제 등과 같은 '진보적' 의제가 금융 세계화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 대학의 학문적 프로그램은 이를 위해 세밀하게 고안되었다.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금융 자본주의를 위해 필요한 변화와 대안이 제공되었다. 금융 세계화의 '폐기'를 주장하는 학자들을 '조정'의 전문가로 전향하도록 돕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학문적 성과와 진지한 연구자가 축적되었고, 지금은 다음과 같은 평가에 어울리는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서 자선 사업가들이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투자하여 마침내 계급 대결을 완화시키고 (산업) 자본에 유리한 체제를 구축했듯이, 오늘날 세계화의 주도 세력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세계화 리더 양성이라는 '공통 과목'을 설정하여, 금융 기관에 대한 시민 사회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 (140쪽)
자선 사업의 진정한 위협 - 재분배 체계의 사적 독점
자선 사업의 발명자인 '산업' 자본에게, 초창기의 자선은 의심스러운 치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내야하는 부담금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선 사업이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자선가들은 또 다른 기회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 권력이란 재분배 과정의 사적 독점권이었다. 그것은 부의 재분배 기능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분리하고 사적 처분권의 영역에 붙들어 둠으로써 가능해졌다. 자선의 본질적 이득은 자선에 사용된 재산에 대한 세금 공제이고, 자선에 쓰인 돈은 공제가 아니었다면 결국 국고로 환수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징세를 피한 재산을 아무리 좋은 일에 쏟아 붓더라도, 재분배가 국가 권력의 영역을 벗어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미국이 가진 특징, 즉 극심한 불평등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열리게 되었다. 사회적 연대성의 유지와 재분배는 사회 계층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핵심적 갈등에 속한다. 이런 내용에 대한 결정권을 이해관계 일방 당사자에게 완전히 맡겨 버린 것은, 사회 통합과 공공성 확립을 포기한 것과 같다. 결국 미국인의 교육과 의료와 연금과 주거 문제는 부자들의 선한 마음에 의지하게 되었다.
착한 자본을 믿는 착한 사람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지금까지 살펴본 금융 자본의 논리는 난공불락의 진리로 뿌리 내리고 있었다. 최근의 비참한 파국을 겪었어도 금융 자본주의의 진보성과 그들의 선의에 대한 믿음은 뜻밖에도 여전하다. 그러다 소로스 유의 금융가-자선가에 대한 해맑은 찬사라도 듣게 되면, 지젝의 말이 으스스하게 떠오르는 걸 어쩔 수 없다.
"삶이 (…) 이루는 (…) 파국을 이해하는 열쇠는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춤사위에 있(…)다. 바로 거기에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구조적 폭력이 존재하며, 이 폭력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어떠한 직접적인 (…) 폭력보다 더 섬뜩하다. 이 폭력은 더 이상 구체적인 개인들과 그들의 악한 의도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순수하게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익명성을 띠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김희진 옮김, 난장이 펴냄) 40쪽)
구조적 폭력을 양산하는 착한 자본가의 목록은 끝이 없다. 카네기, 록펠러, 게이츠…. 이쯤 되면 착한 자본에 속아 주는 것도 두렵다 못해 지겨워질 만하다. 문제는 통제 받지 않는 자유 시장과 개인의 변덕에 내맡겨진 재분배 시스템 자체에 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선의에 속는다.
그러나 선한 마음이란 변하기 쉽다. 더구나, '선한 의도로 행하는 강요'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행정적 통제와 민주적 통제를 피하여 이루어지는 자선은, 변심하기 쉬운 연인의 마음과 같다. 오늘의 사랑이 아무리 뜨거워도, 내가 받는 사랑은 결코 나의 권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내일의 사랑은, 전적으로 내 연인의 변덕에 달려있게 된다.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진 소로스의 경우도 그렇다. 소로스가 선의로(그렇다고 믿어주자) 벌이는 자선 사업이 암묵적으로 전파하는 메시지는, 자본주의를 이대로 유지하면서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이다. 금융 자본이 천문학적 수익을 올리는 것과, 노동자와 소외당한 약자들의 불행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환상 말이다.
지나친 선의는 이용당하기 쉽다. 불행히도 그런 선의는 약자의 연대에 균열을 일으키고, 강자의 속임수에 힘을 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민주 공화국의 국가 이성으로 순화된 연대의 힘뿐이다. 그 일을 성공으로 이끈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정도다. 그들은 자본의 선의보다 연대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영웅의 선한 마음에 의지한 다른 나라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제2, 제3의 안철수에게 기대기보다, 맞잡은 이웃의 손을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미의 아쉬움 - 학술과 저널리즘
이 책의 번역자인 김태수는 옮긴이의 글에서 대뜸 이렇게 말한다.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긴 하지만, <조지 소로스는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까>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사회과학 학술서에 속한다." (9쪽)
제목에 속았다면 미안하다. 이런 고백이었구나. 어쩌란 말인가. 이미 본문을 다 읽었는데. 주간지 집어 드는 가뿐한 마음으로 시작하였으나, 도입부에서 날 반긴 것은 부르디외와 라파르귀와 바타이유였다. 아까운 책이다. 재미없는 것은 의미도 없는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전에 언급한 평론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의 고뇌는 따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생활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자의 수고 덕으로 저자의 성찰을 용케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니, 대략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부자들의 선행을 대하는 것이, 긴 독서 여행을 마무리 짓는 나그네의 태도로 온당할 듯하다.
"아래로부터의 분노를 추슬러 차분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위로부터의 선의가 세상을 치유하길 기다리는 것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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