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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배회하는 '마오의 유령', 세계를 뒤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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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배회하는 '마오의 유령', 세계를 뒤덮다!

[프레시안 books] 첸리췬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92년 겨울 톈안먼 광장에서 불어오는 세찬 겨울바람 속에서 세 시간을 덜덜 떨었다.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탄생 100주년을 코앞에 둔 때였고, 마오에 관한 온갖 미신 수준의 이야기들이 한창 퍼지던 무렵이었다. 대부분 시골에서, 그들에게 이미 신이 된 마오를 보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마오가 누워 있는 홀에 들어서자, 험악한 얼굴을 한 경비 군인들이 1초도 멈추지 못하게 하면서 너무도 고압적으로 대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서 정작 마오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오를 이렇게 전시하는 것이 마오를 기억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마오를 확실히 죽이기 위한 것인가? 방부 처리된 마오를 보고 나서 오히려 반감이 들고, 유쾌하지가 않아서였다.

지금도 마오는 톈안먼 광장에 방부 처리되어 누워 있다. 그런 가운데 지금 중국에서는 그런 방부 처리된 마오를 되살리려는 사람들과 마오를 영원히 매장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마오가 다시 유령이 되어 중국을 떠도는 가운데, 그 유령을 퇴치하려는 일부 중국 공산당 퇴마사들의 결전 의지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 18차 당 대회를 앞둔 중국에서 얼마 전에 흥미로운 뉴스가 나왔다. 중국 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당헌을 개정하는데, 여기에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장쩌민의 3개 대표론,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이 핵심을 이룰 것이라고, 중국 신화통신이 보도한 것이다.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로 줄기를 잡겠다는 것은 마오쩌둥을 밀어내겠다는 계산이다. 중국 공산당을 있게 한 장본인이 마오인데, 중국 공산당에서 사상적으로 출당을 당할 지경에 몰린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진행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워낙 폭발력이 큰 사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보도가 중국 관영 통신을 통해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보시라이가 추진한 '충칭 모델'을 마오쩌둥 시대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던 원자바오 등 당내 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마오 유령 퇴치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내 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마오 흔적 지우기에 적극 나서는 것은, 뒤집어 보면 지금 중국에서 마오의 유령이 떠도는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고, 중국 공산당 일부에서 마오 사상의 폭발력을 그만큼 우려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특히 최근 들어 시장화, 자본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과 맞물려서 마오를 재평가하려는 흐름이 대두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중국 대륙에 떠도는 마오의 유령을 제거하고 마오를 부활시키려는 흐름을 조기에 차단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상권, 첸리췬 지음, 연광석 옮김, 한울 펴냄). ⓒ한울
중국 지식인 사회와 중국 정치권에서 마오 시대와 마오 사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쟁점으로 부각되는 상황에서 첸리췬의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연광석 옮김, 한울 펴냄)는 마오 시대를 다시금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사실 베이징 대학 중문과 교수였던 첸리췬은 역사학자도 아니고 정치학자도 아니다.

첸리췬은 중국을 대표하는 루쉰(魯迅) 연구자이고, 문학 연구자이다. 그의 루쉰 강의는 베이징 대학 최고 강의 중의 하나였다. 루쉰의 글과 사상을 잣대로 삼아 중국 현실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그의 강의는 베이징 대학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중국 현실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최고의 명강의였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루쉰 강의는 내가 들었던 최고의 강의였다. 지식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 들어 있는 강의였고,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대학 강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강의였다.

첸리췬은 베이징 대학에서 퇴직하고 나서, 마오쩌둥 시대를 정리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역사적 소명으로 삼고 여러 저작을 쏟아내고 있고, 그 가장 중요한 결실이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이다. 그는 자주 루쉰과 마오쩌둥을 자기 삶과 사상의 두 지주로 삼아 왔다고 말한다. 특히 그의 청년기에 루쉰과 마오는 그의 존재 자체였다.

그런데 이제 첸리췬이 인생 만년에 이르러 루쉰을 잣대로 삼아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마오 사상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주장하고 있다. 마오와 마오 시대를 비판하는 책은 그동안 숱하게 나왔다. 그런 숱한 책들과 비교하여, 이 책은 고유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강의 형식으로 된 이 책은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마오 시대를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기술하는 한편, 그런 마오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개인사를 역사와 접목시키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책은 마오 시대의 시대사이자, 첸리췬의 개인사이다. 그가 이런 형식을 취한 것은, 그의 개인사가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국민당 고위 관료였고,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혼자서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갔다. 첸리췬은 우파 분자의 자식으로서 인민공화국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 마오 사상을 진리로 여겼던 마오의 충실한 학생이었고, 마오 사상의 추종자로서 마오 시대와 함께 성장하였다.

