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오후 6시 50분이면 캄캄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의 제기동 집에 두 청년이 찾아왔다. 한 청년은 경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장덕수는 한민당 간부 몇 사람과 식사 중이었다. 장덕수가 마루로 나와 청년들과 몇 마디 나누고 방으로 돌아서려는 참에 경관 차림의 청년이 어깨에 걸쳤던 소총을 벗어 두 발 발사했다. 청년들은 바로 사라지고, 장덕수는 병원으로 옮기는 중 숨졌다. (<설산 장덕수>(이경남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402-403쪽)
송진우(1945년 12월 30일), 여운형(1947년 7월 19일)에 이어 이남 해방공간에서 세 번째 정계 요인 암살이었다. 커밍스는 장덕수를 한민당을 이끌던 두 사람 중 하나로 지목했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187쪽) 또 한 사람은 물론 김성수였다. 장덕수의 직책은 일개 부장이었지만 실제 영향력을 크게 본 것이다.
장덕수(1894~1947)는 어떤 인물이었나? 1912~1916년 일본 유학 중 김성수와 인연을 맺어 1920년 이후 계속 '김성수 맨'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김성수(1891~1955)는 일본 유학 중(1908~1914) 풍부한 재력으로 후일의 '김성수 맨'을 여럿 포섭했는데, 와세다대학 2년 후배인 장덕수도 그중 하나였다. 장덕수를 찬양한 전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무렵의 대학생 학비는 월 25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수업료 4원50전, 고통비 2원 내외, 하숙비 12원, 그밖에 책값, 단체 활동비, 용돈까지를 충당하려면 최소한 25원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
그는[장덕수는] 값싼 하숙방을 구했다. (...)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빌딩 창문도 닦고, 음식점 접시도 닦았다. 미국 선교사들의 정원 손질과 유유 배달도 서슴지 않았다. (...)
장덕수가 이처럼 패각(貝殼)의 껍질을 벗기고 현장세계로 뛰쳐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는 '운명의 사람'을 만났다. 인촌 김성수였다. (...)
인촌은 장덕수의 명석한 두뇌와 열화 같은 의기, 그리고 꺾일 줄 모르는 투지를 새삼 확인하였다. 먼발치에서 덤덤히 바라볼 때에는 재(才)와 변(辯)만이 승한 것처럼 비쳐 왔었는데 무릎을 맞대고 체온을 짚여 보니 정은 뜨겁고 성품은 진솔하며 허식을 모르는 순박 소탈한 젊은이임을 알 수 있었다.
고하[송진우]의 날카로운 안광에도 장덕수의 인상은 인촌이 생각한 것과 똑같이 비쳤다. 중천에 떠 있는 해는 동산에서 쳐다봐도 태양이요 서산에서 바라봐도 태양이 아니겠는가.
