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체 형성의 문제, 즉 복지 정치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우 생생한 한국적 예를 가지고 비교적 쉽게 서술한 책이 등장했다. 바로 오건호가 쓴 <나도 복지 국가에서 살고 싶다>(레디앙 펴냄)라는 책이다. 내게는 저자인 오건호가 붙인 책의 제목이 우선 신선하게 다가왔다. 복지 국가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을 담으려 애쓴 흔적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책에는 저자가 노동 운동과 복지 국가 운동에 참여하면서 겪은 경험과 그 과정에서 저자가 했던 여러 고민들이 아주 진솔하고도 생생하게 잘 녹아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복지 논쟁을 보편 복지와 선별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정리하면서 결국 복지를 각자가 일해서 버는 시장 임금과 대비되는 사회 임금으로 정리한다. 저자는 선별 복지를 배격하지 않으면서도 보편 복지를 주장하는데 이 보편 복지의 위력은 저자가 복지 주체 문제를 결론적으로 정리한 5부의 216쪽에 나오는 예에서 잘 드러난다.
▲ <나도 복지 국가에서 살고 싶다>(오건호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
그로부터 5년 후인 2010년에 경기도 교육감은 저소득층부터 시작하는 무상 급식안과 5~6학년부터 시작하는 무상 급식안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한 끝에 후자인 5~6학년부터 시작하는 무상 급식안을 채택했다. 그런데 결과는 5~6학년만이 아닌 전면 무상 급식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만일 당시 경기도 교육감이 저소득층부터 무상 급식을 추진했다면 아마 지금도 무상 급식은 저소득층에 한정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저소득층에게만 적용되는 순간 무상 급식은 모든 국민의 일이 아니라 일부 국민의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2005년 당시에 암부터 무상 의료를 추진했다면 무상 의료는 질환으로는 암에 한정되지만 계층으로는 극소수의 상위 계층을 제외하면 모든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다른 중증 질환 나아가 모든 질환의 무상 의료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듯 보편 복지의 위력을 외국이 아닌 한국의 예로 들어 보여주었는데, 경험과 고민이 묻어나는 생생한 비교이다.
시장 임금은 노동 시장 지위에 따라 격차가 매우 크지만 사회 임금은 노동 시장 지위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주어진다. 보편 복지는 보편적 사회 임금이요 선별 복지는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 임금이다. 언뜻 생각하면 선별 복지가 더 재분배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별 복지는 그것을 통해 제공되는 사회 임금의 크기 자체가 작다. 사회 임금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여전히 시장 임금의 비중이 크다. 그래서 실제로 사회 전체적인 재분배 효과는 크지 않다. 오히려 큰 규모의 사회 임금을 필요로 하는 보편 복지가 시장 임금의 비중을 줄이기 때문에 재분배 효과가 더 크다.
이것이 바로 학자들이 말하는 재분배의 역설이다. 저자가 책에서 재분배의 역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재분배의 역설을 통해 복지 국가를 한국 사회에서 정설로 만들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위한 전략, 곧 복지 정치의 전략은 무엇인가? 저자는 여기서 시민 참여 재정 주권 운동을 강조하여 제안한다. 이 운동은 그 앞의 시민 참여라는 수식어가 말하듯 이른바 노동조합이나 진보 정치 세력과 같은 경성 권력 자원이 취약한 한국에서 이를 보완할 자원으로, 시민 사회라고 총칭할 수 있는 연성 권력 자원이 복지 정치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길이다. 이 제안은 보편 복지를 이루기 위한 재정 마련 방안이 전문가들만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되고, 또 상위 계층에게만 납부를 요구하는 요구 운동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우선 우리 사회가 재정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 현재 우리의 경제 수준을 들어 일축한다. 오히려 재정 마련 방안에 필요한 것은 정치력이라고 강조한다. 실제로 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생명보험 회사들의 수입 보험료 총액은 83조 원인데 비해, 같은 해 우리나라 국민들이 국세청에 납부한 소득세는 37조5000억 원이며, 국민건강보험료로 납부한 돈은 28조5000억 원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소득세의 2.2배에 달하고 국민건강보험료에 2.9배에 달하는 돈을 민간 보험 회사에 갖다 바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민간 보험사에 납부하는 이처럼 엄청난 돈을 그 일부라도 국민건강보험에 납부한다면 국민건강보험 한 가지만 가지고도 질병으로 인한 가계 파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암부터 무상 의료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질환에 대한 무상 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결코 의료비를 적게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적 의료비 지출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민간 생명 보험사에 납부하는 돈을 합치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OECD의 다른 나라 국민들과 비슷하게 의료에 지출하면서도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암과 같은 질병 앞에 가계 파탄을 겪는가?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알리고 민간 보험의 일부라도 국민건강보험이나 조세로 돌리는 정치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재정 주권 운동이 가장 적절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보편 복지를 위한 증세를 이루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저자도 이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세부적인 제안들이 제시되어 있다. 조세와 관련된 것으로 저자는 세금 정의 바로 세우기를 제시하며 관련된 구체적인 안들을 말하고 있고, 국민건강보험과 관련해서는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전략을 뼈대로 수가 구조 개선, 의료 전달 체계 혁신 방안을 말하고 있으며, 국민연금과 관련해서는 불안정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험료 지원, 연금 기금 지배 구조 개혁 및 기금 운용의 사회적 투자 확대를 말하고 있다.
저자의 이런 제안들이 모두 새로운 것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들을 재정 주권 운동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 운동 시절 저자는 국민건강보험료를 낮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싸웠는데, 그 결과는 국민건강보험료의 2.9배에 달하는 생명 보험료와 기업의 낮은 국민건강보험 부담금이었고 나아가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개별 가계에 떨어지는 본인 부담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가 말하는 재정 주권 운동은 상위 계층에게 "내라"라고만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라 "내자"운동, 즉 우리도 낼 테니 너희들도 내라는 참여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참여적 재정 주권 운동을 구체적으로 펼치기 위해 저자는 복지 혜택의 제공에만 사용되는 목적세적 증세(복지 증세),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참여하는 증세(보편 증세), 그러면서도 세금을 낼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하는 증세(누진 증세. 저자는 이를 부자 증세라고 표현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누진 증세가 좀 딱딱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좀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를 제안한다. 여기서도 저자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과거 증세 방안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제안을 설명한다.
혹자는 증세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마다 보편 복지를 이루는 과정에서 직면한 사회정치적 논의의 틀은 달랐다. 예컨대 스웨덴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겪었던 인구 위기가 보편적 아동 수당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논의의 틀을 형성했다. 한국에서는, 무상 급식이나 무상 의료는 공짜가 아니라는 기본도 갖추지 못한 한심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오랜 경제지상주의에 찌들은 탓에 재정 마련 방안이 보편 복지를 둘러싼 논의의 중요한 틀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참여적 재정 주권 운동은 국민건강보험료의 2.9배에 달하는 민간 보험료의 기막힌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도 복지 국가에서 살아보자고 생각한다면 또 그렇게 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고 싶다면, 그리고 나아가 저자의 진솔한 경험에서 우러나는 생생한 한국적 사례를 통해 그런 방안을 고민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