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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가슴녀'와 '분당선 대변녀',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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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가슴녀'와 '분당선 대변녀', 공통점은…

[프레시안 books]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인터넷 창을 열었더니, 포털 사이트 메인에 기사 제목이 몇 개 떴다. 눈에 보인 차례대로 읊어 보면 임수정은 "파격 하의 실종"을, 김아중은 "아찔 착시 의상"을, 손담비는 비키니를 입고 "오일 범벅"을 했다고 한다. 김효진은 롱드레스를 입었는데 "가린 다이 사이…"를 상상케 한다고 한다. 그 옆 검색어 순위에는 여전히 "분당선 대변녀"가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재미있다. 여자의 다리와 똥으로 26일 포털의 장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이 풍경.

본명과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성적으로 기호화된 여성과, 'OO녀'란 이름과 더러운 똥(혹은 막말, 무릎 꿇고 사과 요구, 흡연…)으로 등장하는 응징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 막 덮은 책의 주제와 관련된 일화를 발견하기 위해 어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책 제목이 많은 걸 말해 준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여성 지식인 우에노 치즈코가 2010년에 펴낸 책이다.

이 책의 주제인 '여성 혐오'란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한 가지 고백하고 넘어가자면,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이 책의 표지와 책등을 가리려고 의식하곤 했다. 딱 봐도 미혼인 여자가 홀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기 때문이다. 평소 성희롱에 가까운 대화 속에 놓여도 예민하게 굴지 않았고, 철없는 중년 남성들이 여기자라고 '헤헤거려도' 그러려니 했다. 실제로 '성적 대상화'에 둔감한 편이기도 하지만, '빡빡하게 구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정체성 게임의 역할 플레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14장(여성의 '여성 혐오'/'여성 혐오'의 여성)을 읽으며 뜨끔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장에선 "여자가 여성 혐오를 자기혐오로 경험하지 않고 넘어가는 두 가지 예외 전략"을 비판하고 있는데, 하나는 여성이라는 범주에서 이탈해 여성으로서 가격 매겨지는 것을 회피하는 '낙오 전략', 다른 하나는 명예 남성으로 인정받기 위한 '출세 전략'이다.

"진짜 여자는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나도 그게 싫어." A양이 말한다. "근데 너는 좀 특별하잖아." 남자가 인정한다. "응. 나는 '평범'한 여자는 아니지." 그녀는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253쪽)

물론 여기서 A양이 구별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평범한' 여성이지만, 그들보다 한층 혐오 받는 여성인 '페미니스트'로부터 나를 구별해내려고 했던 시도와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무엇을 구별해내든 출세 전략은 '명예 남성 되기'란 전략적 목표가 같으며, '까다롭지 않기' '예민하지 않기'란 규범 면에서도 비슷하다. 이 예외 전략은 "검둥이 노예는 틈만 있으면 속이려 들고 사기를 치려고 하지. (…) 자네? 자네는 특별해. 우리랑 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까"와 같은 예시처럼, 다른 종류의 사회적 관계에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나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여자가 아니므로, '여성'으로부터 내려왔으므로 상관없다"로 요약되는 '낙오 전략'에 대한 분석이다. 가령 유명 소설가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은 그야말로 여성 혐오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시선은 "하야시가 (암컷의) 경쟁으로부터 내려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면책된다고 말한다. 하야시의 독자들 역시 그녀의 타자화 메커니즘을 공유했는지 "여주인공이 내 친구와 매우 닮았다"는 감상을 많이 보내왔다고 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바로 이 "특권적인 예외를 둠으로써 차별 구조가 온존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명예 남성이건 '여성에서 내려온 여자'건 마찬가지다.

