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본을 보니 겉만 봐도 참으로 위압적이다. 양장본 두 권에 도합 1200여 쪽이다. 독자를 주눅 들게 하기 딱 알맞은 분량이다. 축구팀보다 더 많은 번역자 숫자가 이해가 간다.
한데 위압감을 느낄 이유는 단지 분량에만 있지 않다. 톰슨이 지은 모리스의 전기라는 점부터가 사뭇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톰슨 자신이 현대 사상사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런 사람이 19세기 후반의 가장 문제적인 사상가 중 한 명의 생애와 사상을 다뤘다. 주인공인 모리스와 대화하기도 벅찬데 화자인 톰슨 역시 정색하고 이야기 나눠야 할 상대다. 예수와 바울을 한꺼번에 만난 격이랄까.
더구나 톰슨의 모리스 전기는 단순한 한 권의 명저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범주 안에 든다. 톰슨이 이 책을 낸 게 1955년이었다. 그리고 3년 뒤 영문학자이자 이후 문화이론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문화와 사회>(나영균 옮김, 이화여대출판부 펴냄)라는 저작을 내면서 또한 윌리엄 모리스를 중요하게 다뤘다. 두 저자 다 좌파였고, 바로 그 좌파의 시각에서 모리스를 재평가했다.
톰슨의 책과 윌리엄스의 책 사이에는 1956년이 있었다. 헝가리 봉기를 정점으로 현실 사회주의권 전체(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가 탈 스탈린주의 물결로 들썩인 그 1956년 말이다. 영국 공산당 당원이었던 톰슨은 부다페스트 시가에서 소련군 탱크와 헝가리 민중들이 대치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미련 없이 당을 떠났다.
그렇다고 좌파의 신념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무당적자 톰슨은 오히려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어떤 절박감이 그를 재촉했다. 톰슨이 보기에는 스탈린주의의 속내가 여과 없이 드러난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의 전환과 재구성이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 <윌리엄 모리스>(에드워드 파머 톰슨 지음, 윤효녕 외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톰슨이나 윌리엄스가 이런 모험에 나선 것은 비단 1956년의 충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것뿐이었다면 이들은 선배 세대인 조지 오웰처럼 비판적 좌파와 반공주의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서 헤맸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다페스트의 환멸과 조우해야 했던 그 무렵에 이들이 경험한 또 다른 만남이 이들을 치유하고 '신좌파'의 길을 찾아 나설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바로 윌리엄 모리스와의 만남이었다.
톰슨의 모리스 전기는 이런 만남의 기록이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복잡한 역사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또한 새로운 역사의 길을 살며시 열어 보이는 작은 문틈 같은 역할을 한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윌리엄 모리스>를 읽으며 모리스와 톰슨만이 아니라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사라는 세 번째 대화 상대까지 마주해야만 한다.
르네상스적 인간, 윌리엄 모리스 - 누가 감히 그를 그려낼 수 있으랴
참으로 어려운 대화다. 이 짧은 지면에 이 대화를 요령 있게 담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이 글에서는 모리스와의 대화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그만큼 모리스 한 사람만으로도 그 중요성이 차고 넘치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지적 상황에서는 아직 그를 소개하는 작업조차 초보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의 이름이 전혀 낯선 것은 아니다. 한국 저자가 쓴 모리스의 전기가 이미 한 권 나와 있다. 박홍규의 <윌리엄 모리스 평전>(개마고원 펴냄)이 그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는 원제가
사실 모리스 같은 사람의 생애를 소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인간, 즉 팔방미인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자기 직업이 '디자이너'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정치조직에 가입하면서 그가 회원증에 기입한 직업명이 '디자이너'였다(<윌리엄 모리스 1>, 201쪽).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1차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라파엘 전(前)파의 영향에서 출발해 중세적 미를 현대에 재현한 미술공예운동가, 이것이 항상 그를 소개하는 글의 첫머리에 붙는 내용이다. 그는 책 장식, 가구 디자인, 인테리어 설계의 영역들을 개척했고, 디자인 회사를 설립해서 예술과 사업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했다.
그런데 윌리엄 모리스는 또한 문학가이기도 했다. 영문학사에서 낭만주의의 마지막 횃불을 이은 시인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면서 또한 북구 설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판타지 소설들의 작자이기도 했다. 그의 판타지 소설들은 이후 J. R. R. 톨킨 등의 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반지의 제왕>(김번, 이미애, 김보원 옮김, 씨앗을뿌리는사람 펴냄)의 저자인 그 톨킨 말이다.
