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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남미의 '김일성' 아닌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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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남미의 '김일성' 아닌 '전태일'!

[남미의 눈물] 차베스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차베스를 보는 두 가지 시선

우고 차베스는 "대중의 요구"를 가슴으로 수용한 '포퓰리스트'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더 심화시키고 재구성한 민주주의자였다. 물론 이런 주장에 다른 시각을 가진 지식인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차베스를 합법적 과정을 통한 "전제적 민주주의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흔히 '포퓰리스트'란 단어를 들으면 비민주적인 부정적인 의미로 가득 찬 부패하고 독재적인 정치가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 인식은 1960년대부터 형성된 주류 포퓰리즘 담론이 지도자가 자신의 집권을 위해 무지 몽매한 대중을 선동하고 조작하는 것을 포퓰리즘으로 호명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등 국내의 주류 신문들은 자주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또는 중도 좌파 정부들을 가리켜 "포퓰리즘" 정부로 비난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차베스를 '포퓰리스트'로 부르는 맥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즉, 포퓰리즘을 해석하는 데 있어 학계에서도 주류 담론과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담론이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라클라우는 대중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의 주체적 출현을 중시한다. 그 대중의 출현은 대중이 서로 다른 다양한 그룹들의 사회적 요구들을 서로 접속(학자들은 이를 '접합'이라고 부른다)을 통해 길게 연결 지을 때 즉 "대중의 요구"가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라클라우는 주장한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몇 년 전 우리의 "촛불 집회"에 대해서도 성찰적 인식을 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성격의 대중의 출현을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출현으로 또는 민주주의의 진전이라고 보았다. 4년 또는 6년마다 한 번씩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는 것은 '정치'라는 제도에만 집중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고 오히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이다.

차베스 혁명 기간 중의 다양한 정책 수단들은 바로 이 민주주의를 다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너무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차베스 혁명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도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투쟁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라클라우의 포퓰리즘 담론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수 진보 진영에서 전자의 시각만을 중시한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에 비해 선험적이 아니고 국면마다의 유동적 상황 변화를 전제하는 흐름 즉 헤게모니를 중시한다. 아마도 라클라우가 창조적으로 안토니오 그람시를 계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흔히 "대중의 힘, 위대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대중도 선험적 의미를 내포한 '민중'이 아니라 마치 밀가루 반죽같이 어떤 형태로도 변형될 수 있는 유동적인 의미를 내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대중과 민중은 똑 같이 "pueblo"로 번역되는데 맥락에 따라 정확한 번역이 요구된다.

▲ "차베스는 살아 있다." 우고 차베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베네수엘라 시민들이 카라카스에서 추모 행진을 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차베스 "서거"와 "사망" 사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5일 오후 4시 30분 암으로 서거했다"고 좌파 매체 <레디앙>은 보도했다. 이에 비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망"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차베스의 사진도 매체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차베스의 사망이라는 분명한 사실도 차베스 체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에 따라 그 해석이 판이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의 친 차베스 인터넷 매체인 <아포레아>의 차베스 이미지 사진은 비가 오는데 묵묵히 그 비를 맞고 비장하게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기사 제목은 "생명을 위해 죽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으로 부를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매체인 <아포레아>의 다른 사진은 파나마의 모든 언론 매체가 라틴아메리카의 반 신자유주의 대안 매체인 <텔레수르> 위성 텔레비전의 보도를 받아 차베스 사망을 알렸다고 하면서 파나마의 대중도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와 같이 그동안 "신비한" 베네수엘라 지도자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왔다고 한다.

