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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도 안철수도 아니다! '75% 민주주의'가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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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근혜도 안철수도 아니다! '75% 민주주의'가 정답이다!"

[어쿠스틱 인문학] <정치의 몰락> 펴낸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대한민국 모든 선거 뒤에는 그가 있었다."

출판사의 홍보 카피를 염두에 두면 그의 첫인상은 의외였다. 정치 컨설턴트인 그는 폴로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여의도에서 대흥역까지 걸어 왔다. 그렇게 편안한 복장으로 말문을 연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심각한 주제 중 하나인 '정치'를 놓고서 요즘 유행하는 자극적인 말 한 마디 없이 또 구태의연한 폭로 하나 없이 두 시간 내내 사람들을 웃겼다.

<프레시안>과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가 함께 하는 '어쿠스틱 인문학' 여섯 번째 주인공은 '정치 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 29일 오후 7시 30분부터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문화 공간 '숨도'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그가 지난 2월 펴낸 <정치의 몰락>(박성민·강양구 지음, 민음사 펴냄)을 놓고서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악취 나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십상인 정치를 놓고서, 박성민 대표는 "가장 깨끗한 권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정치권력이 행정부, 사법부와 같은 '비선출 권력'보다 더 많은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 그는 "촛불보다는 투표가, 투표보다는 제도 변혁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적 열정보다 민주적 절차가, 그리고 제도를 통해서 역전 불가능한 '비가역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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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의 몰락>(박성민·강양구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1988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한 박성민 대표는 1991년 현재의 회사를 설립, 1997년 대선까지만 정치 컨설팅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의 나이로 서른다섯 살까지만 하겠다는 이 애초의 목표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마흔 살까지만'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마흔다섯 살까지만'으로 수정됐다. 또 다시 대선이 왔다. 이제 그는 "대선이라면 59세까지 해도 될 것 같다"며 느긋하게 말한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로서의 꿈은 자신으로 인해서 '정치 컨설턴트'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이다. "정치인의 길과는 다른 정치 컨설턴트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다. 마치 문학평론가 김현 이후로 문학 평론이 "창작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영역"이란 오해의 딱지를 떼어버리고, 그래서 후배들이 콤플렉스를 갖지 않아도 된 것처럼 말이다.

평범한 인간 박성민의 꿈은 따로 있다. 그는 "빨리 돈을 벌어 (이 판을) 떠나,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라는 꿈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인 그는, 행사 내내 여러 책과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며 인문학적 레퍼런스를 뽐내기도 했다.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사회와 청중들의 질문으로 2시간 동안 화기애애하게 이루어진 이날 행사를 인터뷰 식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슈퍼 을'을 돕는 사람들

이권우 : 국내에서 정치 컨설턴트란 직종은 생소하다. 대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일을 하는가?

박성민 : 정치 컨설팅이다. (웃음) 정치인의 캠페인 과정을 돕는다. 선거 때는 선거 캠페인을 돕고 평시엔 이미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미국에서는 이미 컨설턴트가 정치인의 위기 관리와 정책 컨설팅에 걸친 모든 영역을 담당한다.

한국에서 정치 컨설턴트의 가장 큰 역할은 정치인에게 지동설을 믿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좀 다르겠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정치에 입문하는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었다. 온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 실제로 그 사람의 '스펙(specification)'을 보면 너무나 화려하고, 인생에서 누구한테 져 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치에 입문하면 다르다.

공천 과정부터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3선 의원이었건 하버드 대학 박사 학위를 받았건 다 소용없다. 선거에 나가보면 무엇 하나 정치인이 '갑'인 관계가 없다. 언제나 을이다. 하물며 수행비서나 인턴 직원한테도 아쉬운 소리를 하는 입장이지 큰 소리 칠 게 없다. 공무원 출신 정치인에게 정치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더니 "과거엔 내가 밥값 내고 나가본 적이 없었는데, 이 세계에선 나보다 먼저 밥값 내고 나가는 놈 하나도 못 봤다"고 하더라. (웃음)

이권우 : 컨설턴트에겐 해당 정치인을 선거에서 당선시켜주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민심의 동향을 잘 읽어야 할 텐데.