톨킨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은 <톨킨의 환상 서가>(더글러스 A. 앤더슨 엮음, 김정미 옮김, 황금가지 펴냄)라는 단편집에서 우리는 윌리엄 모리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반지 원정대의 모험에 가슴 졸였던 기억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미 자신도 모르게 윌리엄 모리스라는 사람의 그림자를 마주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미술가이자 사업가이고 시인이자 소설가인 인물 ― 그 누가 이런 사람의 삶을 쉽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모리스만큼이나 폭넓은 관심과 재능을 소유한 이가 아니라면, 사실 불가능한 작업이다.
톰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저작이 일반적인 전기와는 궤를 달리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모리스의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려하기보다는 그 중요한 한 궤적에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을 미리 강조한다. 이 책의 부제가 이 집중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낭만주의자에서 혁명가로."
톰슨의 관심 - 낭만주의자에서 혁명가로
톰슨은 모리스의 미술가로서의 이력, 작가로서의 활동 등을 모두 '낭만주의자'라는 범주로 뭉뚱그린다. 그러면서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 문명에 대한 반발을 연료 삼아 중세적 미의 세계를 항해하던 이 낭만주의자가 어떻게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신대륙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방대한 책의 모든 관심은 이 한 가지 물음에 쏠려 있다.
이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좀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다소 퉁명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톰슨은 모리스의 삶에 대한 다른 측면의 관심들을 뒤로 밀어놓는다. 가령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가장 흥미로운 이슈 중 하나인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부인 제인 모리스, 그리고 그의 친구이자 라파엘 전파의 거장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사이의 삼각관계가 톰슨의 책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전기를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다재다능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은 예술가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는 서로 상반돼 보이는 이력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뜻밖의 필연적 연관성을 확보하며 하나의 전체를 이뤄가는 것을 좇아가는 여정은 예상외로 흥미진진하다. 다른 전기에서 흔히 기대하는 인간미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불만을 가질 독자들도 이 책을 중도에 놓지만 않는다면 예기치 않은 다른 방향에서 엄습하는 인간의 냄새와 자취에 끌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끓어오르는 예술적 열정과 자본주의 사회의 차가운 현실 사이의 모순을 직시했던 한 인간이 있다. 이 모순에 직면해 더 고립된 환상의 밀실로 침잠해 들어간 이들이나 아니면 자신의 동류들, 중간계급의 위선에 합류하고만 이들과는 달리, 모리스는 참으로 고뇌했고 해답을 찾아 나섰다. 그의 스승 존 러스킨의 다음과 같은 예언자적 외침이 곧 그의 절규였다.
"용광로의 바람소리보다 더 크게 우리의 공업도시들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는 실로 우리는 사람 이외의 모든 것을 제조한다, 우리는 면화를 표백하고, 강철을 단련하며, 설탕을 정제하고, 도기를 빚는다,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정신이라도 깨우치고, 단련하고, 정화하고, 형성하는 일을 우리는 전혀 장점으로 평가하지 않는다."(<윌리엄 모리스 1>, 94쪽)
그리고 비로소 모리스는 구원의 실마리를 찾았다. 단서는 모든 예술의 성취를 둘러싸고 있는, 그러한 성취에 반드시 필요한 토대인 당대의 대중이었다. 그 대중은 결코 자본주의 현실의 수동적 희생자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든 예술가들의 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거대한 꿈을 역사라는 캔버스 위에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또 다른 범주의 예술가, 즉 혁명의 주역들이었다.
