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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서치라이트보다 밝은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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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서치라이트보다 밝은 그 순간!

[프레시안 books]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

1.

올 여름,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들고, 단 한 편의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만든 책의 제목은 <옥인 콜렉티브>(옥인 콜렉티브 지음, 워크룸프레스 펴냄)였고, 그보다 더 오랜만에 본 영화의 제목은 <두 개의 문>이었다. <옥인 콜렉티브>는 종로구 옥인동의 오래된 아파트가 철거되는 과정과 그에 (어떤 의미에서건) 저항하는 미술 작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두 개의 문>은, 우리가 다 아는 영화, 그 <두 개의 문>이다.

이 두 작업은 모두 도시 철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두 작업 모두에 어두운 밤과 그를 밝히는 빛이 등장한다.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길 펴냄)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도 칠흑 같은 밤의 이미지와 그 사이를 유영하는 반딧불의 흔적이 등장한다. 이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공교로움일 뿐이지만 나는 기분이 묘했다.

조금 더 얘기해보자. <옥인 콜렉티브>에 등장하는 밤과 빛의 에피소드는 다소 희극적이다. 2009년 10월 10일, 한참 철거 중인 옥인 아파트의 밤은 조용했다. 해가 매일매일 빠르게 짧아지는 계절이었다. 그때 "슈웅"하는 소리를 내며 불꽃이 날았다. 타닥, 타닥거리며 화약이 타들어갔다. 중국제 싸구려 불꽃의 냄새는 고약했다.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아파트 옥상으로 무장 군인들 한 무리가 올라왔다. 젊은 군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당황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청와대의 신고가 있었다고, 그들은 설명했다. 철없는 작가들의 생일 파티임을 알고 그들은 허탈하게 돌아갔다. 밤은 깊었고, 불꽃은 금방 사그라졌으며,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두 개의 문>의 경우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훨씬 더 어둡고 비극적이다. 용산 4구역 남일당이 맞이한 밤은 추웠고, 지독하게 불안했다. 스포트라이트들이 어지럽게 흔들렸고, 그 사이를 가르며 화염병이 날았다. 옥인 콜렉티브가 만난 권력이 우스꽝스럽고 서툴렀다면 남일당을 둘러싼 권력은 가혹했다. 스포트라이트는 중국제 화약처럼 쉽게 꺼지지 않았고, 화염병은 불꽃과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혔다. 밤을 지나 새벽이 왔지만 날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고, 사방 또한 쉽게 고요해지지 않았다.

2.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밤에 대한 책이고, 반딧불에 대한, 그리고 빛에 대한 책이다. 밤은 어둡고 반딧불의 꼬리는 희미하게 명멸하며 서치라이트는 숲의 바깥과 안쪽의 구분을 무화시킬 만큼 밝다. 사람들은 밤을 잊었고, 반딧불은 보이지 않는다. 나와 당신은 지금 그 밝음 안에 있다. 그곳에서 저자는 묻는다. 지금은 밤인가, 아침인가. 반딧불이 보이지 않는 이곳은 숲 가운데인가, 아니면 가장자리 바깥인가.

3.

▲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길 펴냄). ⓒ길
반딧불은 예술이고 이미지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라고 부연한다. 서치라이트 또한 이미지다, 하지만 그것은 권력을 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그것이라고 저자는 뒤이어 말한다. 둘 다 빛이지만 그것들은 전혀 다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서치라이트 기둥과 달리 반딧불은 "겨우 존재하는 좀처럼 보기" 힘들고 "일시적으로 볼 수 있거나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겨우겨우 '잔존'한다. 반딧불은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사의 연대기, 그러니까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는 생물학적 양식사를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꿈처럼 불쑥불쑥 튀어 오르며, 종잡을 수 없는 곳 혹은 원하지 않는 곳, 예상할 수 없는 시간에 모퉁이를 돌아 우리 앞에 출몰한다. 그것은 가위눌린 꿈, 혹은 에로틱한 망상과 같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미술 사학자로서 저자는 그동안 미술사를 지배해온 부드러운 생멸의 그래프를 무시한다. 그리스에서 탄생한 휴머니즘이 중앙아시아, 인도를 거쳐 토함산에 이른다는 그럴듯한 동화, 14세기 이탈리아의 한 도시에서 발아한 씨앗이 한 세기만에 유럽 전체에 꽃피웠다가 보기 좋은 주름살을 지닌 노인처럼 늙어버렸다는, 평화롭게 굴곡진 그래프에 그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수 세기간 잊혔던 양식이 아무 맥락 없이 출몰하고, 또 갑자기 행방불명 돼버리는 단속적인 그래프를 지지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반딧불이라 불리는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4.