첸리췬이 마오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자처하고,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마오 시대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고, 절실한 자기 체험을 토대로 마오 시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 책은 마오의 충실한 학생이었던 그가 마오 시대와 마오 문화의 청산을 위해 쓴 책이다.

이를 첸리췬 자신의 말로 표현하면, "모택동 시대가 만들어냈고, 모택동 문화가 혈육과 영혼 속에 스며들어, 아무리 발버둥치고 자성하고 비판해도 여전히 구제 불능인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 유토피아주의자"인 자신이 "창끝을 되돌려 모택동에 대해 동시대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정리와 비판을 해내"(21쪽)기 위해 쓴 책이다.

여기서 이 책은 그에게 이중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정리이자 비판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정리이자 비판이 되는 것이다. 첸리췬은 마오 시대에 대한 정리와 비판 그리고 마오 사상으로 자신의 사고를 대체하였던 개인사에 대한 정리와 비판을 통해 역사를 구원하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취지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에는 시종 "모택동 시대의 목적의식적인 모반자"로 자처하는 첸리췬이 "모택동에 대해 동시대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철저한 정리와 비판"을 하겠다는 의도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다. 마오에 대한 가장 철저한 정리와 비판을 위해 그는 특히 '마오쩌둥 문화'를 강조한다.

'마오쩌둥 문화'란, 그의 정의에 따르면, 마오쩌둥 사상이 "중국인의 사유 방식, 정감 방식, 행위 방식, 언어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었고, "나아가 민족 정신, 성격, 기질에도 아주 깊은 각인을 남겼"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마오쩌둥 사상이 한 개인의 사상을 넘어, 문화가 되었다는 판단이고, 그래서 그는 중국인들이 유가, 도가, 묵가 이외에 '마오쩌둥 문화'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오쩌둥이 죽고 마오 시대는 종결되었지만, 마오쩌둥 문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유교 문화처럼 하나의 문화로서 여전히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첸리췬 스스로 마오쩌둥 문화를 비판하는 작업을 중국 문화를 갱신하고 중국 국민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첸리췬에게 마오쩌둥과 그의 사상 그리고 마오쩌둥 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역사적 과제인 동시에, 지금 중국 현실에서도 매우 절박하게 필요한 작업이다. 그는 마오 시대가 형성한 국민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문화 대혁명과 같은 마오쩌둥 시대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27쪽).

마오 시대를 철저히 청산할 것을 주장하고 마오 사상의 부활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책에서, 첸리췬은 중국 공산당 내 역할 구도로 보면 원자바오 등과 같은 당내 자유주의 개혁파에 서 있고, 현재 중국 지식인 사회의 지형도로 보면 자유주의 패러다임에서 신좌파를 비판하는 위치에 서 있다.

첸리췬은 이 책에서 마오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중국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통치 방식의 원형을 '57년 체제'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 마오는 '신민주주의 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하였는데, 중국 사회주의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된 것이 마오가 신민주주의론을 폐기하고 사회주의로 전환을 시도하던 1953년부터이고, 결정적으로는 1957년 반우파 투쟁부터다.