이날 밤의 정담이 있음으로 해서 인촌과 고하는 흑기사(黑騎士)와 같이 비쳐 있던 장덕수를 사랑하는 의제(義弟)요 미더운 동지로 삼게 되었고 장덕수는 인천이 형성해 가는 자장(磁場) 속으로 한 걸음 두 걸음씩 흡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인촌은 장래가 촉망되며 그럴수록 학업과 학우회 사업에 정진해야 할 장덕수가 학비를 벌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잡역에 빼앗기는 것이 안쓰러워 달마다 학비를 보태주었다. 이렇게 학비를 보조해 줌에 있어서 인촌은 장덕수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의형으로서의 따뜻한 정으로 이를 감싸주었다. 왼손이 한 일을 바른손이 모르도록, 유학생 동료들의 화제거리에 오르지 않도록 은근 세심한 신경을 쓴 것이다. (<설산 장덕수>(이경남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63-67쪽)
장덕수는 1918년 봄 상해에 가서 여운형과 잠깐 함께 활동하다가 1919년 초 일본을 거쳐 귀국하던 길에 체포되었다. 그 해 말 여운형이 일본 당국의 요청으로 일본에 갈 때 장덕수를 통역으로 지명해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여운형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직후 동아일보 창립에 참여, 초대 주간을 맡으면서 '김성수 맨'으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장덕수의 경력 중 확연히 이해하기 힘든 것 하나가 1923~1936년의 장기간 미국체류(그중 3년간은 영국)다. 동아일보 초창기의 3년 동안 그가 너무 의욕적으로 다방면의 일을 벌이다가 물의를 너무 많이 일으켜 '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에 나서게 된 경위는 대충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사학위 받는 데 13년이나? <설산 장덕수>에는 그가 동아일보 부사장 직함을 그대로 갖고 특파원 노릇을 한 것처럼 설명되어 있지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로 검색해 보면 이 기간 중 '장덕수' 이름이 동아일보 지면에 나타난 것은 1년에 고작 한두 차례가 보통이다. 이 긴 기간 동안 김성수가 월급 주고, 비용 대주고, 심지어 어머니 회갑연까지 대신 차려드린 정성이 무엇 때문인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1936년 귀국 후 장덕수는 동아일보사와 보성전문학교에서 해방 때까지 일하는데, 김성수 친일활동의 대리인 노릇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언론'과 '민족교육'을 표방하는 김성수로서 친일활동에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측면을 대신 맡아준 것이다. 해방 후 한민당 인사 중에서도 친일 행적이 가장 뚜렷한 사람이 장덕수였는데, 그의 친일행위가 극명했던 큰 까닭이 김성수를 감싸주는 대리인 역할에 있었다고 보인다.
미군정 하에서 장덕수는 김성수의 친미활동을 위한 대리인 역할을 다시 맡았다. 한민당 창당 때 그는 외무부장을 맡았는데, <설산 장덕수>에 그 역할이 그려져 있다.
설산이 담당한 외무부에는 구미유학을 마친 제제다사가 망라되어 있어 한민당 내에서는 '해외유학부'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윤보선, 윤치영, 이활, 구자옥, 문장욱, 박용하, 최순주, 윤홍섭, 이상은 등 거의 모두가 해외유학 출신이므로 외국어에 능통했고, 또한 설산과 의기상통하는 동지들이었다.
구성인원이 이러하였으므로 미군이 진주하여 총독부 청사에 군정청을 개설함에 따라 이들의 할 일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산은 민족진영의 간판 격이요 한국민주당 대표인 고하 송진우를 하지 사령관이나 아놀드 군정장관과 긴밀히 연계시켜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
설산으로부터 미군정의 허상을 전해들은 고하는 "그렇다면 그들을 깨우처 줘야겠군. 알아야 면장도 한다고 한국 실정에 까막눈이 돼서야 군정이 잘 될 리 없지!" 그는 외무부장 장덕수에게 미군사령관 및 군정청 고급장교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한국민주당과의 대화 루트를 마련해보도록 당부했다. (...) 설산의 하루 일과 중에는 미군정과의 연계 절충역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308-312쪽)
이승만 다음으로 미국 경험이 많은데다가 활동력이 뛰어난 그가 미군정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커밍스가 그를 김성수와 함께 한민당의 두 지도자로 꼽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자 한민당과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장덕수의 역할이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 직책도 외무부장에서 정치부장으로 바꾸게 된 것이었다.
이 무렵, 인촌과 고하는 이승만이 적수공권으로 귀국하였으며 그에게는 경제력을 가진 친척도 전혀 없다는 점에 유의하여 설산에게 무거운 짐 하나를 떠맡겼다. "설산, 이 박사가 적수공권이라는 것은 천하가 아는 일이요. 그 어른의 정치자금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테니까 설산은 숙소 마련에 힘써주오. 조선호텔에 언제까지나 유하실 형편도 못되니 말이요."
설산은 돈을 직접 마련하거나 돈을 주무르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러나 육신을 움직이고 설득을 벌여 무엇인가를 주선하는 일에는 남다른 열의와 솜씨가 있었다.