하지만 이 책은 미술사에 대한, 혹은 이미지에 대한 책이 아니다. 그는 롤랑 바르트 식의 아포리즘이나, 레지 드브레식의 본격적인 이미지론을 구성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그는 이 책을 지금 우리에게 만연한 비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저자의 용법을 빌리자면) "비관주의를 조직"하기 위해 썼다고 말한다. 깊은 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이라고는 서치라이트뿐이라는 비관주의, 반딧불은 모두 소멸했다는 선언하는 비관주의를 조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치 철학서에 가깝다.

5.

비관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장님이 장님을 이끌고 괴물의 입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상태다. 혹은 지상의 잡다함을 견디지 못해 바닷가 벼랑 앞으로 나아가는 늙은 수도사의 상태다. 이 비관주의의 가장 심오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파졸리니와 아감벤을 끌어들이지만 비관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파졸리니의 영화나 아감벤의 책을 뒤적여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비관주의란 익숙한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신문에 비관하고, 몇 년마다 치르는 선거에 비관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 비관하고, 나이 적은 사람에 비관한다. 잘 아는 사람에게 비관하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비관한다.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피우지 않기 때문에 비관하고, 술을 마시기 때문에, 마시지 않기 때문에 비관한다. 간혹 찾아오는 희망의 순간은 짧지만 비관은 우리와 함께 오래토록 지속한다. 요컨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비관이라는 심리 상태는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꽤 자세히, 그리고 지루하게 파졸리니의 배신과 아감벤의 침울한 결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지의 낙관을 믿었던 혁명가 파졸리니는 왜 비관했는가. 아감벤은 왜 지금, 여기를 부정하고 자꾸만 지평 저 너머 어딘가로 눈길을 돌리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6.

파졸리니는 말한다. 우리를 비관으로 이끄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나 밤 때문이 아니라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밝음, 밤을 밝히는 서치라이트 때문이라고. 직선으로 내뿜는 서치라이트의 불빛은 반딧불의 미광을 모조리 집어 삼켰으며, 밝음 때문에 우리는 질식하고 눈멀고 말거라고. 어두움은 밝음으로 치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밝음은 무엇으로 극복할 것인가.
어두웠던 파시즘의 시대, 그늘졌던 냉전의 시대엔 차라리 모든 것이 단순했고, 명료했다. 파시즘의 어둠은 밝히는 것으로, 냉전의 그늘은 벗어나거나 태양의 고도가 바뀌길 기다리는 것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시절은 "저항이 가능했"고 "여러 사유의 미광을 통해 밤을 밝히는 것이 가능"했던 때였다. 하지만 어둠도, 그늘도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지향해 싸울 것인가.

7.

모든 곳에 골고루 빛이 내려 쪼이는 세계. 모든 것이 드러나 있기에 더 이상 캐낼 것이 없는 세계. 이건 말하자면 앞의 풍경과 뒤의 풍경의 밝기가 동일한 르네상스식 회화의 세계다. 이 명료한 그림 앞에서 우리의 시선은 그림의 표면에 머무른다. 감춰지는 것이 없기에 억압받는 것도 없다. 모든 각도에서 내리 쬐는 빛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는다. 이건 왠지 끔찍한 풍경이다.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표면 아래로는 단 1센티미터도 깊이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 이건 왠지 레니 리펜슈탈이 연출한 나치의 세계,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미키 마우스의 세계를 닮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여긴 광명의 지옥이다.

그림의 표면 안쪽 깊은 곳, 혹은 프레임 바깥을 상상할 수 없다는 건 지독하게 무서운 상황이다. 파졸리니는 이런 세계야말로 "파시즘적이고, 다른 모든 세계보다 더욱 파시즘적"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어떠한 제한도, 기준도, 통제도 없는 자신의 독재적인 왕국에 어떠한 외부의 가능성도 전혀 남겨두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파졸리니의 사유가 끝난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하는 아감벤은 이보다 더 체념적이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묵시록은 계속"된다고.

8.

네 명의 기사가 활개 치는 묵시록을 이겨내는 방범은 단 두 가지다. 끔찍한 네 명의 기사와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거나, 혹은 파국 이후의 세계로 시선을 돌리거나. 아감벤은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그는 자신의 옆구리, 혹은 등 뒤의 세계를 외면하고 언젠가 도래할 그날, 언젠가 도달할 저 지평 너머를 바라본다. 집착적으로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만을 그려댔던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랬던 것처럼.