'57년 체제'의 특징은, 정치적 줄 세우기, 일당 독제 체제, 부르주아 계급을 소멸시키는 것, 계급투쟁과 연속 혁명의 끊임없는 추구 등이다. 첸리췬은 이러한 특징을 지닌 '57년 체제'가 마오 시대는 물론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마오는 갔지만 마오 시대의 억압 정치 시스템과 통치 방식은 여전히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첸리췬은 '57년 체제'의 이러한 특징을 적출해 내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57년 체제' 수립 과정에서 어떻게 민주를 주장하고 자유와 개성을 주장하던 비판적 지식인들과 다른 사상적 흐름이 어떻게 탄압을 당했는지를 여실히 옮겨놓고 있다. 베이징 대학 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다른 어떤 책보다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마오쩌둥 사회주의의 치명적 약점은 민주주의의 결여다. 첸리췬의 이 책은 1957년 이후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일당 지배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을 꼼꼼히 정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오의 개인의 인격과 성향 그리고 마오 사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해서 보면, 이는 이 책의 치명적 약점이다. 모든 비극을 마오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이러한 분석은, 1956년 이후 중국 공산당 내부에 존재하였던 마오와 비마오파 사이의 대립과 갈등에 주목하지 않는다. 당시의 대립은 마오와 덩샤오핑, 류사오치 등 사이의 대립인데, 이는 기실 발전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1953년 시작된 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 공업화로 인해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는 더욱 뚜렷해졌다. 당과 국가는 점점 관료화되어 갔고, 국가는 더욱 강하고 억압적이 되어 갔다. 근대적 공업화가 사회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마오쩌둥이 보기에는 사회주의 목표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고, 1957년 2차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그런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보았다. 관료 기구는 확대되고, 전문가와 관료로 이루어지는 엘리트층은 더욱 공고한 집단을 형성할 것이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정치는 소수에게 맡겨진 채 인민에게서 점점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이 이미 중국 공산당 내에는 존재하지 않다고 보았고, 당 밖에서, 특히 인민 대중에서 그 동력을 찾았다. 참여형 인민 민주주의 방식으로 당 밖에서, 인민들이 당과 정부에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런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첸리췬은 당시 중국 공산당 내 역학 구도에서 이전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권력을 상실한 상태였던 마오쩌둥과 공업화와 생산력 발전을 추구하는 당권파 사이에 놓인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주목하지 않는다. 첸리췬의 분석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부에 있었던 마오와 비마오파 사이의 노선 대립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57년 체제'라는 비민주적 일당 통치 시스템이 수립되는 근원으로 마오의 성격과 인격 그리고 마오 사상이 부각된다. 이러한 첸리췬의 관점은 1957년 반우파 투쟁부터 1966년 문화 대혁명까지의 과정을 마오 사상의 특징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 내부에 존재하였던 마오와 비마오파 사이의 대립까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분석하는 모리스 마이스너(Maurice Meisner)와 크게 구별된다.

마오 시대를 보는 첸리췬과 모리스 마이스너의 차이를 지적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마오 사상과 마오 문화가 중국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면서 여전히 호소력을 발휘하는 현실적 배경을 해석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중국에서 그리고 세계 일부 진보 운동가와 진보 지식인이 마오 사상을 재평가하고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첸리췬의 표현대로 그들의 생각이 아직 순진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중국 민중들이 노예여서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 시대의 비극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한 그가 "제가 경험자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알고 있습니다"(36쪽)라고 하면서 마오 시대의 비극적 경험을 순진한 사람들에게 절절히 이야기한다고 해서 마오의 유령이 사라질 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마오를 불러내는 상황과 현실이다. 중국에서도 그러하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아리프 딜릭의 언급처럼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문제들이 바로 문혁이 극복하려 했던 일들이"고, 중국학자 황동연의 지적처럼, 문혁을 초래한 그러한 문제들이 중국에서만이 아니라 전 지구화 과정에서 모든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경우, 마오를 다시 불러내는 현실의 개선 없이는 마오 사상과 마오 문화의 청산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마오와 비마오파 사이의 대립은 사회주의는 비사회주의적 방법으로 달성될 수 없다고 보는 마오와 사회주의를 위한 생산력을 강조하는 입장 사이의 대립이었고, 그 대립에도 불구하고 둘 다 궁극적인 지향은 사회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 마오와 비마오파 사이의 대립은 사회주의를 궁극적 목표로 보느냐의 여부보다는 발전 패러다임에 관한 차이다.

보시라이의 충칭 실험과 원자바오 사이의 대립도 근본적으로는 부패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 모델에 관한 대립이다. 원자바오가 보시라이의 충칭 실험을 문혁을 부활시키려는 시도라고 규정하고 그를 추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문제는 보시라이와 마오를 불러내는 중국의 현실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그럴 때, 첸리췬이 역사적 소명이자 자기 구원의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마오 사상과 마오 문화 청산 작업은 마오를 불러내는 지금 중국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과 결합해야만 의미가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과제이기도 하고 첸리췬 같은 비판적 지식인의 과제이기도 하다. 덩샤오핑-류사오치-자오즈양-원자바오로 이어지는 비마오파 라인을 복원시키면서 마오 라인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처방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이는 중국이 서구 근대 체제에 수렴되는 발전 모델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대안적 발전의 길을 모색할 것이냐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문제인 동시에 세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중국에서도, 중국 밖에서도 마오의 유령은 당분간 계속 떠돌 것만 같다. 첸리췬의 마오 시대에 대한 성찰이 담고 있는 소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지금 중국과 세계의 상황이 그러하고, 그런 까닭에 마오의 유령은 지금도 중국의 하늘을, 세계의 하늘을 떠돌고 있다.

첸리췬의 이 책은,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김수영 옮김, 이산 펴냄) 그리고 아리프 딜릭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황동연 옮김, 창비 펴냄) 그리고 황동연과 아리프 딜릭의 대담 '문혁의 세계사적 의의'(<역사비평> 2006년 겨울호)와 같이 읽으면 마오 시대와 마오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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