책 전체 열여섯 장 가운데 유독 이 장을 앞세운 것은 당신의 젠더 정체성이 여성이건 남성이건, 여성이라면 더 더욱, 우리 대부분이 차별화의 게임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혐오하거나 혐오 받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관찰할 뿐이다, 라고. 만일 계속 그런 입장에 빠져 있다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거나, 읽어도 무용할 것이다.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그렇다면 모두가 그 안전지대를 찾게 만드는 '여성 혐오'란 대체 무엇인가? 얼마나 엄청나기에? 우에노는 명쾌하게 말한다. 성별 이원제의 젠더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중력까지 동원된 엄청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여성 혐오란 단순히 '여자를 싫어하는' 감정 상태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다른 이름이자 그것을 떠받치게 하는 기제다. 저자는 남성 간 유대인 '호모소셜'을 끌어와 이를 설명한다. 호모 소셜은 성적 주체(로서 서로가 인정한 사이) 간의 연대로 이루어지며, 호모소셜한 남자가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치가 바로 여성에 대한 성적 객체화다. 이 객체는 절대 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에 대한 동일화와 남성이 되지 못한 여성의 배제를 통해서만 '남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여성 세계의 인정과 패권 게임은 어떤가? 우에노는 거기엔 반드시 남성의 평가가 개입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남자들이 인정하는 여자와 여자들이 인정하는 여자 사이에는 이중 기준이 존재하며 양자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남자의 인정으로 여성이 되는 여자들에게 여성 혐오란 곧 자기혐오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것을 직시하는 사람은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여기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착하는 순간, 비로소 여성은 탄생한다.

다른 한 축, '호모소셜리티'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포'로서 존재하는 것은 호모포비아, 즉 '나도 언젠가 성적 객체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계집'에 대한 경계다. 결국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혐오에 의해 성립되고 호모포비아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 우에노의 주장이며, 그가 이 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미국의 영문학자 이브 세지윅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다.

이 책은 이처럼 호모소셜-호모포비아-여성 혐오라는 이브 세지윅의 구도를 21세기 일본에 접목시킨 사회 분석서다. 세지윅이 셰익스피어에서 찰스 디킨스에 이르기까지 18, 19세기 영국 문학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면, 우에노는 호색한으로 알려졌던 나가이 가후(1879~1959년)의 문학, 일본의 각종 베스트셀러, 한류스타 이병헌의 인터뷰, 2008년 아키하바라에서 벌어진 '비인기남'의 무차별 살인 사건, 2009년 일본 전 국민이 환영했던 황실의 '남아 탄생' 등 우리에게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사건과 언설들 속의 여성 혐오를 파헤쳤다. 9장(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이나 11장(여학교 문화와 여성 혐오)처럼, 분석되는 일본 텍스트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도 마치 지금 여기에 대한 묘사로 읽을 수 있는 장도 적지 않다.

물론 여성 혐오는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우에노는 젠더와 마찬가지로 여성 혐오 역시 역사적인 구축물임을 밝히려 노력하고 있다. 다만 세지윅이 19세기 영국에서 발견한 여성 혐오가 21세기 오늘날 일본에서(또 한국에서) 생생하게 유통기한을 유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방대한 양의 현재적 텍스트를 분석한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역사적'이라지만 '중력'처럼 당연한 걸 대체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에노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와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전자의 시나리오는 한마디로, 여성 혐오를 받아들인 뒤 따라오는 지정석에 앉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여성의 말을 번역하면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는 의미다", 우에노의 지적에 또 한 번 뜨끔했다.

책이 내밀고 있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보는 것은 후자인데, 여기서 요약해 두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열쇠는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낸 남성들만이 제대로 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다만 이 책의 훌륭한 번역자가 남긴 '옮긴이의 말'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후자의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살짝 소개해 두려고 한다.

보지와 벼슬아치를 합친 '보슬아치'란 인터넷 용어를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냐'라는 의미다. 페미니즘 서적에 등장하면 뭇매 맞을 것 같은 이 단어를, 역자는 측은해하면서도 진심으로 환영한다. 군대에 취업, 결혼과 엄청난 평가의 무대 등 남성에게 지우는 짐이 너무도 무거운 사회에서 정말 몇 안 되는 '남성 경험의 언어화'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의 배후에는 '벼슬하는 보지들'을 '노비' 계급으로 끌어내리고자 하는 의도, 그리고자신의 성욕은 결국 여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과 울분이 존재한다. 역자는 한국의 여성 혐오를 한 마디로 압축하는 이 단어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제는 더 진지하고 사회 전복적인 언어화가 이루어지길,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부조리한 남성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호모소셜의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주 괴로워하는 지인이 생각났다. 견고한 남성 사회를 벗어날 길 없어 몸부림치지만, 연대 속에서 인정받기 위한 길로 여성을 소유하거나 성을 구입하려는 마음도 배짱도 없는 사람이다. 남성 사회에서 '남자 되기'에 벗어난 자들의 경험을 그는 매우 솔직하게, 때로는 자학적으로 언어화하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고자'라 이르는데, 왠지 훌륭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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