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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공자·노자·석가의 노예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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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언제까지 공자·노자·석가의 노예로 살 것인가?

[절망의 인문학]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한가?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네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한가요?" 동양철학자 신정근 성균관대학교 교수가 답합니다. "네, 가능합니다! 동양 고전에 대한 노예 근성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합시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장이 나온 지 꽤 오래되었다. 그 중에 철학이 더 혹독한 추위를 겪고 있다.

문학은 한국 현대 문학이 전문가와 일반인에게도 전혀 낯설지 않고 동시대의 작가들이 현대 문학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사학계에서는 역사를 과거로만 한정시키는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 일찍부터 고등학교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집필하여 수업을 진행하며 현재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이와 달리 철학은 현실과 교육의 영역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어떠한 제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철학이 역사의 일정 단위와 만나면 고대 철학, 중세 철학, 근대 철학 그리고 현대 철학 등의 조어가 생겨난다. 이 중 '현대 철학'이 다시 특정 지역과 결합하면 서양 현대 철학, 동양 현대 철학, 동아시아 현대 철학, 한국 현대 철학 등의 조어가 생겨난다. 우리는 '서양 현대철학'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알고 싶어 한다. 반면 나머지 조어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가능 세계에 있는 듯하며 낯설고 또 그것에 대해 배울 만한 뭔가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동양 철학의 경우 역설적인 현상이 있다. 사람들은 '동양 현대 철학'에 낯설어 하지만 '동양 고전'에 반가워한다. 동양 현대 철학은 몰라도 좋지만 동양 고전은 알아야 하므로 배우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동양 철학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고전'으로 환영받지만 현대 철학 중의 하나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 철학자들은 일반 대중과 다른 분야 전공자의 사랑을 두루 받고자 하지만 현대 철학이 부재한 탓에 그 사랑이 마니아와 일시적인 유행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철학이 없다는 것은 동양 철학의 다양한 전공 중의 하나가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현대(인)와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동양 철학이 과연 고전을 넘어서 현대 철학의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따져볼 만하다. 현대 철학이 없다면 동양 철학은 빛나는 문화유산으로서 정리와 해설의 대상으로 남게 될 것이고, 현대 철학이 있다면 동양 철학은 현대 사회로 옮겨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개념의 정의가 필요하다. '동양 현대 철학'은 전통 철학의 학적 맥락과 현대 사회의 상황을 대결시켜서 현대인과 현대 사회에 비판적 사고와 정당화 가능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도록 재구성된 철학을 말한다.

개화파와 위청척사파의 대립과 그 이후

▲ 공자. ⓒwikipedia.org
전근대 학문은 경사자집(經史子集)과 그 하위 단위로 분류되었다. 철학은 그 중에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잘 아시다시피 철학(哲學)은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19세기 중반에 'philosophy'를 번역하면서 탄생한 말이다. 우리나라는 20세기 초엽에 이정직과 이인재가 각각 칸트 철학과 서양 고대 철학사를 다루면서 '철학'을 처음으로 사용한 걸로 밝혀졌다. 특히 이정직은 '철학'을 일본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 아니라 량치차오(梁啓超)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philosophy는 어원에 따르면 애지(愛知), 즉 지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에 대한 앎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 학계는 2000년 무렵에 자신의 학적 전통에 philosophy가 전제하고 탐구하는 앎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을 벌였다. 이 중에 거자오광(葛兆光)은 전통 학문에는 philosophy에서 전제하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앎이 없고 지식과 실천 사이의 연계가 중요하게 나타나므로 철학 대신에 사상(思想)을 사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도 전통 시대의 학자들이 자신의 학문 활동을 실제로 '사상'으로 의식하고 있었느냐 하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개인적으로 앎의 의미를 좀 더 넓게 이해한다면 philosophy는 <논어>에 나오는 호학(好學)이나 호모(好謀)에 가장 잘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양자는 어원과 의미에서 상당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호학과 호모의 전통 학문은 철학으로 대체되기 이전까지 사회 질서의 원칙으로서 개인과 사회를 규제하는 원리로 기능했다.

서세동점의 파괴와 더불어 19세기에 이르면 그러한 기능이 단순한 내부적인 토론과 변신이 아니라 근원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서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일대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개화파는 전통과의 단절만이 신세계를 열어줄 것으로 보았고 위정척사파는 전통의 수호만이 양이(洋夷)와 왜이(倭夷)로 표상되는 야만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다고 보았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은 호학과 호모의 학문 활동이 철학의 이름으로 대체된다는 전환을 상징하고 이후에 나타난 학문 활동의 특성을 규정하기도 한다. 첫째, 호학과 호모로서 '동양 철학'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이후에도 더 이상 사회 질서의 원칙으로서 전면적인 기획과 주장 그리고 실천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즉 호학과 호모는 새로운 생활 세계의 도래와 함께 현실을 규제할 접점을 상실하게 된 것이었다.