파나마의 어느 라디오 진행자는 "라틴아메리카가 슬퍼하고 있다"고 했다. 왜? 위에서 언급한 베네수엘라의 인터넷 매체가 라틴아메리카의 작은 나라인 파나마를 부각시키고 있을까? 바로 시몬 볼리바르라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영웅이 주도하여 1826년 파나마에서 열렸던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전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대표가 모였던 "대륙 회의"를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차베스가 그 꿈을 이어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을 추진한 차베스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를 단순한 반미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베네수엘라 중도 우파 계열 신문인 <엘 나시오날>도 베네수엘라의 대학들이 '국장'의 애도에 동참하고 있음을 제목으로 뽑고 차베스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오열하는 대중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성들이 비통해하고 있는 점이다. <한겨레>의 보도 사진도 한 차베스 지지 여성이 차베스의 공수부대 장교 시절의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내가 약간 장황하게 국내외 차베스 사망 관련 기사와 사진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전문적인 학자들에 의한 복잡하고 딱딱한 이론적 분석 대신에 신문 기사만 꼼꼼히 읽어보아도 차베스가 집권 기간 동안 어떤 정치를 펼쳤으며 베네수엘라의 정치 지형과 전반적인 체제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한 마디로 말해 기존의 자유주의적 "푼토 휘호" 체제를 역사상 초유의 "차베스 체제"로 바꾼 것이다.

나는 이글에서 차베스의 약 2년여의 투병 기간 동안의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친 차베스 언론과 반 차베스 언론사이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차베스 사망 이후 작년의 대선 패배자였던 야당의 엔리케 카프릴레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현 부통령 사이의 대결 양상 또는 앞으로의 베네수엘라의 정치 지형이 험난할 것이라는 식의 일반적 분석은 하지 않겠다. 그 대신 차베스 체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차베스의 '오래된' 혁명

우선 차베스 체제의 시작은 1998년 대선 승리에서부터가 아니었다. 그 이전 1989년 카라카스에서의 대규모 시위로 유혈의 희생이 컸던 "카라카소"부터였다. 아니 그 이전 1980년대 초부터였다.

우선 베네수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틴아메리카의 1980년대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980년대는 인플레와 외채 위기로 상징되듯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힘든 시절로 소위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다. 또 동시에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정치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신자유주의"이다.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신자유주의 체제(노동자 해고 등의 구조 조정과 민영화가 핵심이다)를 미리 1970년대부터 실험해본 국가는 칠레이고 나머지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은 1980년대 초로서 상징적으로 많은 수의 학자들이 "1982년"을 주목한다.

그런데 석유 파동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출범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1960~70년대의 석유 호황기를 만끽했던 베네수엘라의 경제도 힘들어지고 정치적으로도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980년대였다. 원래 1958년 이후 모범적이고 예외적일 정도로 자유주의 체제가 잘 작동한 나라가 베네수엘라이다.

즉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양당의 평화적 정권 교체와 상당한 정도로 노동자 대중의 사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소위 "푼토 휘호"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그것이 밑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즉 사회적 양극화가 이루어지고 부정부패는 심해지고 가난한 기층 대중은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 체제를 칭찬하고 열렬히 지지한 나라가 미국이다. 바로 이 시기부터 공수부대 중령이었던 차베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차베스를 애도하는 대중이 이 시기의 차베스의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즉 1982년부터 차베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부와 민간의 소수의 변혁적 운동 그룹인 "혁명적 볼리바르 운동(MBR-200)"을 결성한다.

여기서 군부와 민간을 접합시킨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200"이란 숫자는 베네수엘라(시몬 볼리바르는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당시의 베네수엘라는 스페인의 식민지로 "누에바 그라나다"로 불린다)인으로서 라틴아메리카 독립 영웅인 시몬 볼리바르의 탄생 200주년을 기리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다수 매체들은 이 운동을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차베스 체제는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혁명을 일명 "볼리바리안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출발점이다. 차베스 리더십의 두드러진 특징은 매우 전략적이다. 국면에 따라 장단기 전략을 배치하고 유연하게 완급 조절을 하며 동시에 매우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전략을 추진해왔다.

