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사안에 얽힌 논점들을 분석하고, 역사적 맥락을 점검하고, 전문가 인터뷰를 붙여 넣는다. 방송에서 직접 해답을 알려주기보다 생각을 던져놓는 식이며, 다루는 주제는 이집트의 미디어 활용 시위 현장이든, 미국의 저작권 악화 논란이든, 기발한 미디어아트 프로젝트 소개든 미디어와 현대 사회의 모습이라면 무엇이든 범위에 들어간다.
내용은 지적으로 유익하고, 시각은 날카롭고,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다. 항상 기본적으로 깔리는 시각은, 미디어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지배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 삶의 중요한 도구이며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 <미디어 씹어 먹기>(브룩 글래드스턴 지음, 조시 뉴펠드 그림, 권혁 옮김, 돋을새김 펴냄). ⓒ돋을새김 |
브룩 글래드스턴이 집대성한 역사적 분석과 현재 사례에 대한 통찰, 관련 전문가의 식견의 종합에 의하면, 미디어는 거대한 지배 세력과 언론 기업의 전능한 의식 세뇌 기계 장치가 아니다. 그저 권력층의 향배에도 촉각을 세우고, 자사의 영향력과 이득에도 눈을 두고, 무엇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바로 우리들의 수준과 의향을 반영한다.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되, 그대로 보여주기보다는 때로는 거대하게, 배만 볼록 나오게 보여주는 마술 거울이다.
이런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음모론 분쇄의 쾌감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은 상당 부분 우리들이 개입하여 통제할 수 있으며,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우리의 생각을 좌우하는 전능한 기계 장치(원제 'Influencing Machine'의 의미다)로 오해하면 스스로의 책임 부분을 회피하며 무기력에 빠지고, 왜곡된 세계의 모습만 바라보게 된다. 현재의 미디어기술과 관행들은, 우리들이 개입하여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을 훨씬 더 넓게 열어주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바라보고 읽는 것을 직접 재구성하고 필터링하며 상호 작용하고 있다.
이런 당찬 주장이 그저 그런 낙관적 호소 수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풍부하고 정밀한 근거를 던져주고도 친밀한 전달력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근거로서 마치 <온 더 미디어>의 특집 방송을 듣는 듯이 많은 역사적 맥락, 미디어학의 연구 내용 소개, 전문가 발언들을 체계적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친밀한 전달력을 위해, 만화라는 양식을 선택한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가 박사에게 한 수 배우는 식의 학습 만화 연출이나 내레이션으로 가득 채워 놓고는 삽화를 삽입하는 '아이콘 총서' 유 방식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 속에 출연하여 내용에서 묘사하는 바를 시각적 유머와 함께 성명하는 방식이다. 이 책의 이런 전개방식은 스콧 맥클라우드의 기념비적 만화 이론서 <만화의 이해>와 닮아 있다.
조사 방법과 의도에 따라서 정치 여론 조사가 널뛰기할 수 있다(swing)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작가가 그네를(swing) 타다가 결국 넘어지는 대목은 상징적이고 섬세한 유머 감각의 단적인 사례다(비록 온전히 한국어로 번역하기에는 어렵지만). 조시 뉴펠드의 간명하면서도 형상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선은, 전문가들을 인터뷰 식으로 인용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그들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면서도 동시에 작가인 글래드스턴의 캐릭터는 충분히 카툰화된 모습으로 가볍게 묘사하는 범용성을 지닌다.
내용 면에서 근거와 논지를 전개시키는 방식은, 사람들이 어떻게 미디어를 스스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나씩 힌트를 주는 식이다. 가장 먼저, 우리가 현대 미디어의 폐해라고 여기기 쉬운 것들은 역사적으로 원래 그랬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민적 시각을 대변하지 못하고, 황색 경쟁 속에 천박해지며, 엉뚱한 집착을 부리고, 권력에 아부하는 것으로 보이며, 사업 모델이 파탄 나고 결국 사회 정의까지 심각하게 왜곡될 듯한 모습들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건국기 미국을 찍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더 심각했던 때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또 사회와 미디어는 굴러갔다.