▲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민' 대표. ⓒ상상마당 아카데미
박성민 :
반드시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목표라 할 수 없다. 정치인은 이겨서 앞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떨어져서 앞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넓게 보아 컨설턴트의 목표는 정치인을 망가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위험하듯이 정치인들도 잘 나갈 때와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정치 컨설턴트로서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민심의 동향을 읽는 일이 아니다. 정치 컨설턴트는 오히려 민심이 가장 흔들리기 쉬운 지점에 자신의 몸을 놓고서 그 흐름을 자신의 감각으로 익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적 당파성을 가진 사람들하고도, 진보적 당파성을 지닌 사람들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들의 목소리는 크지만, 그들이 민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니까.

미국에선 컨설턴트가 '공화당 컨설턴트', '민주당 컨설턴트'로 거의 정확히 이분되는 편이다. 정체성이 분명하다. 한국에선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잘 안 된다. 하나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당이 바뀐다는 것, 하나는 이른바 무당층의 존재다. 한국에서는 무조건 한나라당(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거대 보수 정당)만 찍는 사람이 38퍼센트 정도고, 그들을 단 한 번도 안 찍었고 앞으로도 안 찍을 사람이 35퍼센트쯤 된다.

선거는 나머지 27퍼센트가 어디로 쏠리느냐로 결정 난다. 이들을 '중도층'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 실은 좋게 말하면 당파성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웃음) 정치 컨설턴트는 바로 그 자리에 자신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정확히 민심을 읽을 수 있다.

이권우 : 많은 이들이 당신의 사적인 정치적 성향을 궁금해 한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사람을 컨설팅 하게 되어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는지 질문하는 독자도 있었다.

박성민 : 현재로선 당파성이 전혀 없다. 컨설팅을 맡고 안 맡고의 문제에서 중요한 건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해당 정치인이 나한테 직접 의뢰하느냐 아니냐다. '날 필요로 하는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가, 비즈니스에 걸맞은 대우를 해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조건이 맞으면 일을 맡는다. '돈 안 받고도 이 사람을 컨설팅해주고 싶다'거나 '이 사람만큼은 돈을 아무리 줘도 맡기 싫다'거나 하는 경우 모두 없었다.

이권우 : 어떤 정치 컨설턴트가 좋은 정치 컨설턴트라고 할 수 있는가? 컨설턴트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박성민 : 뛰어난 정치 컨설턴트는 전략을 A4 용지 한 장 안에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대통령 선거든 서울 시장 선거든 딱 한 장 안에 '이 선거의 핵심은 무엇이다. 나는 이 선거를 이렇게 본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은 이 세 가지, 해선 안 되는 일은 이 세 가지다'를 쓸 수 있어야 한다. 100쪽짜리 보고서를 만들어야 한다면 전략이 없다는 뜻이다.

그보다 더 뛰어난 정치 컨설턴트는 이 A4 한 장에 쓰인 전략을 후보에게 설득하는 사람이다. 선거에선 후보도 주변인도 다 전문가다. 그 사람들을 놓고서 '이 선거는 이렇게 가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것도 1분 안에. 옳은 설명은 대체로 1분이면 끝난다. 그 안에 끝나지 않으면 실패한 캠페인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컨설턴트는? 바로 전략을 유지하는 컨설턴트다. 어느 선거든 투표 직전까지 지지율이 흔들리고, 거기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 굉장하다. 그날그날 성적표가 나오지 않는가. 여기서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결정적인 위기에 대비한 플랜B가 있어야겠지만 웬만해서는 플랜A를 유지할 수 있는 배짱과 담력이 중요하다. 이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덕목은 보안 의식. 나는 절대로 어디 가서 정치인과 나눈 대화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상마당 아카데미

보수 시대의 종언? 진짜?!

이권우 : 이제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이 책의 부제가 '보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권력의 탄생'이고, 2장에서는 "보수의 일곱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색깔은 보수적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종언'이란 진단에 동의하지 못할 것 같다.

박성민 : 엄밀한 이론적 기준을 가지고 그런 진단을 내린 건 아니다. 실제로 한국은 분단과 전쟁, 독재를 거치며 60여 년 동안 보수가 지배한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먼저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 자체를 현실적으로 바꿔서 이야기해 보자. 한국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면 한나라당(새누리당) 대 반 한나라당이다. 민주당(민주통합당) 대 반 민주당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한나라당만이 한국에서 연대 없이 독자적인 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대 진보는 비유일 뿐 엄밀한 구분이 아니라는 걸 먼저 짚고 넘어가자.

