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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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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프레시안 books] 피터 버크의 <문화 혼종성>

소위 혼종(hybrid)과 혼합(fusion)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세계라는 시공간이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어떤 절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름들로 '우리'의 시대가 규정되고 소비되며 유통된 지 이미 오래라는 의미에서, 혹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시공간이 그러한 규정적 개념어들이 지닌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단일하게' 규정되어 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쩌면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의 시대와 세계는 말 그대로 혼종과 혼합의 시공간이다.

'우리'의 시공간은 혼종과 혼합이라는 어떤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인해 매우 '상상적으로' 작동되고 조작되는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상상적 시공간 한복판에서, 아니 그러한 한복판이 도래한 듯 보인지도 이미 한참 된 어떤 한복판에서, 한 책의 번역은 좀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뒤늦은 감마저 있다(이러한 '지연'의 감각은 이 책의 출판 연도인 2009년과 한국어 번역본의 출판 연도인 2012년 사이의 물리적인 시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터 버크의 책 <문화 혼종성>(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혹은 바로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어떤 집단적 정체성이) 속해 있는 남한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다문화(多文化)'라는 또 다른 폭력적 용어가 소위 '한국적 관용(tolérance)'을 의미하는 지극히 어용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서부터, '우리'에게도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게도"라는 저 가장 익숙한 듯 보이는 어구의 맥락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혼종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가장 문제적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낯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문화 혼종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그렇게 전형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교과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일차적인 미덕은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매우 영미적인) 교과서적 서술에 있으므로.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문화 혼종성이 현재 어떤 첨예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현상이 어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과연 다른 책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저 "각양각색의"라는 혼종적인 꾸밈말에 걸맞게 실로 각양각색의 사례와 예시들을 통해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포괄적 지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차후 더 진행될 수 있는 비판적 독해의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구인은 음악의 영역, 특히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같은 다른 문화로부터 음악을 차용한 뒤에, 결과물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본토 음악가들과 저작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3세계 음악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가공'되는 일종의 원자재처럼 취급해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00여 년간 서구 학자들은 자주 세계 다른 지역들의 식물이나 치료법 등에 대한 토착적 지식들을 이용해왔지만, 그 원천에 대해 항상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쪽)

▲ <문화 혼종성>(피터 버크 지음, 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 ⓒ이음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른바 문화적 '덧쓰기(palimpsest)'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분류에 바쳐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란 쓰고 지우며 그 지움의 흔적을 지닌 채 다시금 덧입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특징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예시들을 따라 그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보려는 욕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양날의 검일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에 대한 어떤 날 선 문제의식과 날카롭게 벼려진 비판 의식을 얻고 또 되묻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주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이택광의 해제를 오히려 피터 버크의 본문보다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택광의 해제 역시 다소 교과서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그리고 예상외의 그 논문 식 어투가 계속해서 독해를 방해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택광은 피터 버크가 그 자신의 주제인 '문화적 혼종성'에 대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해제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 해제를 단순한 '해설'로 읽지 않고 오히려 문화적 혼종성을 일견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피터 버크의 기만적인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서 읽어낼 때 우리는 이 해제의 의미와 위치와 맥락을 더욱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왜 (피터 버크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어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전략과 목표는, 단순히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정보의 습득에 멈춰서는 안 되며, 피터 버크 그 스스로가 오히려 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 저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라는 더욱 적극적인 독해 행위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독해의 방식이 이 책을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어쩌면 가장 '다문화적으로' 읽는 전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독서란 무엇보다 하나의 전략인 것).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철 지난 유행의 이론 혹은 일의적이고 동일적인 세계화의 숨겨진 전략이자 이데올로기였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지난 지는, 지났다고 생각된 지는, 실로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직 죽지 않은) 유령을, 그 유령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시 소환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냉전 시대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닌 가장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알리바이였다고 한다면, 문화적 혼종성이란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지닌 가장 국가적이자 국지적인 알리바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주에 반대하는 유목이란, 다시 말해 정착과 영토화를 거스르는 노마드(nomad)의 개념이란, 현재 그 정치적 파괴력을 잃고 얼마나 '낭만화'되고 '안전화'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실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hybrid'라는 개념은 '혼종성'이라는 지극히 점잖은 용어로 옮겨지는 동일성의 다른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 뜻에 걸맞게(그러나 또한 'hybrid'에 있어 '본래'라는 기원과 시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잡종'이라는 보다 잡스러운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날것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이 책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이 책이 지닌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서,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크레올화"(169쪽)이라는 개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은 실로 양가적인 개념이어서, 때로는 수구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적 질서 구축을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가장 파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이고 급진적인 논의들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아닌) '우리'는 작가의 (영문판) 서문으로 새삼 다시 돌아가 작가 그 자신의 변명 혹은 자기변호를 재차 되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백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한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는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혹은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문화적 전지구화가 작가 자신에 미친 '영향'이 정말 '복수'였는가 하는 문제(혹은 그것이 외부의 '복수'라는 이름을 가장한 지극히 내밀한 어떤 '욕망'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영향' 혹은 '복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쓰일(作/用)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일종의 폭력적 단순화 작업, 잡종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동일화 작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한 가능성의 주제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 불가능성의 지점을 매우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책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인 문화 혼종성이 지닌 어떤 불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 혹은 '우리'에게 이 책의 '번역'이 주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것일 터, 아마도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고 되물어야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야 할 어떤 문제적인 시발점일 것이며,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의 의미를 되물으며 이렇듯 끊임없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때에만 어떤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유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유목의 정치적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야 하듯, '우리'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잡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잡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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