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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보다 '애국자'가 더 무서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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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보다 '애국자'가 더 무서운 이유는…

[안은별의 '만화경'] 이토 준지의 <우국의 라스푸틴>

'국가 권력 앞의 개인'

<부러진 화살>이 <도가니>에 이어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상 속엔 다양한 쟁점이 있지만, 논쟁은 기본적으로 영화가 공격 대상(적)이 누군지 명확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한쪽에선 영화가 내린 판단에 수긍하며 분노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선 '저것이 악이요', '저것이 적이요'라는 평가 자체를 문제 삼거나(그것이 이른바 영화의 리얼리티 논쟁이다) 그것이 불러올 악영향을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 의견이라 할 수 없으며, 영화의 효과를 논하는 데에도 개개인의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분명한 건 사법부라는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 놓인 개인과 그 둘 사이의 대결이란 구도가 관객들에게 영화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힘과 현실을 환기하며 분노케 하는 힘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점이다. 계란에게 어떤 하자가 있을 순 있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의 싸움에서 계란이 아닌 바위가 서사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일본 만화 <우국의 라스푸틴(憂國のラスプ─チン)>(서현아 옮김, 시공사 펴냄)도 국가 권력 앞에 놓인 개인의 싸움을 다룬다. 우리의 주인공 유우키 마모루, 검찰에 체포된 그는 머잖아 재판정에 설 것이며 징역 2년 6개월, 집행 유예 4년 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한국에 번역된 1권에도 일본에서 출간된 1~3권에도 아직 재판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만화의 원작이 된 실화에서 해당 인물이 그런 결과를 맞았기 때문이다.

▲ <우국의 라스푸틴>(사토 마사루 원작, 이토 준지 그림, 다가사키 다카시 각본, 서현아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1960년생, 외무성 분석1과 주임분석관인 유우키 마모루는 러시아 정권 상층부에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던 유능한 외교관이다. 그러던 그가 2002년의 어느 날, 오랜 기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정치인 츠즈키 미네오의 부패 스캔들에 휘말려 검찰에 체포된다.

체포된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2000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개최된 국제 학회의 인원 파견을 위해 국제 기관 '지원 위원회'의 돈을 부당하게 인출·사용했다는 혐의다(배임). 다른 하나는 같은 해 북방 2개 섬 디젤 발전기 사업 입찰 당시 특정 업체가 수주할 수 있도록 위법적 편의를 도모했다는 혐의다(위계 업무 방해).

유우키는 무죄를 주장하고, 그를 담당하는 검사도 취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유우키의 결백을 입증해 줄 관련자들이 하나 둘 검찰의 '시나리오'에 굴복하면서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검찰이 일개 과장 보좌급 공무원을 데리고 피곤한 싸움을 계속하는 데엔, 아직 실체가 등장하지 않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말하자면 이 만화는 전도유망한 외교관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남자가, 검찰·사법 기관에 대항해 싸움을 해나가는 이야기다. 이러한 싸움 속에 전문직(비관료파) 외교관으로서 유우키가 겪어 온 관료 사회의 모순과 비리, 숨겨진 외교 비화가 액자식으로 등장하며 정치·외교 드라마로 그려진다. 이 지점에서 주인공의 적은 검찰뿐만이 아니라 무사안일주의에 찌든 외무성, 선동에 앞장서는 매스컴, 매스컴이 '악당'으로 묘사하면 아무 비판 없이 몰매를 때리는 일본 사회 전체로 확장된다.

주인공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애국자'이자 일본 외교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능력자'인데다, 검찰 권력과 싸우는 '피해자'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그 비판의 목소리는 전지적이다. 홀로 모든 윤리적 우위를 점한(애국, 능력, 피해) 개인과 국가 권력의 대결, 그게 이 만화의 기본 틀이다.

우리 땅을 돌려줘!