1982년 MBR-200 이후 또 1989년 "카라카소" 대중 시위 이후 더욱 급진적 혁명을 기획한 차베스는 일부 군 동료들과 1992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실패한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혔다가 1994년에 석방된 차베스는 합법적 집권으로 전략을 바꾸어 지하 운동 단체인 MBR-200을 합법 정당인 '제5공화국 운동(MVR)' 당으로 변신시킨다.

그러나 차베스가 등장하기 전에 한 이름 없는 좌파 정당을 주목해야 한다. 이 정당의 지도부는 기존 좌파 정당이 정체성 위기를 겪을 당시 (즉 기층 대중을 중시하지 않는 흐름을 보일 때) 이 정당에서 극소수가 뛰쳐나와 운동을 하다가 소수 정당을 만든다. 대중 속에 들어가 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미니 정당을 만들어 지방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 '급진적 동기(LCR)' 당이 그 주인공이다. 이 당은 차베스 정부가 등장하기 전에 베네수엘라 정치 지형을 급진화시키면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 정당이다. 이런 유사한 역사적 사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매우 많다. 거칠게 얘기해서 자신을 밑거름으로 바치는 좌파 정당 지도자의 리더십을 말한다.

또 다른 차베스의 전략적 유연성의 예로 2005년 11월 미국의 전 미주 자유무역협정(ALCA)의 의도를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협력으로 좌절시킨 차베스는 그 다음해인 2006년 베네수엘라가 소속되어 있던 지역 공동 시장 통합체인 '안데스 공동체'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주축인 '남미 공동시장(Mercosur)'에 가입한다. 이런 전략적 변화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통합과 차베스 혁명을 동시에 중층적으로 진행시키며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대중의 강력한 지지 즉 헤게모니를 구축한다.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아메리카 역사, 문학, 철학, 정치 등 모든 방향에서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자긍심의 원천이고 라틴아메리카 진보성의 아이콘이 되는 맥락은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침략을 경계하고 이를 미연에 막기 위한 전략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을 주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적 제도화"를 뛰어넘은 위대한 정치사상가로서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등 가난한 대중 즉, "깊은 라틴아메리카"의 포용이다.

이런 두 가지 볼리바르 사상의 흐름을 아주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차베스 체제의 핵심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통합-2004년의 'ALBA(대안적 볼리바르 통합운동으로 불리며 대가 없이 거래 없는 자본주의적 무역 방식이 아니라 일방은 선물을 주고 다른 일방은 존경을 주고받는 물물 교환식의 무역으로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을 쿠바의 의사와 교사들이 주로 움직이고 비용은 베네수엘라의 석유로 충당하는 신자유주의를 밑에서부터 극복하려는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통합 운동)'와 2011년의 'CELAC(라틴아메리카 카리브 국가 공동체로 불리며 미주 대륙 전체의 전통적 국제 기구인 '미주 기구'를 대체할 비전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33개국의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모든 국가들의 포럼 방식의 통합 운동)'-과 대중의 이익을 공공적으로 확보하려는 "미션 사업"과 "조합 운동" 등의 정책 방향은 바로 볼리바르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따라서 차베스 혁명의 아이콘으로서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상징적 인물은 볼리바르이다. 그럼에도 베네수엘라의 친 차베스 진영 내에서도 교조적인 급진 세력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전략인 전면적 국유화를 실천하지 않는 차베스를 비난하고 국내의 일부 좌파 지식인들도 차베스 혁명에서 전위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자 정치 세력화"만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무언가 초점이 맞지 않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베네수엘라 조직 노동조합 세력의 간부들은 2002년 4월 차베스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의 주동 세력이었다. 그리고 조합운동과 미션 사업, 주민평의회 등 차베스 정부의 핵심적 정책 대상도 중간 계급의 노동자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아래에 있으며 세금도 내지 않는 길거리 행상 등의 소위 "비공식 노동자"들의 사회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1910년 멕시코 혁명의 실패한 영웅인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도 바로 이 "깊은 멕시코"를 건져 올리려다가 실패한 것이고 차베스도 바로 이 "깊은 베네수엘라"를 끌어올리는 과제를 수행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베네수엘라 대중 특히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당하는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더 깊이 차베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차베스 정부의 핵심 사업인 '주민평의회'에서 가장 열심인 사람들도 바로 아프리카계 가난한 여성들이다. 예를 들어 현재 베네수엘라의 가장 가난한 이들 여성들이 과거에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의사'가 실제로 되고 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예를 들어, 한국 사회의 경우 공부를 잘하는 개인적 소질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과외를 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부모의 재력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간혹 가다 가난한 학생이 의대에 가게 되면 아주 훌륭한 '인간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 혁명은 이런 과정에서 배제되는 가난한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의사'가 되는 길을 열었다.