선거는 보통 전력, 전략, 정신력으로 좌우된다. 1997년과 2002년에 한나라당이 아닌 대통령이 탄생했는데 지금까지도 기적에 가깝다는 게 역사적 평가다. 이때는 전력은 안 되는데 전략으로 이긴 거다. 1997년 당시 김대중 후보는 자기 혼자 힘으로 집권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보수적인 김종필 씨를 찾아가 손을 내밀고 결국 권력의 절반을 내준다. 거기다가 이인제 후보의 개별 출마라는 운까지 겹쳐 겨우겨우 이겼다.

2002년 당시 노무현 후보는 어땠나? 역시 보수 권력의 상징인 대기업 오너 정몽준 의원과 후보 단일화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른바 진보 개혁 세력이 이기기 위해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 김종필 씨나 정몽준 의원처럼 너무나 이질적인 사람이 아니라 안철수 교수 정도다.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다.

책에 보수를 떠받치던 일곱 기둥이 있다고 썼다. 지식인, 언론, 교회 권력, 문화 권력, 기업, 권력 기관, 정당이다. 첫째로 지식인, 현재 대중 공간에서 팔리는 책 열 권 중 아홉 권의 저자는 진보학자다. 다음으로 보수 언론과 보수 기독교 권력도 힘이 예전만큼 못하다. 네 번째는 문화인데, 사실 어느 나라에서나 문화계는 진보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특수하게도 문화마저 보수가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에 저항하는 단체를 만들 필요도 없이 '진보 연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시대'가 됐다. 기업, 권력 기관, 정당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볼 때 진보 세력이 갖는 토대가 이제 보수 세력과 비슷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가 '몰락'하고 있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압도적 우위에 처해 있던 시대는 확실히 종언을 고했다고 본다.

▲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상상마당 아카데미
이권우 :
책에서 몇 가지 중요한 시대, 세대 구분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설명했다. 이 변화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박성민 : 한국의 전후사 60년을 돌이켜 보면 대략 20년마다 구분이 가능하다. 전쟁을 겪은 뒤 1950~1960년대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고 가난이 넘쳤다. 먹을 게 없었고, 미국의 원조로 살아야 했으며 북한의 위협도 명백했다. 그 땐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실존의 시대'라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보릿고개를 넘기고 이제는 굶어 죽지 않게 된 1970~1980년대 20년 동안엔 '국가 권력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회의가 싹텄다. 유신, 긴급조치, 5월 광주뿐만 아니라 두발·치마 길이 단속, 여관방 단속 등 일상에서까지 독재를 경험하면서다. 그러면서 '민주의 시대'를 열었다. 그 다음, 1990~2000년대 초반엔 '그들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며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가 지배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무너지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이 읽혔으며 세계화가 위세를 떨치는 '자유의 시대'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자유주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시대인 지금은 어떠한가.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다. 월 스트리트의 탐욕과 그것을 부추긴 시장 권력이 드러났고, 대중은 분노하며 뉴욕을 점령했다. 시장에 회의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시장에 맡겨만 놓으면 다 잘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공화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고 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팔리고 공정이나 공동체란 말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이런 세대 구분도 가능하다. 한국에서 현재 새누리당을 떠받치고 있는 건 대부분 60세 이상 분들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세대로, 국민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이 분들은 의무와 충성만 다 했지 단 한 번도 권리를 주장해 본 적이 없다. 나 같은 40~50대는 부당한 걸 거부하기 시작한 세대다. 그러면서 '우리가 대한민국을 바꿨다'는 생각과 이른바 시민의 정체성을 갖게 됐다. 이들은 의무를 다 하면서 그와 비슷하게 권리를 주장했다. 한편, 지금의 20~30대에 해당하는 세대는 가난도 독재도 경험하지 못했고, 오직 소비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의무보다는 권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보기에 기가 막힌 거다.