"1991년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어 일본인을 평생 처음으로 대면하게 됐을 때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와 한국어를 같이 공부하게 된 한 일본 남학생이, 인사를 나눈 직후에 소련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나에게 양손을 내밀어 "북방 영토를 돌려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연발했다. 일개 개인인 나와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물었지만 그는 별로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같은 말을 했다."(☞관련 기사 : 박노자, '북방 영토, 도둑놈의 장물 싸움')

민망한 일화다. 다짜고짜 저런 말을 들은 박노자의 당황스러움이 전해져서가 아니라, 박노자를 일본인으로 일본 남학생을 한국인으로 북방 영토를 독도로 바꿀 경우, 한국인이 자주 '애국심을 드러내는' 습관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일본인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독도 얘기부터 꺼내는 한국인은, 놀랍게도 적지 않다.

<우국의 라스푸틴>과 박노자 일화를 엮은 데엔 이유가 있다. 이 만화의 뼈대가 국가 권력 대 개인의 싸움이라면, 그 뼈대를 감싸는 레이어가 북방 4개 섬을 둘러싼 러일 분쟁, 즉 쿠릴 열도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쿠릴 열도 최남단의 이투루프(에토로후) 섬과 쿠나시르(구나시리) 섬, 홋카이도 북동쪽의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 4개 섬을 놓고 오랫동안 싸워왔다. 이들 섬은 에도 막부 시절인 1855년에 일본 영토로 확정됐지만,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연방이 무너진 이후로도 여전히 이곳은 러시아 땅이며, 일본인들은 4개 섬의 '반환'을 '국민적 염원'으로 품게 되었다.

이는 양국 사이의 외교적 진척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숙제로, 민감하긴 하나 일본에게는 '얘기'가 되는 소재다. <우국의 라스푸틴>의 액자 속 시간 배경은 살얼음을 걷던 러일 관계 속에서 해빙기처럼 평화 협정 체결이 가시화되었던 1990년대 말이다. 유우키 마모루와 그가 따랐던 정치인 츠즈키 미네오는 '북방 영토 반환'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 국익을 부르짖는 두 남자, '잃어버린' 영토의 반환! 제목의 '라스푸틴'(전설적인 예언자로, 러시아의 매국노라 불린다)이 유우키의 '조작된' 범죄를 뜻한다면 '우국'은 그의 의도를 변호하는 셈이다.

영토는 다양한 직업, 계층의 사람들을 '국민'으로 묶어내는 효과적 수단이다. 그 영유권을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고 역사적 피해의 기억들이 겹치는 경우 더욱 그렇다. 엄밀히 따지면 그 역시 침략자이나 100년 가까이 확정되어 있던 영토를 패전에 의해 빼앗긴 일본에 있어, 북방 영토는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피해' 경험을 환기시키는 아이콘이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거대한(불의의) 가해자 대 작은(선의의) 피해자'의 구도와 닮은 구석이 있다. 어쨌거나 두 개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본질은 꽤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확인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면 사정이 좀 더 복잡해진다.

사토 마사루는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이 만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권의 표지를 보자. "그림 : ITO Junji(이토 준지), 각본 : NAGASAKI Takashi(나가사키 다카시), 원작 : SATO Masaru(사토 마사루)"다. 이토 준지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콜렉션'으로 워낙 유명한 만화가고, 나가사키도 <20세기 소년>, <몬스터>의 스토리 작가로 만화 팬들에겐 익숙한 인물이다. 생소한 인물은 원작의 사토 마사루(佐藤優). 그는 주인공 유우키 마모루의 모델 인물이며, 이 만화는 사토가 쓴 <국가의 덫(国家の罠)>(2005년)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 <국가의 덫>(사토 마사루 지음, 신쵸샤 펴냄). ⓒ신쵸샤(新潮社)
<국가의 덫>은 사토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나서 체포 사건의 배경과 내막을 폭로한 수기로, 제59회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받았으며 판매 면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사토는 열정적으로 정치 평론을 발표하고 수십 권의 저서를 집필하면서 논단에서 인기 있는 '필자'로 변신하게 된다. 국내 번역된 책은 다치바나 다카시와의 대담집 <지의 정원>(박연정 옮김, 예담 펴냄) 뿐이다.