▲ "응답받지 못한 기도." 우고 차베스의 쾌유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는 베네수엘라의 아프리카계 여성. ⓒ로이터=뉴시스

'프랑스 혁명'을 넘어선 '볼리바르 혁명'

볼리바르가 삼권 분립의 자유주의적 제도화의 틀을 뛰어넘은 사상가임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차베스 정부가 만든 신헌법이다. 차베스는 1999년 초 집권하자마자 미리 로드맵을 가지고 있다가 발 빠르게 새로운 헌법을 만든다. 카를로스 에스카라 말라베에 의하면 볼리바르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의 고전적 세 가지 권력 외에 신헌법 제 273조에 독립적으로 "시민 권력"을 넣게 된 직접적 영감을 제공했다고 한다.

물론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시민'의 개념에는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약 100년 동안 가장 가난한 원주민, 아프리카계 주민들은 배제되어있었다.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그의 대표 작품에서 비유했던 <백년의 고독>이 바로 이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차베스는 배제되어 왔던 이들을 정식으로 "시민"으로 대접했다. 단순하게 대접한 정도가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재구성했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차베스는 "서민의 친구"가 아니다. 개인주의적 시민의 인권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배제된 사람들 (프랑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면 "몫 없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사회적 인권 개념을 내세운 것이다. 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의 사회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대중의 생존권적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대중의 정체성이 출현하게 하고 정치적으로 헤게모니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차베스는 포퓰리스트이고 또한 바로 이점에서 차베스 혁명은 민주주의를 급진적으로 심화시킨 혁명이고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뛰어넘은 혁명인 것이다. 아니 약 500년간의 유럽 중심주의의 지배로부터 인식론적으로 해방되는 길을(이를 학술적으로는 "탈식민성"으로 부름) 실천한 정치가이다.

이 때 근대성은 '일직선적 시간 개념'을 의미한다. 이를 풀어서 표현하면 항상 현재보다는 미래를 중시하는 인식론적 태도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차베스 혁명은 미래보다 현재를 두텁게 하는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들의 치열한 '경쟁'보다 공동체적 '연대'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오늘날의 좌파 정부들이 어느 정도로 유럽 중심적 근대성을 뛰어넘고 있느냐 하면 예를 들어 에콰도르는 2008년 헌법을 고쳐 서구적 자유주의적 근대성과 전혀 다른 원주민 문화에 뿌리박은 이웃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좋은 삶"의 철학을 동시에 헌법안에서 병행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로 "복수 국민 국가"를 말한다. 한 나라에는 한 국민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근대 국가의 기본 전제를 허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와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의 관계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오랜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는 원래 '라틴아메리카'로 불리지 않았다. 그냥 "새로운 인도" 또는 "새로운 대륙"이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부터 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하여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 자유주의 세력이 근대성과 자유주의의 아이콘인 '프랑스'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라틴아메리카'라는 호명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 얼마나 자유주의적 근대성과 거리가 멀었는지 즉 '라틴아메리카'의 비전을 주조한 엘리트들이 얼마나 소수였는지를 이해하려면 19세기 후반의 전반적인 라틴아메리카 인들의 문맹률이 80퍼센트를 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당시부터 형성된 라틴아메리카의 '시민'의 개념에는 서구적 자유주의적 근대성의 문화와 거리가 먼 원주민과 아프리카계 주민들은 없었다. 이런 19세기 후반부터의 전통적인 배제가 1980년대 이후에 다시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해 강도 높게 재차 배제 된 것이다.

