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원래 자살이 흑사병처럼 사회를 뒤덮은 나라가 아니었다. 20년 전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1989년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3133명이었고, 제일 힘들었다는 IMF 직후인 1999년에도 7056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겨우 12년 만에 두 배가 넘게 늘어나 버렸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자살 사망자의 급격한 증가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중앙자살예방센터가 만들어졌고 관련 예산도 배정되었으며, 심리적 부검을 통해 자살 원인을 분석해 그 대책을 수립하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자살로 떠나간 사람 뒤에 남겨진 가족과 친지들의 심리를 이해하고 도우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다. 서울시와 경기도 등지엔 자살 유가족 자조모임이 존재하지만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생각하는 것조차 괴롭기 때문에, 또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많은 가족들이 모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남겨진 이들의 괴로움과 고통은 매우 크다. 위로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지켜보게만 되고, 부담 주기 싫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대하게 된다. 그들의 날서고 긴장된 표정을 보면, 사회적인 관계망에서 전면적으로 철수해버리고 자기 둥지 안으로 들어가 전혀 나오지 않으려는 위축된 가족들을 보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전문가인 필자조차도 자살 유가족을 만나면 일단 먹먹하고 답답한 마음부터 들 때가 더 많다. 특히나 내가 치료했던 환자의 가족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신과 의사나 정신치료자 중에 자신의 환자가 자살한 뒤 겪는 심리적 고통에 대해 2004년 헨딘(Hendin. H) 등이 미국정신의학회지에 발표한 연구가 있다. 총 34명의 치료자가 응답을 했는데 그중 38퍼센트가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고 했다. 자살 위험이 있을 때 입원을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가족들의 원망과 질시를 견뎌야하는 것 등이 복합되면서 상실감, 죄의식, 전문가로서의 능력부재의 통감, 우울감 등을 두드러지게 경험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전문가들에게 환자의 자살은 피해갈 수 없는 불가피한 사건 중 하나이다. 아무리 훈련되고 단련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척 힘들고 괴로운 경험이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문가들도 이런 상황인데, 전혀 준비되어있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살다가 황망한 현실에 처한 자살사망자의 가족들은 어떻겠는가. 우리나라 인구의 6배인 미국의 1년 동안 자살사망자는 약 3만 7000명이다. 한 명의 자살은 대략 6명의 가족과 친지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추산되는 자살 유가족 수는 400만 명이고, 1년에 약 20만 명이 증가한다. 한국은 어떨까? 1년이면 10만 명 정도의 유가족이 발생한다. 자살이 급격히 늘어난 지난 15년의 추계에 따르면, 자살과 관련한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할 사람들이 대략 100만 명이다. 아주 적은 예외적인 사람들의 경험일 뿐이라고 하기엔 꽤 큰 수치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너의 그림자를 읽다>(질 비알로스키 지음, 김명진 옮김, 북폴리오 펴냄)와 <너무 이른 작별>(칼라 파인 지음, 김운하 옮김, 궁리 펴냄), 두 권의 책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여동생 킴이 21세에 자살한 뒤 시인이자 소설가, 편집자인 질 비알로스키가 경험한 것들을 쓰고, 동생 킴의 지난 인생을 추적하면서 가족이야기를 풀어내고, 킴의 예상치 못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다룬 책이 <너의 그림자를 읽다>다.
▲ <너무 이른 작별>(칼라 파인 지음, 김운하 옮김, 궁리 펴냄). ⓒ궁리 |
두 권 모두 글의 흐름의 순서가 서로 상의를 해서 쓴 듯 비슷하다. 자살 유가족으로서 그 사건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삭이고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이 결국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으로 토해내 자기 밖으로 내놓는 과정까지 다다르는 긴 여정을 마친 후에야, 두 명의 저자는 여동생과 남편을 떠나보내고 다시 자기 인생을 오롯이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과정임은 분명하다.
남은 사람의 첫 번째 의문은 '도대체 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은 자는 그저 추정을 할 뿐이다. <너무 이른 작별>에서 남편 해리는 44번째 생일날 아무 단서도 주지 않고 웃으면서 출근했다. 그리고 자기 진료실에서 마취제 티오펜탈을 정맥주사해서 자살했다. 우울해 보이지도 않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핑크빛 셔츠를 입고 있었다.
▲ <너의 그림자를 읽다>(질 비알로스키 지음, 김명진 옮김, 북폴리오 펴냄). ⓒ북폴리오 |
남은 사람들은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또 예측에 필요한 별다른 단서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수백 가지의 '왜'에 답을 하려고 하지만 영원히 그 답을 알 수 없다.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기한 없는 시험을 보는 수험생이 된다. 칼라 파인은 "간과해버렸을지도 모를 단서들을 강박적으로 찾는데 수없이 많은 시간을 소진했다. 오직 죽은 그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면서 고통받고 있다. 왜 왜 왜"라고 말한다.