도시샤 대학 신학부와 대학원 출신인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반체제 신학자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외무성 전문 직원 시험에 합격해 1987년부터 러시아에서 연수하고 외교관 생활을 한다. 1995년까지 주러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며 소련의 정계, 경제계, 학계 등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며 활약했다. (만화에도 나오지만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고르바초프의 생존 여부를 가장 먼저 도쿄 외무본성에 알린 공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엔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고 한다.) 귀국하여 1998년 국제정보분석 제1과 주임분석관으로 일하면서 러일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해 앞장섰다.

그러던 그가, 2002년 이 만화에서처럼 범죄자가 된다. 혐의는 앞서 설명한 만화의 경우와 같다. 그는 수사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1심 최후 변론에서 "외무성 문서가 공개되는 26년 후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 경고했으며, <국가의 덫>을 통해 무죄를 입증해 줄 모든 사실을 폭로했다. 일단 그의 목소리만을 접한 만큼, 법적 판단과 달리 내 눈엔 그 주장이 사실로 보인다. 그러면 그는 왜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을까? 2002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야기는 여기서 다시금 복잡해진다.

▲ 사토 마사루.

의도된 불씨, 북방 4개 섬

'라스푸틴'은 실제 사토 마사루의 별명이었다. 원래는 러시아 문제에 정통하다는 좋은 의미로 붙은 별명이며, 그걸 붙인 이가 만화에 '츠즈키 미네오'란 이름으로 나오는 실존 인물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다. 홋카이도 출신 자민당 국회의원인 스즈키는 외무위원장과 홋카이도 개발청장관을 역임한 실력자였고, 사토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주임분석관'이란 사토의 직책도 스즈키의 후광 덕에 '급조된' 것이라 전해진다. <우국의 라스푸틴>에서 유우키(사토)의 체포는 바로 이 츠즈키(스즈키) 의원을 잡아넣기 위한 '미끼 전략'으로 묘사된다.

▲ 스즈키 무네오. ⓒzaikaisapporo.co.jp
1990년대 초 알게 된 두 사람은, 대러 외교의 해빙기였던 1997~98년 러일 평화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둘과 일부 외무성 인사는 북방 4개 섬 가운데 하보마이 제도와 시코탄 섬의 우선 반환을 확실히 하고 2개 섬은 후에 교섭하는 러시아 안을 지지했다. 이른바 단계론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4개 섬의 완전한 반환을 요구해 온 일본 '우익 세력'이 극렬히 반발했고,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4개 섬 문제는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압력 단체는 물론이요 정치인·학자들의 압박이 계속됐고, 외무성 조직 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대러 정책 전환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2002년, 외무성은 마침 '고이즈미 내각의 어머니'라 불린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의 경질 파동으로 시끄러운 시기였는데, 그가 축출되자 외무성의 칼끝이 '다나카의 적 스즈키'로 향했다. 국민에게 인기를 얻던 다나카를 쫓아낸 부정적인 이미지에, 그와 관련된 부패 스캔들이 겹치면서 스즈키는 정치 생명 위기에 몰렸다. 이 시점에서 다나카와 스즈키가 서로 물어 죽이도록 획책하고, 스즈키 의원이 구속되도록 적극 협조한 것이 다름 아닌 외무성이라는 게 사토의 주장이다.