문화적으로 보면 60대 이상인 분들이 젊었을 때 한국에는 전화나 TV가 '마을에' 한 대씩 있었다. 정보라고는 국가가 하달하는 게 전부였고 그 정보를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내 세대엔 전화나 TV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었다. 싫은 정보는 거부할 수 있는 시대였다. 현재 2030 세대는 개개인이 하나씩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정보를 자신이 선택한다. 정보의 주체는 공급자에서 소비자로 넘어갔다. 이들은 정치인마저 액정 화면을 넘기듯이 소비한다.

이권우 : 방금 구분에서 1950~1960년대를 직접 경험하고 현재 60대 이상이신 분들이 한국 사회의 보수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떠받치던 보수의 두 가지 프레임, 안보와 성장이 몰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박성민 : 한국엔 '안보 보수'와 '시장 보수', 두 가지 보수가 있다. 이를 다른 말로 대체하면 '북한'과 '돈'이다. 안보 보수는 모든 문제를 북한과 등치해서 본다. 포탄 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들에게 북한은 현실적인 위협이다. 그러니 통합진보당의 당내 민주주의 문제가 터져도 무조건 종북 문제로 보는 거다. 마찬가지로 '시장 보수'의 눈에는 무상 급식이 복지 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로 보인다.

그런데 이 안보와 경제(성장)라는 프레임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2010년 지방 선거 당시, 60세 이상 분들에겐 천안함 사건이 강력한 변수였지만 40대 이하에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또 이제는 과거와 같은 고 성장 시대가 아니며, 그나마 과실도 대기업이 가져가니까 보수가 내세우는 두 가지 프레임이 먹히지 않는 거다. 미국도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될 즈음 안보 보수와 시장 보수가 동시에 무너졌다. 전자는 이라크 전쟁 때문이고, 후자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때문이다.

2008년 미국 대선의 스타였던 세라 페일린이 상징하듯 미국에는 '사회 보수'라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보수 세력이 안보와 성장 외에 다른 문제에 개입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이 다양화되면서 이제 많은 문제가 사회, 문화적 문제로 넘어오고 있다. 무상 급식, 의료, 반값 등록금, 다민족·다문화, 사생활, 비정규직 문제 같은 것이다. 이 문제에 보수 세력이 대처를 못 한다. 문화적 이슈마저 북한 아니면 돈 문제로 보니까 대응이 불가능하다.

ⓒ상상마당 아카데미

'정치의 몰락'이 아니라 '75퍼센트 민주주의'

이권우 : 책에 한국 정치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75퍼센트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굉장히 신선했다.

박성민 : 제목으로 강력하게 밀었던 것이다. 스스로 위대한 발견이라고 자평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웃음) 그런데 '한국 민주주의가 75퍼센트밖에 발전하지 못 했다'고 오독될까봐 제목으로 하지 못했다.

나는 정치의 본질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만장일치, 둘째론 폭력, 셋째는 대화와 타협이다.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문제도 많은 제도다. 역사적으로 봐도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이 왔다 갔다 한 걸 보면 어느 하나가 우월하게 좋은 제도라고 하기 어렵다. 다만 민주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폭력을 배제한 방법이라는 점이다.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정치 제도 중엔 최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답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으로 타협이 안 되면 '다수결에 승복하라'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51퍼센트를 확보하면 모든 것을 다 장악하는 방식은 정치보다는 시장, 엄밀히 말하면 '주주 자본주의'의 원리에 더 부합한다. 기업에서는 51퍼센트의 주식을 가지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한다. 최고경영자(CEO) 출신들이 정치에서 실패하는 이유 중에 그런 문화 차이도 있을 거다. 그들은 결론 내리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니까.

여기서 반대하는 49퍼센트가 과연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겠는가. 가령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하던 당시 희생양이 될 게 불 보듯 빤한 건 농민이었는데, 이들을 대변하는 정당 혹은 정치인이 국회에 없으니 그들은 과소 대표되었고 결국 반대파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다. 한국은 승복의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게 없는 한 갈등은 끊임없이 반복될 거다.

그렇다면 51대 49가 아니라, 60대 40, 혹은 65대 35는 어떨까. 쉬운 예로 세 명이 식사를 하러 가는데 한 명은 김치찌개를 먹자고 하고 두 명은 자장면을 먹자고 했다고 치자.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 사람이 목소리를 강하게 내면 결국 결정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간다. 그런데 거기서 한 명이 추가되어서 자기도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말하면 1대 3(25대 75) 구도가 되어 상황은 끝이 난다. 김치찌개를 주장했던 한 명도 이런 상황에선 반박 못 한다.

