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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한탄 "MB가 우리 밥줄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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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한탄 "MB가 우리 밥줄을 끊었다!"

[김대중 평전 '새벽'·41] 사이버 공간을 달렸던 70대 대통령

사이버 공간을 달렸던 70대 대통령

"금년 여름은 너무도 덥고 길다. 23일이 처서인데 더위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는다. 서울도 계속 30도의 무더위다. 이런 때 지하실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겹쳐 자는 서민들은 얼마나 힘들 것인가. 미안한 생각이 든다." (2006년 여름 일기)

나는 이 대목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김대중은 약자들을 많이 챙겼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취임하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5년 동안 그 다짐을 잊지 않았다. 1999년 3월 한국의 대표적인 유림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자식이 항상 부모를 모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효도를 해야 합니다. 노인들을 국가가 보호해야 합니다."

김대중은 세금을 낸 이상 자식들이 직접 모시지 못한 부모에 대해서 국가가 대신 도와주는 것, 이를 '효도의 변형'이라 생각했다. 김대중이 생각하는 국가적인 효가 바로 '생산적 복지' 정책이었다. 생산적 복지는 김대중이 취임 전부터 구상했다. 자신의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약자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으로 생계를 보장해주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자는 것이었다.

보수층 일각에서는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이라며 공격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동의하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 굶주리고 있다는 데 그걸 방치한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또 혈연이나 지연 등이 급속히 붕괴된 사회에서 가난은 이제 나라가 구제해야 했다.

새천년 2000년 설날 아침, 우리 시대에 버림을 받은 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불우 노인과 아동, 장애인, 노숙자 등과 떡국을 들었다. 김대중은 이 자리에서 "2000년을 빈곤 퇴치 원년으로 삼자"고 말했다.

김대중은 복지는 인권이라고 생각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최저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를 규정했다. 시혜적 단순 보호가 아니라 복지가 국민의 권리이며 국가의 의무임을 밝혔다. 법정 용어도 '보호 대상, 생계 보호'에서 '수급권자, 생계 급여'로 바꾸었다. 생산적 복지는 순전히 김대중의 의지에서 비롯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국정 이념으로 삼았지만 후에 생산적 복지를 추가해서 국정의 3대축으로 삼았다. 김대중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서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돈이 없어서 굶어 죽거나 공부를 못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국민 연금, 건강 보험, 고용 보험, 산재 보험 등 4대 보험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를 입안, 시행하는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선정(善政) 중의 선정이었지만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4대 보험 완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나름의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음이었다.

또 의약 분업을 실현시켰다. 의약 분업 정책은 약품의 오남용을 막아 국민의 건강을 지키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의사와 약사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되어 의료계가 두 동강이 날 지경이었다. 사실 의약 분업은 해방 이후 여덟 차례나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했던 난제였다. 어김없이 패싸움이 벌어졌다. 초유의 의료계 휴폐업 사태가 일어나고 환자가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의약 분업은 국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과거 정권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봉합하자는 타협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야당 총재 이회창은 전면이 아닌 시범 실시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밀고 나갔다. 옳다면 멈추지 않았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의료계 상식은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졌다. 그 후 한국에서 항생제 투여는 해마다 큰 폭으로 줄었다. 항생제의 저수지에서 국민들을 끌어냈다.

"지금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터넷과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는 아테네 광장에서 있었던 직접 민주주의 이래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참으로 놀라운 우리 국민의 지혜와 힘이다. 여기에는 내가 대통령 재임 당시 이룩한 정보화의 힘이 기반이 되었다. 이명박 정권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과 오만에 차 있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격변기인 지식 정보화 시대가 온 것도 몰랐고, 그것이 지난 10년에 이뤄진 대혁명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번 혁명으로 보수 정치인 뿐 아니라 조·중·동 등 보수 신문도 근본적인 변혁이냐 몰락이냐를 답하도록 요구 받고 있다." (2008년 6월 메모)

김대중은 퇴임 후 이렇듯 재임 기간 중에 이뤄놓은 지식 정보 강국의 업적을 지긋이 음미하고 있다.