언뜻 보면 2개 섬이라도 받아내야겠다는 '국가주의적' 노력에 '우익 세력'과 '외무성'이 반발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찜찜함은 전후 일본 사회를 규정한 미국 주도의 냉전 체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그리고 외무성 내 '파벌'론으로 접근해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

소련은 이미 1955~56년에 2개 섬을 반환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고 일본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는 것이다. 소련과 대적하던 미국은 일본이 2개 섬만 돌려받고 쿠릴 영토 전체에 대한 소련의 원칙적인 영토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을 경우, 오키나와를 영구히 돌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박노자는 위의 글에서 ""냉전에서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소·일 관계에서 영토 문제라는 '불씨'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그 속성은 냉전 종결 후에까지 남아, 외무성 내 최강 파벌인 '친미 아메리카 스쿨'의 논리가 됐다. 친미파의 논리로 볼 때 스즈키·사토의 단계론은 축출 대상이며, 따라서 일본(외무성)은 "'대러 우호 관계 전개 속에서의 영토 문제 해결' 방안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2002년 스즈키와 사토의 갑작스런 구속이, 단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 사건 10년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중론이다. 게다가 현재 상황은 역전되고도 남는다.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글 솜씨, 이 사건으로 후광을 얻은 사토 마사루가 항소 중 자신의 경험을 일약 베스트셀러로 만들지 않았는가. 5년이 지나 유명 만화가 이토 준지의 손에 의해 만화화된 데 이어, 영화화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사토는 일본 여론이 활자가 아닌 와이드쇼, 주간지 광고의 선동적 이미지로 돌아가고 있다 개탄했는데, 그의 이야기가 공판 기록·기사→수기→만화→영화(아직 공식 계획은 없다)로 진실의 반전을 추진하고 있다는 건 재미있는 아이러니다.

3·11 대지진 이후, 전 국가 관료가 쓴 <일본 중추의 붕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관료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관료 개혁이 급선무라는 주장이 담겨있다고 한다. 섣부른 예단일지 모르지만, 지진 이후 국가 중추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너덜너덜해진 이 시점에 <우국의 라스푸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기의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직된 관료 사회에 맞선 외로운 싸움, 영토 반환(국익)이라는 선명한 목표, 그리하여 주인공과 일본을 동시에 '피해자'로 만드는 구도…. 음모론적 인식에 실화라는 배경까지. 그것이 바로 이 만화의 매력이자, 이 만화를 문제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토 준지 최초의 공포 만화?

<우국의 라스푸틴> 1권을 본 날, "이토 준지다!"라며 주저 없이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의 음험하고 황당무계한 공포 만화의 팬이었다. 몸 안팎이 뒤집힌다든지 사정없이 늘어나거나 찢겨져 그 지방이 벽에 달라붙는다든지, 그의 만화는 단조로운 내용에 이런 악취미적 설정이 비슷비슷하게 반복되는 무수한 다른 버전의 집합으로, 공포보다는 웃음을 유발한다. 무섭지 않은 공포 만화인 것이다.

그런 그가 본격 정치·외교 드라마를 그렸다니 기대가 클 수밖에. 1권을 덮으며 "이야~, 이제 이 애국자 연하는 외교관과 정치인을 꼬고 비틀어 공포를 가장한 개그를 던져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2, 3권을 구해 더듬더듬 읽어본 바…, 내가 기대하던 '비틀기'는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우국의 라스푸틴>은 일차적으로 외무성 내부 비판자인 전 공무원 대 엘리트 검사의 취조실 싸움이다. 이 구도만을 보면 대개의 독자는 강직한 성격의 유우키 마모루를 응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본의 북방 영토 문제'가 개입되면서 독도 영토 분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국 독자들에겐 다소 거리를 둘 여지가 주어진다. 그러나 거기서 독도라는 또 다른 국민화의 호명 기제를 들고 나오는 순간, 원작자와 같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의아스러운 것은 유우키 마모루가 말하는 국익, 그리고 애국 그 자체다.

"북방 영토 반환, 그게 내 비원일세. 나는 거기에 인생을 걸었다네." (츠즈키 미네오)
"나는 국익을 우선하는 외교관이며, 츠즈키 선생님은 국익을 가져올 수 있는 인물이니까요." (유우키 마모루)


<우국의 라스푸틴>에서 북방 영토 반환은 곧 국익이자 주인공들의 순수한 꿈이요 선(善)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았을 때 이는 일본의 식민 역사와 연결된다. 17~18세기 러시아와 일본이 쿠릴 열도를 두고 내 거다 네 거다 싸우기 이전, 그곳은 아이누 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1855년 일본의 영토가 되었지만, 섬의 원주민 입장에선 러시아나 일본이이나 식민주의적 침탈자였다. 극소수 남아 있는 홋카이도의 아이누 단체들은 1992년부터 '북방 영토에 아이누족의 자치 지구를 만들어 유엔이나 러일 양국의 공동 보호 하에 두어 달라'고 탄원했지만 양국은 주목하지 않았다. 박노자의 표현대로 '도둑놈들의 장물 싸움'이었던 셈이다.