그는 돈암동에 있는 장진섭을 찾아갔다. 역시 한민당원이며 같은 황해도 출신이므로 이야기를 꺼내기가 쉬웠다. "민족의 영웅 되시는 분이 여관방 신세를 져서야 되겠소? 더욱이 이 박사께서는 건국사업을 위해 많은 사람들과 만나셔야 하고, 대로는 조용히 구상도 하시고, 또 밀담도 나누실 일이 자주 있을 텐데 도떼기시장 같은 호텔에서는 아무래도 불편해서..."
장진섭은 설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내의(來意)를 알아차리고 이승만의 거처를 제공하겠노라고 쾌락하였다. 이 거처가 세칭 '돈암장'이다.
이승만은 돈암장을 주선해준 사람이 설산이라는 것을 알고 설산에 대한 정의(情誼)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사로운 정분뿐만이 아니라 자주 접촉하는 동안 설산이 정치이론가로서도 출중한 인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설산은 한민당 중진간부로서는 가장 빈번하게 돈암장을 드나들었다. 이승만이 설산의 명석한 두뇌를 빌기 위하여 자주 부르기도 하였고, 국내정치 현실에 좀 어두운 편인 이승만에게 정국의 실상을 알려주며 그의 정치적 구상을 적극 피력함으로써 이승만을 그의 노선 쪽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설산 장덕수> 319-320쪽)
설산은 돈암장 못지않게 경교장도 자주 찾아 김구에게 국내 정치정세의 동향이며 민족진영의 진로에 관하여 정력적으로 설명하였다. 김구 역시 30여 년 전 재령 나무리벌 보강학교에서 장덕준-덕수 형제를 만났던 일을 회상하고, 또한 설산의 형과 아우가 모두 광복전선에서 순의한 것을 상기하며 설산을 대견스러워 했고, 설산의 높은 정치적 식견과 유창한 말솜씨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김구는 환국 후 얼마 안 되어 설산의 모친을 수은동 댁으로 찾아가 큰절을 하며 목 메인 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두 아드님을 나라에 바치신 어머님을 이렇게 뵈오니 그 아드님들을 제가 죽게 한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운데 아들 덕수가 훌륭한 일을 하고 있으므로 위안을 삼으시며 여생을 편히 쉬십시오." (...)
임정 요인들이 환국한 지 겨우 한 달, 그 동안 설산은 김구의 부름을 받거나 자진해서 여러 번 경교장을 방문했었다. 그는 김구에게 국내정세를 조리 있게 설명해 주었고, 김구는 설산의 정치적 식견과 뛰어난 웅변을 대견스럽게 보아 왔다. 그렇지만 김구를 둘러싼 임정의 젊은 층 요인들은 설산을 흰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식견으로는 당할 수 없고, 이론으로 맞설 수 없으며, 언변으로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설산의 뒤에는 인촌과 고하라는 민족진영의 국내 거성이 후광처럼 버티고 있으며 한국민주당은 설산을 정치이론의 기수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군정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설산은 이미 든든한 통로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설산 장덕수> 325-332쪽)
인용한 끝 문단에서 임정 세력과의 갈등이 언급되었다. 장덕수를 치켜 올리는 이 전기에서는 김구와 장덕수의 사이는 좋았는데 김구의 아랫사람들이 장덕수를 적대한 것처럼 서술했다. 한민당은 공식적으로 김구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갈등을 국부적이고 우발적인 것처럼 얼버무렸는데, 이 전기 작가도 그 관점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장덕수와 김구의 관계가 악화되는 장면을 끝내 피할 수는 없다. 1946년 봄 국민당, 신한민족당, 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 논의 중 한 장면이 이 전기에는 이렇게 그려져 있다.
한독당의 당명과 당시를 계승하고,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며 14개의 부서 중 핵심이라 할 총무, 재정, 선전, 조직은 한독당 측이 맡고, 나머지 10개 부서를 한민, 국민, 신한민족당의 3개 정당 출신이 나누어 맡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누가 보아도 대등한 입장에서의 합당이 아니라 한독당에의 흡수통합을 의미했다.