김대중은 1982년 청주교도소에서 '우연히'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었다. 잡식성 독서 성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임을 알았다. 과거는 물질이 경제의 중심이었다면 미래는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지식이 세상을 끌고 갈 것이라 생각했다. 만일 국가를 경영하게 되면 지식 정보 강국을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

18세기 말 산업 혁명이 영국을 부흥시켰고, 19세기 말에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을 위주로 한 제2차 산업 혁명이 미국과 독일을 강자로 만들었다. 그렀다면 21세기의 지식 혁명 시대에는 누가 강자로 떠오를 것인가. 김대중은 한민족의 저력을 믿었다. GE 회장 잭 웰치의 말대로 한국인의 피 속에는 모험심이 흐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 후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지식 정보 강국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구체화시켰다.

"우리 민족은 지난 산업 혁명 시대에 근대화의 지체로 100년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보화만은 이제 시작입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나갑시다."

앨빈 토플러, 빌 게이츠, 손정의 세 사람은 김대중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들만 만나면 묻고 또 물었다. 토플러는 지식 정보 강국 건설에 영감을 주었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와 소프트뱅크 사장 손정의는 구체적인 방법과 정보를 알려주었다.

1999년 연말에 한국을 찾은 손정의는 김대중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학생에게 투자하십시오. 지금까지는 암기하고 외워야 했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이 있기에 생각하고 응용함으로써 인간이 더욱 창의적으로 될 것입니다. 한국 학생들이 장차 인터넷을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회인이 되게 하는 것, 이는 최고의 이윤을 얻는 투자입니다."

김대중은 손정의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 전국 초·중등학교를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했다. 손정의의 활동 무대인 일본서도 이뤄내지 못한, 세계 최초였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지식 정보 산업 육성에 매진했다. 무모하다고 여길 만큼 밀어붙였다.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을 질책했다.

"나 같이 늙은 사람도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하지 않습니까. 빛의 속도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주저하고 있습니까."

2000년 12월 정보 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전국 144개 주요 거점을 광케이블 초고속 정보 통신망으로 연결했다. 경부고속도로 길이보다 44배나 길었다. 2001년 2월 취임 3주년을 맞아 정부중앙청사와 과천청사를 연결해 사상 첫 '화상 국무회의'를 열었다. 2002년 11월 초고속 인터넷 가입 가구가 1000만을 돌파했다. 퇴임 무렵에는 인터넷 인구가 2700만 명을 넘었다. 세계가 IT 강국이라며 부러워했다.

정보 강국에 대한 과실이 제법 탐스러웠다. 김대중은 더 욕심이 났다. 전자 정부를 구축하기로 했다. 2001년 새해 민관 합동으로 전자정부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퇴임을 3개월을 앞둔 2002년 11월 전자 정부를 완성했다. 정보통신부 장관은 김대중에게 전자 정부 시대 신분증인 공인인증서를 전달했다. 마침내 김대중은 1982년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꿈꾸었던 지식 정보 강국의 꿈을 30년 만에 이뤘다. 감회에 젖은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전자 정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전자 정부를 발전시켜 세게 최고 수준의 정부를 만듭시다."

근대화 이후 일본을 처음 앞지른 것은 바로 IT 분야였다. 그 속에는 김대중의 집념과 열정이 들어 있었다. 70대 노인의 투혼은 실로 눈물겨웠다. 앨빈 토플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김대중의 업적을 기렸다.

"뛰어난 지도자를 지녀서 행복한 국민이다. 한국민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보통신부를 없애버렸다. 김대중은 이를 보고 탄식했다.

"현재와 미래에 우리를 먹여 살릴 부처를 폐지한다니, 그 사고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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