아감벤이 부인하는 현실이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외부가 없는 밝은 세계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고작 1인 1표의 빈약한 원리에 집착적으로 매달리고 고작 이것에 만족한다. 마치 이것만 지켜내면 더 이상 어두웠던 시대는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9.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이런 그의 시선을 단호히 잘라내 비판한다. "저편을 본다는 것은 우리를 스치는 이미지들을 보지 않는 것"이라고. 그저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반딧불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으며 어디에나, 언제라도 잔존해있다고 말이다. 성난 어조로 그는 파졸리니와 아감벤 같은 비관의 철학자들을 향해 강변한다. "어떻게 잔존에 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라고. 당신들은 단지 "(당신들의) 시대에 절망했던 것이고 단지 그뿐이다"라고. 반딧불이 소멸한 것처럼 보이는 건 "오로지 (당신이) 그것의 뒤를 쫓기를 포기하는 한에서일 뿐"이며 "반딧불이 (당신들의) 시야에서 소멸하는 이유는 (당신들이) 머물러 있는 장소가 더 이상 반딧불을 발견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10.

이건 감동적인 연설이다. 하지만 비관의 근거는 지나치게 풍부하다. 희망을 버리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 근거와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 아직은 '99도'이며 1도만 더 오르면 된다고 말하기에 우리의 인내심은 이미 푹 삶아져 되살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가 기대고 있는 것은 그저 그렇게 게으르며, 당위에 가득 찬 낙관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치부하기에 그가 내세우는 희망의 근거는 지나치게 미미하다. 고작 반딧불, 그나마도 지극히 보기 힘들며 겨우겨우 잔존하는 미명. 이게 저자가 우리에게 들이미는 가능성의 전부다. 이건 어쩌면 비관주의보다 더욱 더 절망적이며 리얼한 통찰이다.

11.

반딧불, 혹은 대항적 이미지에 대해 그는 "이미지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잔여 또는 균열이다"라고 말한다. 그에겐 정치적 미술 혹은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디자인을 앞에 놓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삼류 비평가적 세일즈 기질이 없다. 이미지는 "다만 권력의 순수한 기능일 뿐인 것처럼 보이고, 최소한의 대항 권력도, 최소한의 반란도, 최소한의 대항 영광도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이미지, 미약한 빛을 뿜어내는 반딧불 말고 우리가 어디에 기대겠냐고 말한다. 그가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인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장래의 빈틈 있는 이미지에 관한 것이지 구원이나 종말의 시간의 거대한 지평에 관한 것이 아니다. 벤야민적인 메시아주의의 그 유명한 '좁은 문'은 오로지 잠깐만" 그것도 겨우 "1초" 동안만 열릴 뿐이다.

단 1초 동안 열리는 좁은 문과 딱 그만큼만 반짝이는 불꽃이 사라지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전보다 더 깊고 어두운 밤이다. 서치라이트는 주기적으로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반딧불의 출현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 그 어느 곳도 순수하게 어둡지 않고, 그 어느 시간도 완벽하게 비관적일 수 없는 세계. 서치라이트가 훑고 지나간 자리엔 또 다른 강력한 불빛이 들어와 우리에게 자애로운 빛을 비춰줄 수도, 어둠을 더럽히는 반딧불의 어지러운 춤이 자리할 수도 있다. 그 어느 쪽의 빛이 먼저 다가올지 우리는 미리 알 수 없다.

12.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고 지평은 왕국과 그 영광에 의해 가로막힌 것처럼 보이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다. 미리 비관하여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이미지들을 무시하지 않는 의지. 그리고 "가장 작은 반딧불 안에서 모든 사유를 위한 저항과 빛을 식별해내는 능력." 이 두 가지를 장착한 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마치 비가 오길 기다리는 제사장과 같은 마음으로. 하늘의 어딘가를 날아다니는 입자들이 부딪혀 비를 만들어내기를, 서로 대각선으로 부딪히며 제법 커다란 빗방울을 만들어내기를.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지 않고 기차에 몸을 맡긴 여행객과 같은 심정으로.

나의 당신의 마음이 설렌다. 옆으로 쭉 뻗은 철로와 나의 눈이 대각선으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해가 지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여긴 숲이고, 사막이다. 반딧불은 보이지 않는다. 서치라이트가 내 몸을 훑는다. 내 비관은 굳건하고, 당신이 손에 쥔 수표는 부도난 지 오래다. 그래도, 오늘도 어제처럼 제법 근사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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