"역사에 대한 연구와 예술에 대한 사랑과 실천을 통해 나는, 세상이 현재대로 멈춰버린다면 역사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만들어버릴 것이고 예술을 현재의 삶과 중요한 관련이 없는 과거 골동품 수집 따위로 만들어버릴 문명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증오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혁명이 싹트고 있다는 의식이, 예술적 지각을 갖춘 다른 이들보다 운이 좋게도, 내가 한편으로는 그저 "진보"에 악담을 퍼붓는 사람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주었고, 다른 한편으로 뿌리가 없는 데도 예술을 성장하게 만들기를 희망하는 중간계급 사이비 예술의 다양한 기획들 어떤 것에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실천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윌리엄 모리스 1>, 292쪽)
지금 당장 모순을 타파할 환상적 처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인간 동료들과 함께 이 모순에 맞서 싸워야 할 뿐이다. 모순이 해결된 새로운 삶의 대지는 이러한 운동이 한 발 한 발 다가갈 저 미래의 방향 어딘가에 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싹은 '이미'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 이 '아직'과 '이미'의 사이에서 모리스의 가슴은 다시 찾은 젊음과도 같은 희망으로 달아올랐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전혀 예술가가 아닙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바뀌어, 우리 사이에서 대중예술이 다시 성장하고, 그래서 한 시대의 산물이며 동시에 전 역사와 연결된 건축 스타일을 갖는 것, 그것이 제 평생 희망입니다." (<윌리엄 모리스 1>, 379~380쪽)
벌써 50세를 바라보는 성공한 예술가이자 사업가가 '사회주의자 선언'을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라면 그 충격이 어떠했겠는가.
하지만 이 중년의 거장은 그래야만 했다. 이것만이 그의 지난 반세기간의 미(美)의 여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을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좇는 자들의 명부에 단호히 자신의 이름을 더했다. 1883년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는 사회주의 정치조직, 민주연맹(사회민주연맹의 전신)의 회원이 되었다.
'윤리적 결단'으로서의 사회주의
<윌리엄 모리스> 1권에서 2권으로 넘어가면, 그러니까 제2부 '갈등의 세월'에서 제3부 '실천적 사회주의'로 넘어가면, 책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주인공인 모리스의 사회주의운동 투신과 함께 수많은 또 다른 주역들이 등장한다. 모리스의 동지들, 즉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영국 사회주의자들이 시끌벅적한 토론과 혁명가(歌)의 합창, 결의에 찬 가두 행진을 시작한다.
이 점에서 제3부는 윌리엄 모리스라는 한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전기다. 모리스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만큼이나 프리드리히 엥겔스, H. M. 하인드먼, 에드워드 에이블링, 존 링컨 머혼 같은 당대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상이 생기 있는 필치로 전달된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상·하>(E. P. 톰슨 지음, 나종일 외 옮김, 창비 펴냄)의 저자인 톰슨은 이 대목에서 역사학 거장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 마디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19세기 후반 버전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했으니 논쟁이 빠질 수 없다. '사회주의자' 모리스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민주연맹을 이끌던 하인드먼의 독단과 전횡이 심해지자 모리스는 사회주의 세계에 입문한 지 1년만인 1884년에 에이블링, 엘리너 마르크스(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등 엥겔스 주위의 그룹과 함께 조직 분리를 단행했다. 이들이 만든 새 조직의 이름은 '사회주의동맹'이었고, 이후 이 조직의 해머스미스 지부가 모리스의 정치 활동에서 주된 기반이 된다.
그런데 사회주의동맹 안에서도 갈등이 끝난 게 아니었다. 조직 안에는 에이블링 같은 충실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었고, 미하일 바쿠닌이나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받은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모리스는 아나키스트들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에이블링 일파와 견해가 일치한 것도 아니었다. 사회주의동맹이 취해야 할 정치 활동의 내용을 둘러싸고 이견이 나타났다.
창립 당시 에이블링이 제출한 규약 초안은 다음의 과제들을 제시했다.
"지방 정부와 학교위원회, 그리고 다른 행정단체에서의 사회주의자 선출을 활성화함으로써 정치력을 갖도록 노력한다."
"노동조합주의와 협동조합, 그리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모든 실제 운동을 돕는다."(<윌리엄 모리스 2>, 159쪽)
이런 방침의 뒤에는 엥겔스가 있었다. 엥겔스는 사회주의자들이 선거 등의 현실 정치와 노동조합운동 같은 대중운동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모리스는 이러한 견해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이미 페이비언 협회(시드니 웹, 조지 버나드 쇼 등)는 '지방자치 사회주의'라는 깃발 아래 지방선거에 적극 참여했고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이들이 노동계급의 정치를 자유당과의 선거연합에 끼워 맞췄다는 것이고, 이들의 '사회주의'란 것도 지방 관료제를 통한 몇몇 시혜적 조치들에 제한되었다는 것이다('수도와 가스의 사회주의').