인촌은 그렇게 해서라도 범민족정당의 출범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4월 9일에 개최된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이 '합당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그것은 합당이 아니라 헌당이오!" 집행위원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한독당의 독존을 성토했다.
"설산이 교섭위원으로 갔으면서도 인촌의 지나친 아량을 제지하지 못했다니 참 모를 일이야!" 설산의 두뇌와 언변을 잘 아는 동지들은 이렇게 아쉬워했다.
한편 한독당 측에서는 색다른 반응을 나타냈다. "인촌은 백의종군이라도 하실 분인데 설산이 뒤에 돌아가서 부결공작을 꾸민 게 틀림없다. 합당을 깬 장본인은 장덕수다!"
김구는 이런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며, 설산은 자기 결백을 위해 변명을 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백범과 설산은 일월 같은 사이면서도 월식현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351쪽)
아무리 장덕수를 치켜 올리기 위해 쓴 책이라지만, "백범과 설산은 일월 같은 사이"? 심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김구와 장덕수 사이의 대립관계를 얼버무려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1947년 2월 김구가 한민당 통합을 다시 시도했을 때 장덕수가 합당 반대에 앞장선 사실은 마치 부득이한 것처럼 그리면서도 아주 감출 수는 없었다.
인촌, 설산, 백남훈이 경교장 회담실을 막 나오려고 하는데 한독당에 먼저 흡수된 신한민족당 계열의 모 인사가 뛰어들면서 폭언을 퍼부었다. "백범 선생, 한민당과의 합당은 마음대로 못 하십니다. 그들은 일본놈들에게 아부하고, 미국놈이 들어오니 또 미국놈에게 아부하고..."
듣다 못한 설산이 벌떡 일어섰다. "여보시오! 말을 삼가시오. 무슨 욕이든지 외국놈과 갖다 붙이면 다 정당한 소리가 되는 줄 아시오?"
험악해진 자리는 김구의 만류로 겨우 진정되었다. 그래도 설산은 분을 참지 못하여 "고약한 놈들 같으니. 지금 백범 선생님 앞만 아니라면 너희놈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인데..." 그는 인촌과 백남훈을 호위하듯 하고 경교장을 나와 버렸다.
인촌의 계동 댁에 돌아와서 설산은 말했다. "백범 선생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한독당과의 합당은 단념합시다. 지금의 한독당은 백범 선생의 재래파와 국민당, 신한민족당 계열들이 서로 의견충돌을 일으켜 당론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국민당, 신한민족당 계열 사람들은 우리 한민당이 들어가면 자기들의 설 자리를 잃을까 해서 앞질러 훼방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합당에 응하면 그 분란이 더 커집니다." 인촌은 설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임시정부와 한민당, 한국독립당과 인촌, 그리고 백범과 설산 사이의 숙명적이었던 친화력은 날이 갈수록 감모(減耗)되어 갔다.
이 불행이 설산의 인간적 비극을 배태하고 있었다. (352-353쪽)
마지막 문장은 김구를 장덕수의 암살 배후로 보는 시각이 적용된 것이다. 김구에 대한 장덕수에 대한 존경심은 한결같은데도 김구가 장덕수를 죽였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비극'이란 표현을 썼다.
장덕수가 정말로 한결같이 김구를 존경했을까? 그 무렵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용된 장덕수의 주장에 거짓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할 수 없다. 파탄의 원인을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의 질투심으로 돌린 말인데, 그들은 한민당이 친일파 지주정당이기 때문에 합당을 반대했던 것이지, 지분이 줄어들까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한민당과의 합당이 실패했음에도 그들은 노선 차이 때문에 한독당과 곧 결별하게 되지 않는가.
송진우와 여운형의 암살 때도 김구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유력하게 떠돌았다. 나는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에 대해서는 김구의 역할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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