이권우 : 그렇다면 한국 정치에서 승복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박성민 : 몇 가지 제안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대선 결선 투표제의 도입이다. 프랑스처럼 과반수를 얻지 못한 1등과 2등을 놓고 결선 투표를 하는 방식이다. '87년 체제' 이후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다섯 명의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그중 어떤 대통령도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적이 없다. (노태우 대통령은 36.6퍼센트, 김영삼 대통령은 42.0퍼센트, 김대중 대통령은 40.3퍼센트, 노무현 대통령은 48.9퍼센트, 이명박 대통령은 48.7퍼센트였다.) 대통령이라면 적어도 그 나라 국민의 50퍼센트 이상이 지지해야 정통성이 생기고 국정 운영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 자신이 찍은 대통령이어야 반대도 덜 한다.

지금 같은 경우엔 선거를 앞두고 이질적인 정치적 색깔을 지닌 후보들끼리 연대를 하려고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까 결과를 위한 연대가 아니라, 결과에 의한 연대를 하자는 거다. 한국 정치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 제안은 3당 합당 이전으로 좀 돌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결선 투표제를 도입해 선거 전 연대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면 지지율 10퍼센트 이상의 후보가 보수 쪽에선 세 명 정도 나오고, 진보 쪽에선 두 명 정도 나올 거다. 그게 건강하다고 본다.

두 번째 제안은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자는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를 예로 들어 보면, 현재 고양시는 총 네 개의 지역구에서 네 사람의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이것을 고양시 지역구를 하나로 합친 다음 국회의원을 득표수대로 뽑자는 이야기다. 지역구에서 최다 득표자를 한 명만 뽑게 되면 16대 총선 당시 경기도 광주에서 불과 세 표 차이로 떨어진 문학진 후보 같은 케이스가 생긴다. 그야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한 선거구에서 네 명을 뽑을 경우, 새누리당도 두 명 이상을 공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네 명 중 한 명은 진보 정치인이 들어가게 된다. 당선자 비율이 75퍼센트, 낙선자 비율이 25퍼센트가 되게 만들어 '자신이 던진 표가 국회의원을 만드는' 비율을 75퍼센트가 되게 하자는 거다.

중대선거구제로 시급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앞서 말한 한나라당 대 반 한나라당 구도의 고착화다. 사실 이 구도는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 사이에 맺어졌던 한시적인 '90년 동맹'의 결과인데 지금 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렇게 분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이해관계를 고작 두 개의 정당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다.

좌파 정당 두 개, 우파 정당 두 개, 이렇게 네 개로 분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름은 제발 이상하게 짓지 말고 (웃음) 가장 왼쪽에 '진보당', 그 다음으로 '민주당', 그 다음 '공화당', 가장 오른쪽에 '자유당'이 있을 것이다. 이랬을 경우 무상 급식은 진보당-민주당-공화당이 통과시켰을 거고, 한미 FTA는 자유당-공화당-민주당이 찬성해 통과시켰을 거라고 본다. 이럴 경우 양쪽 다 75퍼센트다.

ⓒ상상마당 아카데미

촛불보다는 투표가, 투표보다는 제도 변화!

이권우 : 온 국민이 정치 평론가인 시대다. 그들이 참여가 아니라 논평에 치중하는 것은 그만큼 정치에 냉소하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이런 정치 냉소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성민 : 정치, 제일 만만하지. 하지만 지켜보면 정치가 제일 깨끗하다. 종교, 언론, 학교, 관료, 기업 등 다른 권력보다 견제와 검증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정치를 죽이고 있는가. 하나는 세계화다. 국민의 삶을 좌우하던 냉전과 독재의 자리에 스포츠 스타, CEO가 왔다. 다른 하나는 정치의 힘이 빠지면 빠질수록 자기 힘은 커지는 세력들-관료, 언론, 사법기관, 시민단체 등-이다. '비선출 권력이 선출 권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미국이 위기나 갈등 상황에 닥쳤을 때 내세우는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이것이다. '우리(국민)가 뽑지 않은 애들은 일단 빠지고, 우리가 뽑은 애들이 상황을 주도해!'. 우리나라는 그 반대다. 국민이 뽑은 순서대로 의사 결정에서 밀린다. 그렇게 되니 한국은 관료들이 통치한다. 미국에서 로비스트는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관료를 상대로 한다. 대형 로펌 직원들이 고위직 관료 데려다 놓고 밥 먹으면서 법안에 이거 넣어라, 저거 어떨까 하는 데서 다 끝난다. 국회의원이 대 정부 질문할 때 총리와 장관을 세워놓고 법 바꿀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자기들이 법을 만들어 놓고 못 바꾸는 신세다.