모리스는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희화화를 보았다. 그는 노동계급을 "현재의 '세련된' 중간계급의 생활로 끌어올리는 것"(<윌리엄 모리스 2>, 624쪽)을 '사회주의'라 칭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문명과 과감히 단절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들을 창조한다는 사회주의의 본래적 이상의 실현을 늦추거나 방해하는 사기극일 뿐이었다.
"아마 우리는 노동자가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더 쉬워질 시대를 죽기 전에 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번영의 시대가 낳은 그런 결과에 만족할 일종의 공리주의적인 가짜 사회주의가 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어떤 계급체제도 그들에게 줄 수 없는 충만되고 온전한 삶에 대한 노동자들의 정당한 주장을 꾸준히 계속하도록 강력히 권함으로써 이러한 사기와 대결하는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 2>, 222쪽)
'공리주의적인 가짜 사회주의'에 대한 모리스의 염려와 환멸은 완강한 반의회주의 입장으로 이어졌다. 그는 선거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1880년대 말 막 타오르기 시작한 신노동조합주의의 물결을 수용하는 데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모리스가 사회주의동맹의 중점 과제로 제시한 것은 오직 교육, 즉 지속적인 사회주의 교육 활동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톰슨은 자신이 결코 성인전(聖人傳) 기록자는 아님을 환기시킨다. 그는 모리스가 사회주의동맹을 신노동조합주의의 파업 물결에 합류시키지 못한 것을 매섭게 비판한다. 당시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필요한 정치 방침은 엥겔스의 그것이었다. 의회사회주의 비판이 곧 현실 정치나 운동에 대한 기권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는 막대를 한 쪽으로 구부려도 너무 구부렸다.
톰슨에 따르면, 모리스 자신도 결국에는 이 점을 인정했다. 모리스와 엥겔스 주위의 그룹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사회주의동맹은 아나키스트들의 온상이 되어갔다. 모리스는 그제야 막대를 반대쪽으로 다시 구부려야 할 때임을 절감했다.
그래서 만년의 모리스는 사회주의동맹 활동을 정리하고 통합 사회주의정당 건설 운동에 나섰다. 의회나 지방자치단체에 참여할 필요성도 인정했다. 1896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노동자 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은 아니다. 모리스가 제대로 답을 찾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리주의적 거짓 사회주의'에 대한 애초의 불신과 비판은 여전히 강력한 메아리로 남는다. 누구보다도 톰슨 자신이 이 여운을 최대한 증폭시킨다. 2권 말미에 수록된 1976년의 '후기'에서 그는 이것이 윌리엄 모리스의 도움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맹점과 한계를 돌파하려는 시도였음을 내비친다.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문명의 수혜자 대열에 합류시키는 정도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던 모리스의 외침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두 중간 기착지, 복지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 '너머'를 탐색하려던 톰슨에게 더없는 정신적 원군이자 영감의 창고였다. 톰슨은 이 무기고에서, 노동자들이 갖춰야 할 것으로 '지성'과 '힘'뿐만 아니라 '용기, 즉 도덕적 자질'(<윌리엄 모리스 2>, 630쪽)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를 발굴해낸다.
다시 말하면, 대중의 윤리적 결단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하는 사회주의. 모리스는 '사회주의동맹 선언'(1885년)에 이에 대한 명쾌한 요약을 남긴 바 있다.
"우리가 옹호하는 경제적 변화는 그것에 상응하는 윤리의 혁명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안정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윤리의 혁명은 반드시 경제적 변화에 동반될 것이다. 양자는 하나의 전체, 즉 사회진화의 불가분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윌리엄 모리스 2>, 643쪽)
21세기 생태 사회주의의 선구자, 윌리엄 모리스
윤리적 회심(메타노이아) 없는 사회 변혁은 불가능하며, 진정한 사회 변혁의 조악한 모조품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회심인가? 자본주의 문명이다. 모리스만큼 치열하고도 끈질기게 유럽 자본주의-제국주의 문명을 극복과 전복의 대상으로 바라본 이도 드물다. 그는 일찍이 영국의 제국주의 전쟁을 비판하고 이에 맞서 싸우면서 자본주의적 '진보'의 근저에 도사린 이 '야만'의 맨얼굴을 절감했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문명이 이 이상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렇게 멀리 나가지 않는 게 낫다. 문명이 이러한 불행을 없애고 문명에서 생겨난 삶의 행복과 위엄을 어느 정도 모든 사람과 나누고자 하지 않는다면 (…) 그것은 단순히 조직적인 부당함이자 억압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고 현재의 문명은 허세가 더 심하고 더 교묘한 노예제를 강요하지만 전반적인 안위와 행복을 증진시킨 것처럼 보여 전복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더욱더 나쁘다. 그 전에 사라진 문명보다 더 나쁘다." (<윌리엄 모리스 1>, 399쪽)
하루라도 더 빨리 거짓 진보의 질주를 중단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와 대안의 가능성마저 말살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은 안 돼!"라고 외치는 노동 대중의 회심이야말로 '가장 급박한' 과제다. "사회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현재의 무정부적 독재"(<윌리엄 모리스 2>, 54쪽) 대신 노동 대중이 비로소 "사회 전체가 되어야 한다"(<윌리엄 모리스 2>, 161쪽).