둘째, 호학과 호모를 대체한 '동양 철학'은 '서양 철학'과 대등하게 정립하지 못하고 서양 철학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철학' 중의 하나로서 자생의 기반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동양 철학은 늘 서양 철학(또는 철학)을 기준으로 삼아서 스스로 무엇임을 주장하지 못하고 "얼마나 (서양) 철학적인가?"를 밝혀야 했다. 예컨대 후스(好適)와 펑유란(馮友蘭)은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동양 철학에 "얼마나 과학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것인 있는가?"를 밝히고자 했다. 그래야만 철학의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서양 철학자들은 동양 철학에서 쓰는 용어가 맞는지 따지는 검열자의 노릇을 하려고 든다.

셋째, 주류의 위치를 차지한 (서양) 철학은 세 가지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약자(동양)가 배워서 강자(서양)와 같게 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철학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다양한 서양 철학이 소개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사회진화론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는 데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서양철학이 삶(세계)에 대한 철학적 재구성이나 대응 과정이 아니라 완전무결한 새로운 경전으로 간주되면서 그것은 우리가 열위에서 학습하고 존경하는 대상이지 대등한 지위에서 비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 철학이 새로운 정학(正學)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식민지화로 인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철학의 영역을 개인과 그 내면에 한정시켜서 철학과 삶(세계)의 연계성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여성 불교가 현대의 남성 실존주의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이후에 우리는 동양 철학과 서양 철학, 즉 철학 모두 홍윤기의 표현에 따르면 "철학의 내재적 동력으로서 철학함"과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괴리를 막을 수 없었다.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들

한국의 철학을 두고 여러 가지 자조적인 목소리가 있다. 완제품을 수입해서 포장도 뜯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거나 철학의 학계를 종합 상사의 한국 지사나 출장소로 낮추어 말하기도 한다. 또 서구의 철학 풍조가 바뀌면 한국의 철학 연구자들이 기존의 철학에 대한 어떠한 반성 절차 없이 새로운 전공으로 갈아탄다고 비아냥거린다. 이는 20세기 초에 '철학'이 소개된 이래로 많게는 1세기가 훌쩍 지났지만 한국의 목소리를 담은 자체 철학을 만들어내지 못한 실상을 신랄하게 꼬집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관의 소리가 높지만 희망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에 서양 철학이 수용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정리할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 걸쳐서 식민지의 해방과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철학적 작업을 진행했던 철학자의 공과를 밝혀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현대 실천 철학'과 '한국 현대 철학'이 커다란 출발을 위한 주춧돌이 놓이고 있다.

김석수는 강단 철학이 겪는 악순환의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내가 배운 철학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 헤겔, 마르크스 등 서양의 철학자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이들의 이론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 땅의 현실을 담은 철학을 하지 못했듯이 내게 배운 학생들 역시 이 땅의 현실을 담은 철학을 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다원주의, 시민사회론, 지방의 문제, 자치의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 실천 철학의 전개 양상을 재검토했다.

씨알학회와 근현대 한국 사상사 연구 모임은 "한국에서의 철학 연구는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 주로 강대국(중국,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의 사상들 가운데 주류로 알려진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한국에서 동양과 서양을 분명하게 분리하는 태도는 20세기 초 일본의 동양 통합론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습관화되었다." 이러한 동서 분류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은 소개와 모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동안 비주류이자 비체계적인 가치관으로 치부되어 왔던 근 100년간의 한국 사상사를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하여 발간하는 것은 한국 사상계의 난국을 타개하는 데에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한국 현대 철학의 본격 연구를 예고하고 있다.

아울러 홍윤기는 "동아시아 현대 철학의 최대 과제는 서양 철학에서 수용된 '이성 구도'를 동양 철학의 '도·리(道·理) 기획 및 동아시아 현대사의 경험과 접합하여 철학함의 내공을 확실하게 다지는 일일 것이다"라는 제안을 통해 동아시아 현대 철학의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양 철학 연구자들은 동양 현대 철학의 가능성을 얼마나 진지하고 검토하고 있을까? 타이완을 중심으로 일찍이 전근대 유학의 가치를 현대에 확대 적용하기 위해서 '현대 신유학'이란 일군의 운동을 펼쳐오고 있다. 이들은 정학(正學)과 사학(邪學)의 이분법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채 유학의 전근대적 요소(삼강, 삼종지도 등)와 근대적 요소(성선, 인간의 관계성 등)를 구분해서 후자와 현대의 접점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보면 동양 철학의 연구자가 학문 활동의 방향과 목표를 동양 현대 철학의 정립에 두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가장 지배적인 유형은 근본주의와 환원주의의 양상을 나타낸다. 환원주의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탈맥락적으로 동양 철학의 개념, 인물, 사상과 유비시켜서 그것의 만능성을 주장하는 형태를 드러낸다. 예컨대 공직자의 부패가 문제되면 청백리를 소환하고, 가족의 패륜 범죄가 일어나면 효(孝)를 해결책으로 들먹이고, 권리의 충돌이 주제가 되면 도의(道義)를 강조하고,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면 화합의 가치를 역설하고, 환경과 생태 문제가 등장하면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철학적 논증은 유비로, 엄밀성은 장황한 열거로 대체된다. 더 나아가 유비와 열거는 정식화가 아니라 구호로 정리된다.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가정이 화목해야 하는 일이 잘 된다."