이런 강력한 사회적 배제를 포르투갈의 사회학자인 보아벤투라 데 소우사 산토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파시즘과 구별하여 "사회적 파시즘"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어낸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1980년대 말부터 배제적인 자유주의적 헤게모니에 맞서기 시작한다.

1989년의 "카라카소"를 통한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대중의 저항과 1990년의 에콰도르의 원주민 운동 세력의 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즉, 새로운 사회 운동으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변화-흔히 좌파 정부의 출범이라고 부르는-가 시작된 것이다. 그 핵심적 흐름의 주인공이 차베스임은 물론이다.

차베스, 풀뿌리 민주주의의 상징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대중은 생존권적 위기 상황에서 시위 등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할 때 단순히 '빵'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녀의 교육과 의료 문제 또는 주택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 제기가 그들 대중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1990년대 후반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줄기차게 시위를 통해 항의하다 2001년 12월 폭발한 아르헨티나의 실업자 사회 운동(피케테로스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사회적 성격의 권리 주장을 당연한 권리 주장으로 인식하는 뒷면에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소위 페론과 같은 '포퓰리즘' 정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페론을 포함하여 이들 고전적 포퓰리즘 정부의 지도자들은 시골에 살면서 가톨릭의 공동체적 연대의 전통 문화에 젖어 있다가 생계를 위해 대도시로 몰려온 가난한 대중이 대도시의 개인주의적 중간 계급의 지식인들과 의회, 정당 등의 자유주의적 제도화로부터 소외되면서 가지는 외로움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공감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깊은 정서적 연대의 공감 능력을 바로 차베스는 1990년대 말 이후 베네수엘라에서 다시 보여준 것이다. 대표적인 전략이 매주 대중과 직접 언론 매체를 통해 소통하는 <안녕하세요 대통령> 프로그램이다. 이런 대중과의 소통에서 차베스는 항상 유머가 많고 거침없는 화법으로 대중의 마음과 공감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층의 가난한 베네수엘라 대중은 차베스를 마음으로부터 숭배하는 '차베스 현상'까지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한 언론 매체 보도의 "신비한"이란 단어의 맥락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가난한 대중의 공동체적 연대의 공간은 "동네"에 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힘든 시기에도 페루, 칠레 등에서 가난한 동네의 여성들이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국그릇 공동체' 또는 '우유 잔 공동체'등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 나라가 망할 정도의 경제 위기와 엄청난 실업이 일어났음에도 자살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동네에서 서로 '물물 교환'을 통해 연대한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이발 기술이 있으면 이발을 해주고 빵을 나누는 방식으로.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2003년부터 파산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수익을 서로 공평하게 나누는 방식으로 인쇄소, 금속공장, 식당, 호텔 등을 복구하는 [노동자 복구 기업]까지 나타나게 된다.

바로 베네수엘라의 '주민평의회'도 이런 라틴아메리카에서 매우 흔한 '동네 평의회'의 구조를 가진다. 동네 안에 누군가 매우 어렵고 가난하다면 이를 돕는 방식으로. 특히 여성들이 주축이 되는 이런 동네 안 연대의 흐름은 1980년대 이후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공통적이다. 오랫동안 살던 정든 동네를 재개발 등으로 끊임없이 깨부수고 가난한 세입자들을 추방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흐름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라틴아메리카를 진보적으로 이끌어온 역사적 에너지는 바로 기층 대중의 무의식적(육체적) 연대의 감성적 성향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약 14년 동안 차베스 체제가 이런 무의식적 집단적 연대의 감성을 최대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단기적으로는 혼란이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베네수엘라 아니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지형을 낙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이 차베스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깊이 있는 인식론적 또는 사상적 축적(또는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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