톰슨이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모리스의 역사관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선택지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만 해도 모리스의 문명 비판은 동시대인의 비평이라기보다는 예언자의 경고에 더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모리스가 폭로한 문명 속의 야만은 곧 우리의 일상의 현실이다. 만년의 톰슨은 80년대 미-소의 제2차 핵군비 경쟁에서 이 야만을 보았고, 그래서 핵무장 철폐 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톰슨이 떠나고 난 지금, 우리는 아직도 핵무기 더미와 함께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의 포로 상태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에게 더없이 위안이 되는 대화 상대가 바로 윌리엄 모리스다. 우리는 마치 1950년대의 영국 신좌파 1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사회주의 구상에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영감들을 길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톰슨이 <윌리엄 모리스>에서 탐사한 것보다 더 풍부한 광맥일지 모른다. 가령 1950년대의 톰슨이 아직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태 위기의 견지에서 볼 때 모리스의 대안 사회 구상은 21세기 생태 사회주의의 한 원형을 제시해준다.
<에코토피아 뉴스> 등에 드러난 모리스의 대안 사회는 자본주의 시기에 등장한 중앙집권적 조직들과 과학 기술이 그 극단까지 발전한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전자본주의 농촌 공동체와 현대 도시 문명 사이의 새로운 종합에 가깝다. '사회주의동맹 선언'의 정식화에 따른다면, "새로운 발전은 옛 원리가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된 것을 나타내는 지점으로 돌아간다"(<윌리엄 모리스 2>, 642쪽).
예를 들어, 모리스의 사회주의에서 20세기 사회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거대 국가 관료 기구는 분권화된 민중 자치에 길을 내준다.
"내 생각으로는 새로운 사회에서 우리는 지방자치제, 각종 지방위원회와 교구와 같은 단체를 구성해야만 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실질적인 공공작업은 구성원들이 일상적인 작업을 하며 일하고 살아갈 그 단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 그러한 일을 할 어떤 능력이라도 가졌다면 누구든지 거기에 한몫해야만 할 것이다." (<윌리엄 모리스 2>, 571쪽)
이것이야말로 경제 권력의 역전과 에너지 전환 이후 인류 사회가 나아가야 할 모습의 정확한 소묘가 아닐까? 물론 이러한 대안 사회가 쉽사리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리스도 이것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20세기 인류가 국가사회주의라는 긴 우회로를 거칠 것이라고 예언한다. 모리스에게는 예언이었지만,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정확히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역사 그것이다.
그러면서 <에코토피아 뉴스>의 저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어설픈 타협이 새로운 계급투쟁으로 붕괴한 뒤에 샘솟을 대중의 각성에 희망을 건다. 또 다시 대결이 있고 고통이 따르겠지만, 이제 인류는 좀 더 나은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복지자본주의와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딛고 일어설 민주적 생태적 사회주의 말이다.
모리스가 희망의 판돈을 건 이 내기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좀 더 온화한 인상의 칼 마르크스 같기도 하고, 함석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덥수룩한 수염의 작달만한 노신사가 지금 바로 우리 뒤에서 우리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바로 너한테 건 거야! 너한테 달렸어." 그러면서 100년 전 영국의 노동자들 앞에서 토해냈던 그 말들을 다시 들려줄 것만 같다.
"내가 오늘밤 여기 있는 것은 여러분이 조금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여러분을 흔들어놓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 조금으로 만족한다면 여러분은 그 조금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노예가 되거나 자유로워지거나 둘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2>, 64쪽)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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