그리고는 미디어 환경이 잘 정비된 기계가 아니라 난개발된 거울 나라임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현실을 굴곡하고, 또 다른 어디선가 굴곡된 상을 다시 굴곡하고, 그런 흐름 속에서 어디에서 현실이 끝나고 상이 시작되는지도 흐릿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백미는 저자가 꼽는 미디어의 여섯 편향이다.
편향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특정 이념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는 언론학 이론과 현장의 통찰을 조합하여 현행 저널리즘의 기본 형식에서 나오는 편향들을 꼽는다. 상업성 편향, 현상 유지 편향, 접속 편향, 시각성 편향, 이야기 편향, 그리고 무엇보다 공정성 편향이다. 특히 공정성이라는 신화에 대한 공격을 통해, 입장에 대한 투명한 제시와 풍부한 맥락 제공보다는 기계적 중립에 빠지곤 하는 뉴스 관행을 비판한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세부적 재반론과 토론이 충분히 가능한데, 다행히도 작가는 근거로 삼는 자료를 명시하는 것에 무척 부지런하다. 이외에도 뉴스 환경 변화와 매체 산업의 문제, 사실 조사보다는 대충 그럴듯한 어림짐작 숫자를 동원하는 "골디락 넘버" 등 여러 언론계의 치부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고 감안하여 한층 현명하게 사용자들이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정보를 필터링할 것을 종용한다.
이렇다 보니, 마지막 부분이 미디어 사용자들의 힘을 소개하는 것에 할애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사용자의 힘을 강조하는 클레이 셔키, 제이 로젠 등의 미디어 담론계의 스타들을 가득 데려오고 심지어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현상이 인간의 인식 한계를 초월하게 되는 시점)' 개념까지 크게 어색하지 않게 끌어들인다. "우리는 우리가 얻을 만한 미디어를 얻는 것일 따름"이기에, 우리들이 함께 스스로 더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알고 활용해야 한다. 더할 나위 없이 간명하고 시의적절한 선언이다.
물론 책이 다루는 내용들이 미국 사례 위주라는 것은 한국 독자들에게 있어서 명백한 한계다. 역사적 사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 미국 근현대사의 것이며, 수정 헌법 1조 같은 뉴스 환경의 가장 기반이 되는 조건들 역시 미국 기준이다. 언론사 간의 경쟁과 그에 따른 문제 발생 역시 미국이라는 연방제 국가의 지역적으로 분화된 시장을 염두에 둔 형태다.
사용자들의 구매력과 구매 의향이 직접 혹은 광고 브랜드 유치를 통해 언론을 움직인다는 정론 역시, 한국에서는 다소 다르게 적용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 대형 일간지를 소비 운동으로 변모시킬 수 있는 경로가 훨씬 좁은 것이, 건설 업체, 재벌 기업 등 소매 독자들의 소비 성향으로 좌우하지 못하는 광고처가 많기 때문이다.
유통망 과점과 그 안에서의 구독자 수 늘리기 출혈 경쟁(경우에 따라서는 정말로 피를 보는) 같은 특유의 문제점들 역시, 사용자가 직접 개입해서 고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반면 온라인 환경에서 보이는 여러 모습들은 확실히 그런 차이가 덜하며, 미국이든 한국이든 비슷한 방식의 저품질 과다물량 뉴스의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 여러 모로 볼 때, 이 책의 함의들을 한국 현실에 맞추어 다시 풀어주는 해설 편 작업이 함께 있었더라면 훨씬 유용했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정도로 날카롭고 발랄한, 그리고 동시에 탄탄한 미디어 비평 서적은 등장하기 쉽지 않다. 언론계의 엉터리 관행을 고발하는 통쾌함을 핵심에 두기보다는, 정말로 그 다음의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나아가기 위한 적극적 제안으로서의 비평이다. 말로 들려주는 듯한 말풍선 속 대사로서, 글로 된 읽을거리로서, 그림으로 묘사하는 생생함과 유머 감각으로서, 즉 만화로서 전달하는 바로 오늘날 필요한 미디어 사용자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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