자살은 다른 형태의 죽음과 다르다. 자살자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에게 우리의 분노를 직접 표출할 수 없고, 애도를 하기 전에 먼저 '왜'를 다뤄야한다. 그리고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만 한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불안을 안고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알아야 안심이 된다. 그래야 예방할 수 있고, 또 나는 그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원히 원인과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 또한 그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현실을 감내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두 책의 저자 모두, 자살 유가족은 자기가 스스로 새겨넣은 인장을 이마에 표식처럼 달고 살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자살 사망자의 장례식장에는 왠지 참석하기가 꺼려진다. 과거의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고, 고의적인 외면과 의도적 추방의 느낌까지 품고 살게 된다.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수렁에 갇힌 느낌을 갖고 살아간다.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교류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한다. 무덤을 찾아 애도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어린 자식에게는 비밀에 부칠 일이 된다.
책에 소개된 사례 중, 50살이 되도록 친어머니의 사망 원인을 모른 채 살아온 이가 등장한다. 나중에야 그 원인을 알게 된 후 가족들을 너무나 원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가족들이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암묵적으로 너무 수치스러웠다는 사람도 있다. 자라면서 엄마와 내가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게 싫었는데, 왜냐면 닮는 것 자체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왜'라는 의문과 함께 드는 두 번째 감정은 분노다. "사랑했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떠났다. 그런데 그는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런 부분들이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분노의 불길이 남은 사람들을 휘감아 파괴시켜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동시에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두려움은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심오한 질문과 너무 가깝게 달라붙어 있다. 누군가 "꼭 굳이 살아야할 필요는 없지"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아주 기본적인 규칙을 깨는 일이 된다. 엄청나게 두려운 감정이 스며든다. 그래서 사회는 자살을 금기시하려 시도하는지도 모른다고 칼라 파인은 얘기한다.
그 다음 죄책감이 생긴다. 우리는 흔히 자살자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 행동이나 실수 때문에 그가 죽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목매어 죽은 친구에 관해 논평하기를 "무엇을 그를 자살로 이끌었는가. 설명하자면 세상은 불행한 미망인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혐의를 덮어씌울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쓴 적이 있다. 이렇듯 '만일 내가 ___을 했다면', 혹은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부질없는 경우의 수의 방정식을 만드는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되풀이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희생자 이외에 누군가에게 자살의 책임을 돌리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은 죽은 자의 실패이지 유가족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누군가 자살하고 나면, 그 직후부터 죽은 이에 대한 모든 관심이 생전의 삶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날로 집중된다는 구절도 인상적이다. 80여 세의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 그녀에게는 풍요로운 인생이 있었다. 그러나 자살하고 나자 모든 관심과 기억은 죽은 그 날로 집중되었을 뿐, 나머지 날은 모두 지워져버렸다는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분노와 동시에 애도의 감정도 느껴야한다. 극단적인 두 가지 감정이 동반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 바로 그 당사자, 동시에 두 가지 다인 사람을 슬퍼하고 애도해야하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사람인 셈이다.
결국 남은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의 타협은 이렇다 .
"내가 해리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 용서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자살이 해리 자신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것뿐이다." (<너무 이른 작별>)
이렇게 인정하고 난 뒤 자살의 충격은 겨우 자기 안으로 흡수된다. 그리고 나서야 상실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단계로 진입해서 치유의 고유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 과정을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 일부 남은 사람들에게는 나쁜 기억이 깊숙이 자리잡게 된다. '문제의 해결책이 자살일 수 있다'는 역할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자살 유가족이 자살을 할 확률이 4배나 높고, 자살시도자의 네 명 중 한 명 꼴로 그 가족도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의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점과 자살이 역할모델로 제공되었다는 점이 상호작용을 하여 시너지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렇기에 더욱 더 치유적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절대시간이 든다. 빠른 지름길은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서서히 더디게 시간이 흐르면서 분노, 죄책감, 상실감, '왜'와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무뎌진다. 이제는 남은 사람의 마음 속에 가버린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혼란은 줄어든다.
분명한 사실은 그 일이 없었다는 듯 잊어버리는 게 해결은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떠난 사람의 행동이 남은 사람들의 인생에 중요한 반향을 주기 때문에, 자살 사건 전과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노력을 해도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하지만 그 자살이라는 사건이 남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힘이 점차 약해지고, 떠난 사람의 자살 당일을 전후한 기억은 옅어지고, 그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겪었던 풍부한 기억들이 생생히 되살아나고 명료해지면서 관계의 기억은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남은 사람은 돌아서서 다시 자기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것이다.
<너무 이른 작별>과 <너의 그림자를 읽다>가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결말은 이러하다. 떠난 자는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흔적에 휩싸여 삶이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살을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복잡하고 힘든 인정과 이해의 시기를 거쳐 충분히 애도를 하고 난 다음 그 다음부터는 이제 '안녕'이라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인 것이고, 순리인 것이다.
이 책들은 제3자일 수밖에 없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 언론인의 저서가 아니다. 실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 직접 체험한 내용을 쓴 책이다. 비록 번역서지만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유가족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삶과 죽음이라는 중요한 철학적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행동인 자살'을 소재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줄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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