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책은 진짜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을 담은 책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뉴웨이브의 전설 토킹헤즈(Talking Heads)의 보컬리스트였던 데이비드 번, 그가 즐겨 타는 자전거 그리고 여행.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조합해 나올 수 있는 가장 존재감 강한 이야기들이 이 책 안에 담겨져 있다. 단순히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어느 뮤지션의 '감상'을 벗어난다는 얘기다.
데이비드 번은 한때의 유행어로 '전방위 예술가'라는 표현을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거의 미국에서 자랐다. 1970년대 그룹 토킹헤즈를 결성해 '사이코 킬러(Psycho Killer)'라는 희대의 명곡을 내놓으며 독특한 음악 세계를 펼친 바 있다. <양들의 침묵>으로 유명한 조나단 드미 감독이 만든 공연 실황 영화 <스톱 메이킹 센스(Stop Making Sense)>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음악 영화를 꼽을 때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아이템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번은 뮤지션으로 멈추지 않았다. 영화도 만들었고 음반 레이블도 만들었으며 콘템포러리 아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워낙 독불장군이다 보니 나머지 멤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토킹헤즈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 아직도 음악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예술적 오지랖이 넓고 활동성이 큰 인물은 자신이 움직이며 바라보는 모든 것에 큰 관심을 뒀다.
▲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데이비드 번 지음, 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하지만 이 아티스트는 단순히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유람하며 어떤 볼거리가 있고, 또 어떤 명소를 가 보았는가를 기술하는 데 자신의 문장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일단 그는 자전거를 이용해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순례한다. 고도 산업화는 어떻게 대도시를 망쳤으며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등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부터, 자동차 전용 도로가 아니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할 수 없는 도로 시스템에 대한 비판 역시 빼놓지 않는다. 자동차라는 괴물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살 수밖에 없는 미국의 도시들을 자전거로 거닐면서 인간이 얼마나 불편하게 살면서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지를 지적한다. 또 그런 도시의 변화 속에서 시민들은 어떤 계급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도시 그 자체의 구조에 대한 고찰을 계속하는 데이비드 번은 유럽의 도시들을 순례하며 예술적 오지랖의 궁극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엘피판을 구입하기 힘든 것처럼 한국에서는 CD를 구입하기조차 힘들다는 현실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오디오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한다. 괴작을 쏟아낸 전위 예술가 오토 뮐의 작품과 검열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편, 동독 시대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정의의 존재에 대해 역설하기도 한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을 책 안에 담을 기세로 덤비면서도 지나친 지성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무겁지 않은 태도'를 유지한다. 이쯤 되면 데이비드 번이라는 예술가의 매력 그 자체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전후 맥락으로 꽉 짜여 있는 오만 가지 주제들이 범람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책의 원제(Bicycle Diary)가 말하듯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이들이 유럽의 자전거 친화적 도시를 여행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왜 내가 사는 곳에서는 이게 안 될까?"다.
재미있는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예술가 데이비드 번 역시 똑같은 것을 느꼈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도시들은 사실 자전거 친화적인 도로 환경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적어도 우리나라보다 보행권은 많이 확보된 곳들이 많지만, 사실 자전거를 위한 배려는 우리와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데이비드 번이 유럽의 도시들을 둘러보며 부러워하고, 또 한탄하는 것은 한국의 어느 자전거 애호가인 예술인에게 무한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데이비드 번은 베를린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 좋은 곳들도 다녔지만 이스탄불처럼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 좋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곳 역시 자전거로 다녔다. '교통이 복잡하고 동산이 많은' 이스탄불을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데이비드 번은 '자전거를 타면 가난뱅이로 간주하는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으로 모든 걸 잃은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경험으로 자전거를 천대하는 사고방식을 소개한다. 인도와 중국에서마저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우아를 떨며 자동차를 몰고 다닐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데이비드 번은 좀처럼 일종의 '자전거 캠페인'처럼 촌스러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경험 속에 자연스럽게 녹이고, 또 주장하고 싶은 바를 웅변하듯 외치지 않는 태도는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으로 매우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번은 마치 독서를 하듯 여행을 한다. 자신이 만난 사람 하나하나, 자신이 만난 장소 하나 하나를 읽고 또 해석하고 주석을 단다.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을 읽으면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속도와 분량으로 읽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몇 년 전부터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자출족'이나 하루 100킬로미터 이상씩 달리는 하드한 자전거 마니아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많은 자전거 마니아들이 뛰어난 자전거의 성능이나 장비들 그리고 복장과 대열에 집착하고 있다. 데이비드 번은 '자전거를 가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복잡한 하드웨어에 대한 설명 전혀 없이 자전거 여행이라는 것의 매력을 알려주는 것 역시 대단한 부분이다.
베를린, 이스탄불, 부에노스아이레스, 마닐라, 런던 등을 여행한 데이비드 번은 마지막 챕터에서 자신의 삶의 터전인 뉴욕으로 돌아온다.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이 도시에서 데이비드 번은 애완견을 안고 길을 건너는 패리스 힐턴을 피한 적도 있고 노래를 녹음하고 있던 중에 도시 전체가 정전 사태를 맞이하는 경험도 한다.
우리가 한국의 도시에 살면서 연예인을 목격하고, 또 강남 홍수 사태를 맞이하듯, 데이비드 번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예술가가 여행하는 법'을 담은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아니다. '예술가가 살아가는 법'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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