사토는 재판 당시 "외무성 집행부는 스즈키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변호하고 방어해줘야 할 직원을 범죄자로 추방하는 것을 도왔다"며 "이번 수사가 일본 외교에 실질적인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사건이 외무성 내 "일을 벌이지 않는 체질의 만연"을 불러일으킨다면서 국익 손실을 지적했다. 이것이 '외교 강국에 도움 되는 유능한 외교관을 잡아넣다니, 더 큰 것을 잃겠구나 쯧쯧' 정도의 말로 들린다면 가혹하려나? 비록 음모에 인한 희생자라 하더라도 그 국익이란 대의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기에, 사토의 비분강개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사족이지만, 마지막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점 하나를 지적하고 싶다. 한국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는 것처럼, '북방 영토 반환'은 일본 공산당 강령에도 적혀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초정치적인 과제다. 그런데 이런 합심 효과가 사토 마사루를 향한 시각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결코 전 국민적 스타가 아니다. <위키피디아>의 사토 마사루 항목만 봐도 그에 대한 악평가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토가 활약하는 '논단'에서 그는 정치적 색깔과 상관없이 두루 모셔졌다는 사실. 보수적인 색채의 <분게이슌주(文藝春秋)>, <주오코론(中央公論)>부터 '일본의 지성' 이와나미가 발행하는 <세카이(世界)>와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슈칸 긴요비(週刊金曜日)>에 이르기까지.

'우익의 희생자'였지만 사토는 사실, 좌파들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국가주의자이며 천황제 지지자이고, 독도 문제에서도 강경한 일본 영유권 주장론자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 등에 있어선 일관되게 이스라엘 전면 지지를 표명했으며 가자 침공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북한에 대해선 무력도 불사해야한다는 입장이며 "재일 조선인 탄압은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환경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말했다.

물론 이는 놀라울 것도 없는, 대다수 보통 일본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토는 '우익의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렇기에 일본의 리버럴 좌파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실제로 2008년경 일본에서 개헌 추진이 가시화되었을 때, 좌파 정당·저널리즘은 사토 유의 재일 조선인 공격 발언에 대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는 '사토 마사루 현상'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관련 기사 :권혁태, '일본의 진보에 묻는다') 이명박 정부 심판을 위해 통합한다는 진보 양반들처럼, 더 큰 적을 향해 뭉치는 경향을 보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여기서도 놀랄 필요는 없는데, 그들(일본 리버럴 좌파)이 추동한 '전후 민주주의'에 원래부터 식민지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토 마사루의 독도 관련 발언이 꽤나 알려졌기 때문인지, <우국의 라스푸틴> 관련 블로그엔 '국내 정서상 이런 만화는 번역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악성 댓글이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이 만화가 계속 번역되길 바란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 묘사에선 예의 그럴듯한 연출력을 보여주면서도 영토 반환을 부르짖는 우국지사만은 노골적으로 미화하기에, 이야기 배경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메타 읽기'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국익'이 무언가를 반드시 희생시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호러 만화적 분위기를 제거한 이 만화가 이토 준지 최초의 공포 만화로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다른 '2030 세대'와 마찬가지로 외환 위기 이후 약 5년간 동네 만화 대여점과 절친한 사이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멀어졌습니다. 만화를 진짜 사랑한 경험은 어쩌면 그때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화 말고 다른 얘기도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월 1회 진행될 이 연재는 그 한 줌의 기억 그리고 다른 더 긴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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