이러한 환원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 근본주의의 성향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는 서양 철학 또는 서구 문명의 한계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동양 철학으로 돌아가 그 가치를 존중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 문화에 친숙한 사람들에게 득의에 찬 만족과 위안을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를 심어주게 된다. 이 때문에 김용옥과 같은 슈퍼스타가 동양 철학의 현재적 가치를 설파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만 그 열기는 금세 식어버린다.

동양 현대 철학을 위해서

동양 철학이 동양 현대 철학의 정립을 위해서 고전의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환원주의와 근본주의의 만능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양 고전에 머무른다면 철학자가 동양 철학의 테제를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스스로 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동양 고전에 대한 과잉 기대이다. 과잉 시대인 만큼 폐해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동양 철학이 고전의 지위에 있는 한 연구자는 뒤로 물러나고 고전이 앞에 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고전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이는 경서(고전)를 풀이하는 해설사이니 텍스트와 싸우면서 대화하는 철학자가 될 수는 없다.

환원주의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동양 철학자들은 필요에 따라 이미 밝혀진 결론을 끄집어내는 게으른 탐구자가 될 뿐이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의 게으름을 돌아보지 않고 현대인의 게으름을 질타한다. 동양 철학에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치유할 해답이 다 들어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그것을 들추어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근본주의는 그것의 현실화를 추진할 정치 동력을 갖지 못하면 한갓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동양 철학이 결코 엄밀한 논리적 사유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동양 철학이 동양 현대 철학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두 가지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자기 변신의 과정으로서 철학사 읽기이다. 동양 철학은 경서(經書)의 주석 형식으로 진행되어온 탓에 사람들은 철학의 역사가 곧 동일성의 재연이라고 생각한다. 주석이 학문의 중요한 방법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주석 달기가 기존의 반복과 답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후배는 선배와 다른 주석을 경서에 밀어 넣어서 경서의 의미를 뒤흔들어놓았다. 예컨대 주희와 정약용의 사서 해석을 비교해보라. 주희는 주관의 극단적 확신이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서의 곳곳에 규범의 객관성으로 해석하는 장치를 매설했다. 반면 정약용은 눈부신 광휘를 내뿜는 객관적 규범이 도덕적 개인과 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데에 무기력하다는 점을 비판하고서 경서의 여러 곳에서 규범의 인격성을 들추어내고 있다.

주석 이외에도 학습과 토론의 공론장의 강학(講學), 자유로운 학술적 글쓰기의 논(論)과 원(原), 논적과 쟁점을 다투던 서(書) 등 방법이 있었다. 그들은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종횡으로 사용하면서 철학사의 홀로서기를 시도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홀로서기를 오롯이 새롭게 밝혀낸다면 동양 철학이 다시금 현대에서 철학으로 홀로서는 방법과 내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둘째, 중심과 주변의 재배치이다. 철학사를 보면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도 그 주제와 현안이 교체되곤 했다. 세계의 근원으로서 기(氣)와 리(理), 도덕의 근원으로서 심(心)과 성(性), 인간의 자연성으로서 성(性)과 욕(欲) 등은 지배적인 왕좌에서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는 중심과 주변을 새롭게 조정함으로써 현대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최한기의 길은 현대화를 위한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는 서양 과학의 영향으로 인해 오행과 음양의 과도한 물질성과 상징성이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지도 규정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울러 그는 초월과 내재의 모순을 지닌 리를 기의 내재적 규칙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지평을 마련했다. 이로써 리와 기 사이의 중심과 주변 관계에 역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성 차별, 신분 차별, 아동 학대 등 억압과 부자유를 자연 질서로 당연시하던 세계관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근대성과 호응하는 리(理)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동양 현대 철학'은 동양 철학이 당대의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 동양 고전의 틀에서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현대 철학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변신을 할 수 없는 죽은 학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동양 철학이 더 이상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가진 문헌으로서 고전(古典)이 되지 못하고 오래된 침전물로서 걷어내야 할 대상으로서 고전(古澱)이 된다.

누가 동양 현대 철학의 출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이제 동양 현대 철학의 가능성을 현재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작은 걸음을 시작할 때이다. 이제 신채호의 외침에 대답할 때이다.

"우리는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낳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낭객의 신년만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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