언론에선 의원 회관이 초호화판이다 뭐다 하면서 국회의원 견제를 부추기지만, 한국 국회가 쓰는 1년 예산이 4000~5000억 원 정도다. 기초 지방자치단체 하나가 쓰는 예산이다. 일단 국회의원 보좌관을 6명씩 더 늘려야 한다. 로스쿨 나온 이 두 명, 회계사 두 명, IT 전문가 두 명씩 말이다. 그래봤자 행정부의 국, 아니 과 하나 상대하기도 버겁다.

이권우 : 그래도 여전히 정치는 힘이 세다.

박성민 : 그렇다. 정치는 세 가지 힘을 갖고 있다. 일단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위임받았다. 두 번째는 물리력을 배타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실체적 힘인 법이다. 세 번째는 300조 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나누어줄 힘이다. 여기에 정보도 추가할 수 있다.

누차 강조해 왔지만 "촛불보다는 투표가, 투표보다는 제도가 힘이 세다". 제도는 '그것이 탄생한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시스템이다. 은행이나 극장에서 대기 번호표가 생긴 이래 그것이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금융 실명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제도화의 가장 큰 장점은 공정하며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몇 번의 역사적 흥분기가 있었다. 하나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때다. 그러나 겨우 1년 후 1961년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유신 정권이 종말을 고했을 때다. 그러나 바로 12·12 쿠데타를 맞고 광주의 비극이 일어났다. 또 하나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땐데, 이때 사람들은 정말 세상이 뒤집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1987년엔 군인 출신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때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근간을 '87년 체제'라고 부른다. 대통령이 누가 되었느냐와 상관없이 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김으로 대표되는 제도권 정당과 재야 단체, 학생들이 '개헌'이라는 목표를 갖고 똘똘 뭉쳤고, 이들이 중심이 돼 성취한 6공화국의 헌법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 온갖 법제도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 많은 이들이 '2013년 체제'를 이야기하지만, 이건 비유하자면 사과가 여덟 개 든 비닐봉지 안에 경제 민주화니 복지 국가를 추가해 10개를 더 담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체제는 사과가 아니라 비닐봉지다. 사과가 50개는 족히 들어갈 수 있는 용기로 바꾸자는 거다.

이권우 : 대선까지 6개월 정도 남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싶은가.

박성민 :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말을 참 좋아한다. 나는 생각한 대로 산다. 그래야만 자유로울 수 있다. 약 파는 사람에게 휘둘리지 말고, 어떤 절대성을 믿지 말고 선택했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길은 우측으로만 가거나 좌측으로만 가서는 출구가 나오지 않는다. 직진하다 좌회전도 하고 우회전도 하다 보면 나오는 거다. 사람 나고 이념 났지, 이념 나고 사람 났나. 우리가 보수(진보) 정치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정치가 있는 거다.

우파가 치는 거대한 사기가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정부가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자극하게 된다는 이론)'이라면, 좌파가 치는 사기는 '저희를 찍어 주시면 여러분 삶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안 달라진다. 반 한나라당 세력이 자기들이 권력을 잡으면 이명박 정부를 '심판'하겠다는데 그렇다고 우리 삶이 달라지겠는가.

이권우 : 마지막으로 정리 말씀 부탁한다.

박성민 :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질 때부터로 본다고 한다. 창세기에서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쓰여 있지 않은가. 늘 어둠이 먼저 오고 그게 가면 새벽이 온다. 책에서도 지금이 진정한 어둠이 이어질 시대의 마지막 밤인지, 새 시대를 준비하는 전야인지 물었고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전야라고 생각하고 싶다. 저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된 이 책 제목(정치의 몰락)이 완벽한 역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웃음)

ⓒ상상마당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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